약 3000년 전 성서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당시 유대 민족의 군사들은 팔레스타인 어느 곳에서 블레셋 군사와 대치하고 있었다. 블레셋 군대에는 키가 3미터가 넘는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버티고 있었다. 강철 투구와 청동 갑옷을 걸친 그는 연전연패한 유대인을 엄청나게 큰 창을 휘두르며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전의를 상실한 유대군사들은 이런 수모와 살육에 대해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었다.
그런데 다윗이란 작은 소년이 유대인의 왕에게 다가가 골리앗과 싸우게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별 뾰족한 수도 없던 터라 전전긍긍하던 왕은 그의 출전을 허락하였다. 전선으로 나간 소년 다윗은 작은 돌을 가죽 줄에 끼워 넣곤 빠른 속도로 던졌다. 다윗의 돌에 미간을 정통으로 맞은 거인 골리앗은 바닥에 쿵 쓰러졌다. 유대군인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며, 적을 무찔러 승리하였다.
다윗의 승리에 대해 유대인들만 환호하지 않았다. 얼마나 통쾌하게 여겼던지 전 세계인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겐 믿음의 힘으로 해석되었고, 사회적 약자들에겐 불굴의 의지와 용기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자기 계발, 처세술, 위로를 팔아먹는 장사꾼들이 이런 사건을 가만 둘리 없다. 약자들을 위한 성공 전략의 귀재 말콤 글래드웰은 <다윗과 골리앗 -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세상은 거대한 골리앗이 아니라 상처 입은 다윗에 의해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작고 약하다고 무조건 불리한 것은 아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사람은 불리한 조건에 놓인 약자들이다. 자신의 약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인생에서 성공하자.
그런데 강자에 대한 약자의 통쾌한 승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독교인의 믿음인가, 약자의 용기와 전략인가? 성서는 기록한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사무엘상 17:47) 성서의 맥락을 따라 이해할 때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다윗의 믿음 그 자체라기보다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이었다. 신의 능력이 없었더라면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난 주말 <또 하나의 약속>을 관람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밤늦게 극장을 찾았다. 그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인구 400만의 부산이란 대도시에서 한 극장에서만 부분적으로 상영하고, 그것도 우리 집과 멀리 떨어진 해운대에서만 상영하는 바람에 포기했었다. 지난주부터 집 근처에서 영화가 시작된 지라 곧바로 달려간 것이다. 알다시피 이 영화에서 황유미는 삼성반도체 입사 2년 만에 백혈병을 얻어 2년간 투병생활을 이어갔지만 스물셋의 청춘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의 죽음에 대해 산업재해 판정을 얻어내기 위해 근로복지공단과 외로운 투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싸움은 결코 쉽지 않다. '또 하나의 가족' 거대한 삼성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불의의 장사꾼'인 거대한 로펌, 국가기관, 비우호적 언론, 사회의 무관심과 오해, 어느 하나 이 작은 이들의 편이 되어주는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누구는 이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할는지도 모른다. 작은 황상기와 거인 삼성의 대결이니 맞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삼성에 대한 황상기의 대결과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대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성서에서 다윗은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과 그 도움으로 승리하였다.
하지만 황상기의 싸움은 고독하고 외롭기만 했다. 다윗을 돕던 여호와는 황상기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이 없는 그곳에 '사람'은 있었다! 먼저 증언을 자처한 반도체 공장의 기술자가 신의 자리를 대신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법정에 서준 양심적인 증인들 덕분이다. 또 있다. 이종란 노무사다. 그녀는 황상기와 함께 2007년부터 삼성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녀는 노사관계에 관한 한 국가가 인정한 전문가다. 실력을 갖춘 정의로운 그녀와 함께하는 한 황상기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증인들의 양심과 이종란의 실력에 힘입어 신도 버린 이 작은 다윗 황상기는 결국 1심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다윗과 골리앗은 성서의 설화에 불과하지만 가진 자들의 능력을 입은 삼성에 맞서는 신이 버린 황상기, 이종란, 증언자의 이 싸움은 실화다.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정의롭고 실력 있는 변호사가 없었더라면, 부림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황상기를 도운 이종란이라는 노무사가 없었더라면 이 작은 다윗은 골리앗의 창에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믿음과 용기는 물론 기발한 전략마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이다. 모든 선생이 그렇겠지만 나의 소망은 한 가지다. 배움을 통해 학생들이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그 능력으로 사회의 '좋음'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좋음에 이바지하자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정의로운' 젊은이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하기를 빈다. 그리하여 신이 버린 광야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는 '황상기들'을 수많은 노무현과 이종란이 되어 지켜주기를 열망한다. 정의롭고 따뜻한 젊은이들의 실질적인 능력, 곧 실력이 사회를 진보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냉소만으로 '또 하나의 약속'은 절대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데 다윗이란 작은 소년이 유대인의 왕에게 다가가 골리앗과 싸우게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별 뾰족한 수도 없던 터라 전전긍긍하던 왕은 그의 출전을 허락하였다. 전선으로 나간 소년 다윗은 작은 돌을 가죽 줄에 끼워 넣곤 빠른 속도로 던졌다. 다윗의 돌에 미간을 정통으로 맞은 거인 골리앗은 바닥에 쿵 쓰러졌다. 유대군인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며, 적을 무찔러 승리하였다.
