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 이후 한국 사회에는 통일 담론이 급격히 퍼졌다. 전문가들은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통일 대박론은 “환상”에 불과하다며 아래로부터의 교류를 통한 점진적인 통일, 주변국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하고 성찰하는 과정상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6일 <프레시안>과 동아시아미래재단이 공동 주관한 ‘동아시아미래재단 제2차 대토론회 : 한반도 통일과 동아시아의 미래’에서 기조 발제를 맡은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는 현재 동북아 정세를 우리에게 ‘기회’로 만들려면 남북한의 통합된 힘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대기자는 “통일 이전에라도 남북 관계가 안정된다면 새로 구축된 동북아 질서를 우리 쪽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김 대기자는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대기자는 “(통일 대박론은) 이미 통일이 된 상태에서 통일이 얼마나 좋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어떤 통일인지 구체적 청사진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정말 통일 대박이 되려면 ‘소(小)박’이라고 할 수 있는 풀뿌리 민간교류와 ‘중(中)박’ 정도로 볼 수 있는 개성공단,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경제협력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통일 대박은 환상이나 신기루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김 대기자는 풀뿌리에서부터 활발한 교류를 통해 탄탄한 하부구조를 쌓아 이를 통일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독일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풀뿌리 교류가 잘돼서 화해의 하부구조가 탄탄하다면 아무리 남북 당국 간 문제가 생겨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남북관계 기본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며 “설사 손상되더라도 빠른 시간 안에 원상복귀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남북 교류협력 늘려야 하지만···북핵이라는 변수 어떻게?
이날 토론에 참석한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자 한반도 미래포럼의 천영우 이사장은 남북 간 풀뿌리 차원에서의 교류는 바람직하지만 이를 제약하고 있는 것이 북핵문제라고 지적했다. 천 이사장은 “우리가 (민간 교류를 추진하는 것이) 북한의 핵·경제발전 병진 정책을 도와주는 돈줄 노릇을 한다고 비쳐질 수 있다”며 “따라서 민간 교류 추진은 대북 제재를 위한 국제 공조 차원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북핵 문제의 진전 없이 하부구조의 교류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천 이사장은 민간 교류와 비핵화를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재정 여력을 확충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북한에 가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방북을 허용해줄 필요가 있다”면서 김 대기자가 말한 ‘소박’ 수준의 남북 교류는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과 교류협력 하겠다고 하면 국민들이 허용하겠나”라며 북핵 문제의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 전 장관은 “우리 정부는 미국이 북한과 관계 개선하려고 하는데도 북한이 계속 핵개발을 하면 그 때는 중국이 책임을 지라고 하는 식의 ‘패키지 외교’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중에 동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북한이 붕괴하면 자동적으로 통일된다?
일각에서는 북한을 붕괴시켜 남한이 북한을 접수하는 방식의 통일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유력 안보 인사가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정세가 불안하다는 점을 근거로 “2015년 통일론”을 제기하면서 현 정부가 북한 붕괴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김 대기자는 “통일 대박론의 맹점 중의 하나가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하는 것 같다는 점”이라며 “이는 매우 위험한 접근”이라고 우려했다.
천영우 이사장은 북한이 붕괴하면 통일이 된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북한 붕괴로 인한) 흡수통일은 정책 목표가 될 수 없다”며 “흡수통일은 다른 모든 선택지가 모두 소진됐을 때 꺼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반론도 제기됐다. 민주당 손학규 상임고문은 “지난 10일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던 지인에게서 북한 소식을 들었다”며 “그는 평양이 경제제재 중인데도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고 밝혔다. 손 상임고문은 “최소한 겉에서만 보더라도 북한에 급변 사태나 급격한 붕괴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고 진단했다.
한반도 통일, 주변국가들은?
송 전 장관은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한국 주도의 통일을 중국이 받아들일까? 미군이 철수해서 중국이 한반도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치는 국가가 된 상태가 된다면 미국은 한국의 통일을 도와줄까?”라며 “이것은 냉혹한 질문이자 우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이다. 여기에 대한 고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중국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대기자는 “만약에 북한이 정말 내부에서 붕괴되면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핵 통제다. 누가 빨리 들어가서 핵을 통제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며 “그런데 이것은 중국의 협조 없이는 안 된다. 이는 미국도 양해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지적했다.
김 대기자가 밝힌 북핵 처리 문제는 북한의 붕괴를 가정한 하나의 상황에 불과하지만, 이는 곧 그만큼 한반도 문제와 통일 문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한미 동맹을 현재 상태로 유지하면서 통일의 마무리까지 가능하겠느냐는 문제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전성흥 교수는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 변화를 우리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은 정권이 바뀌지 않는 공산당 1당 독재체제이기 때문에 정책이 자주 안 바뀐다”며 “설사 바뀌더라도 행동이 먼저 바뀌고 이후에 모두가 다 ‘무엇인가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 정책을 바꾼다”고 분석했다. 중국에서 북한을 포기했다는 식의 언론 보도가 나오는 것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는 것과 북한 체제를 지지해주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고 헷갈리는 부분”이라며 “그렇지만 중국은 결국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한다. 다만 예전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우선이었지만 지금은 비핵화가 우선순위”라고 설명했다. 중국이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는 바꿀 수 있지만 정책의 큰 틀은 단기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하고 그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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