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행사는 이미 예정된 것이지만 여권의 '잠룡그룹'의 일원으로 부쩍 적극적 행보를 보여 왔던 한 총리가 '총리 명함'을 달고 주관하는 사실상 마지막 행사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유신의 딸' vs '유신의 희생자'
이날 오찬 행사는 한나라당의 유력대선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와 한 총리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드러냈다.
박 전 대표는 인혁당 재심판결 이후에도 "내가 사과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친북좌파는 사과했냐"는 날선 반응을 보이면서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은 천륜"이라고 '결기'를 세우고 있다.
반면 신혼 초인 지난 1968년부터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남편 박성준 씨의 옥바라지를 하던 한 총리는 자신도 유신 말기인 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돼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신의 딸' 대 '유신의 여성 희생자'의 구도인 셈.
이수병, 도예종, 여정남 등 인혁당 사형자 미망인 8명을 비롯해 관련자 24명을 총리공관으로 초청한 한 총리는 이들의 손을 붙잡고 "'인혁당재건위사건'의 무죄 선고는 진실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라고 위로했다.
특히 한 총리는 "이번 무죄선고는 32년 전 사법살인의 오명을 쓰고 '사법사상 암흑의 날'의 피고였던 우리 사법부에 '새벽'을 되돌려준 것"이라면서 "한 순간의 잘못된 공권력 행사가 국민들에게 어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박정희 유신 체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지난 해부터 시작된 '대권행보'
설 연휴 직후인 지난 20일 실시된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의 범여권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4.5%를 기록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유시민 복지부 장관, 김근태 전 의장을 제치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21.0%), 정동영 전 의장(11.3%), 강금실 전 장관(8.5%)에 이어 4위를 기록한 한 총리는 이미 지난해 말부터 '대권'을 염두에 둔 듯한 행보를 보여 왔다.
노 대통령이 전시작전통수권 환수 문제로 전직 장성, 전직 국방부 장관 등 군 출신 인사들과 한참 갈등을 빚을 때 군 부대를 연쇄 방문해 눈길을 끌었던 한 총리는 연말 연초에도 노 대통령이 꺼려 하는 '민생현장 방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 총리는 지난 달에는 수원의 임대주택 건설 현장을 방문했고 강원도 강릉 노인수발 시범지역을 방문해 직접 노인 시중을 들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중립시비를 마다하지 않고 '헌법개정추진지원단' 설립을 내각에 지시했고 노 대통령-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회담 이후에는 주요 민생입법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여·야·정 협의체의 구성을 추진하는 등 활동의 폭을 날로 넓혔다.
당 복귀 후 첫 역할은 '개헌 전도사'?
'대과'없이 총리 직을 수행했지만 한 총리의 앞길은 오히려 가시밭길이다. 지리멸렬하면서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여당에 한 총리가 복귀한다고 해서 반전의 계기가 하늘에서 떨어질 가능성도 낮다.
오히려 한 총리 자신도 마이너리그의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전락할 확률이 높다. 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선 '한 총리 자신만의 진짜 정치력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치된 관측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당 복귀 이후 한 총리가 내걸 수 있는 첫 카드는 개헌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개헌 자체의 실현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지만 개헌론의 활용 범위는 좀 더 넓다.
지난 20일 실시된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통령 4년 연임제 연내 개헌에 대해서 응답자의 39.2%가 찬성했고 48.6%가 반대했다. 지난달 9일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한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보다 찬성 비율이 10~20% 포인트 높아진 것으로 노 대통령이나 여당의 현재 지지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숫자다.
그나마 간판으로 내걸 수 있는 것은 '그래도 개헌'이라는 얘기가 된다.
탈당파는 물론이고 잔류 우리당 그룹조차 개헌 문제에 대해 별다른 열의를 보이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개헌 드라이브에 관한 한 한 총리 만한 적임자가 없다. 또한 개헌드라이브에 앞장 설 경우 노 대통령의 물밑 지원도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 '희생타'가 최종 목적이 아니고 스스로 대권후보를 노린다면 '노무현의 그림자'는 족쇄로 작용할 것이 불문가지다. '한명숙 전 총리'의 줄타기를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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