다윗의 승리에 대해 유대인들만 환호하지 않았다. 얼마나 통쾌하게 여겼던지 전 세계인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겐 믿음의 힘으로 해석되었고, 사회적 약자들에겐 불굴의 의지와 용기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자기 계발, 처세술, 위로를 팔아먹는 장사꾼들이 이런 사건을 가만 둘리 없다. 약자들을 위한 성공 전략의 귀재 말콤 글래드웰은 <다윗과 골리앗 -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세상은 거대한 골리앗이 아니라 상처 입은 다윗에 의해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작고 약하다고 무조건 불리한 것은 아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사람은 불리한 조건에 놓인 약자들이다. 자신의 약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인생에서 성공하자.
그런데 강자에 대한 약자의 통쾌한 승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독교인의 믿음인가, 약자의 용기와 전략인가? 성서는 기록한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사무엘상 17:47) 성서의 맥락을 따라 이해할 때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다윗의 믿음 그 자체라기보다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이었다. 신의 능력이 없었더라면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난 주말 <또 하나의 약속>을 관람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밤늦게 극장을 찾았다. 그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인구 400만의 부산이란 대도시에서 한 극장에서만 부분적으로 상영하고, 그것도 우리 집과 멀리 떨어진 해운대에서만 상영하는 바람에 포기했었다. 지난주부터 집 근처에서 영화가 시작된 지라 곧바로 달려간 것이다. 알다시피 이 영화에서 황유미는 삼성반도체 입사 2년 만에 백혈병을 얻어 2년간 투병생활을 이어갔지만 스물셋의 청춘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의 죽음에 대해 산업재해 판정을 얻어내기 위해 근로복지공단과 외로운 투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싸움은 결코 쉽지 않다. '또 하나의 가족' 거대한 삼성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불의의 장사꾼'인 거대한 로펌, 국가기관, 비우호적 언론, 사회의 무관심과 오해, 어느 하나 이 작은 이들의 편이 되어주는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누구는 이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할는지도 모른다. 작은 황상기와 거인 삼성의 대결이니 맞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삼성에 대한 황상기의 대결과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대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성서에서 다윗은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과 그 도움으로 승리하였다.
하지만 황상기의 싸움은 고독하고 외롭기만 했다. 다윗을 돕던 여호와는 황상기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이 없는 그곳에 '사람'은 있었다! 먼저 증언을 자처한 반도체 공장의 기술자가 신의 자리를 대신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법정에 서준 양심적인 증인들 덕분이다. 또 있다. 이종란 노무사다. 그녀는 황상기와 함께 2007년부터 삼성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녀는 노사관계에 관한 한 국가가 인정한 전문가다. 실력을 갖춘 정의로운 그녀와 함께하는 한 황상기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증인들의 양심과 이종란의 실력에 힘입어 신도 버린 이 작은 다윗 황상기는 결국 1심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다윗과 골리앗은 성서의 설화에 불과하지만 가진 자들의 능력을 입은 삼성에 맞서는 신이 버린 황상기, 이종란, 증언자의 이 싸움은 실화다.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정의롭고 실력 있는 변호사가 없었더라면, 부림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황상기를 도운 이종란이라는 노무사가 없었더라면 이 작은 다윗은 골리앗의 창에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믿음과 용기는 물론 기발한 전략마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이다. 모든 선생이 그렇겠지만 나의 소망은 한 가지다. 배움을 통해 학생들이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그 능력으로 사회의 '좋음'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좋음에 이바지하자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정의로운' 젊은이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하기를 빈다. 그리하여 신이 버린 광야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는 '황상기들'을 수많은 노무현과 이종란이 되어 지켜주기를 열망한다. 정의롭고 따뜻한 젊은이들의 실질적인 능력, 곧 실력이 사회를 진보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냉소만으로 '또 하나의 약속'은 절대 지켜지지 않는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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