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연(서평가) :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뻔한 인간이다. 달리기를 하겠다고 <잘 달린다>(이안 맥닐 지음, 엄진현 옮김, 지식공작소 펴냄)를, 기타를 배우겠다며 <천재반 Guitar>(마크 필립스 지음, 한정주 옮김, 비앤비 펴냄)를,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코미디 중심의 시나리오 쓰기>(앤드루 호튼 지음, 주영상 옮김, 한나래 펴냄)를 읽는 인간이란 말이다. 그러니 <결혼을 향하여>(존 버거 지음, 이윤기 옮김, 해냄 펴냄)를 집어 든 이유야 뻔하다.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 달리지는 않고, 기타를 배우지도 않았으며, 시나리오 또한 쓰지 않았지만 결혼은 곧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결혼의 위대함인가?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집은 책은 나를 울렸다. 흔히 말하는 매리지 블루…는 아니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우연한 만남으로 에이즈에 감염된 스물네 살의 니농과 그녀를 사랑하는 지노의 이야기다. 지노를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려하는 니농과 포기하지 않는 지노의 목숨을 건 사랑 이야기다. 그리하여 소설의 마지막, 그들은 마침내 결혼에 다다른다.
떠들썩한 결혼식이다. 사람들의 축복 속에 그녀는 죽어가고, 그러나 살아 있고, 그와 함께 떠돌이 춤꾼처럼 춤을 추고, 누구보다 사랑한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행복하다, 그지?" 행복에 겨운 눈물이 니농의 뺨을 지난다. "영원 같은 세월이 우리 앞에 있는데 뭘 하지?" 지노가 묻고, "천천히 생각해 봐요." 니농이 대답한다. "신발 벗고 추면 어떨까?" 지노가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한다. 바로 이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춤도 못 추는 게 서러워선지, 유럽의 결혼식이 부러워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결혼식 당일이 되어봐야 알 것 같다.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작품 자체는 안 읽고 비평서나 입문서, 개론서만 읽고 그것에 대해 다 알았다는 듯이 지적 허세 부리는…' 운운을 마주할 때마다 좀 찔린다. 내가 그런 책들을 좀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 알았다는 듯 지적 허세'를 부리지는 않았다, 맹세코. …아니, 직업상 더러 필요했던 순간이 있기는 하다.
사실 그런 독서를 깔보는 사람들의 수용론에 약간 이의를 제기하고도 싶다. 개론서를 읽고 거기 언급된 작품을 읽은 경험까지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각각의 작품 자체에 접근하고 싶지만 시간상 아쉬움을 접고, 살다보니 공백으로 남겨진 부분에 대한 게으름을 탓하며 그쪽 분야를 '판' 선구자들의 안내서를 집어 드는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난 그 작품에 가지는 못했지만, 그 작품이 세워져 있는 입구에는 이르렀다, 그 주변에선 어떤 풍경이 펼쳐졌고 어떤 냄새가 났으며 어떤 정서를 갖고 문을 열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게 좋은 안내자의 역할일 터고 독자도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올림픽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러시아에 집중된 기간, 나는 어쩐지 '다시 읽으며 예전에 읽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러시아 문학 레퍼런스를 가진 이들이 부러웠다. 러시아 문학은 내가 번번이 등반에 실패하는 산이었고, (체호프를 제외하면) 제대로 읽은 게 톨스토이의 소품 격인 소설 한 권뿐이었다. 문득 그 책을 읽은 경위를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고3이던 10년 전 한 대학의 노어노문학과 수시 모집에 지원했다가 면접을 보기 위해 부랴부랴 읽었던 것이다. 붙을 리 없었던 그 면접에 붙었다면 지금쯤 난 뭘 하고 있을까? '러시아 문학 레퍼런스'를 가진 대신, 뭔가 다른 공백을 안고 그 공백에 대한 개론서를 기웃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정모(서대문박물관 관장) : 난 모범생이었다. 모범생이란 게 별 게 아니고, 어른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이유 없이 따랐다는 뜻이다. 담치기는커녕 구슬치기도 제대로 못 해봤고, 만화는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에 연재되는 게 전부였다. 만화방에도 못 가봤다. 좀 억울하다. 이게 사는 건가…….
오늘은 <겨울 동물원>(다니구치 지로 지음,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을 읽었다. 일본의 순정만화 거장 다니구치 지로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읽다가 윤태호를 생각했다. 내가 만화책을 구입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만화가라서 일수도 있지만 <사생활의 천재들>(정혜윤 지음, 봄아필 펴냄)에서 그려진 그의 모습과 겹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연아가 마지막 경기를 펼칠 때까지 이제 세 시간 남았다. 그 사이엔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가와카미 히로미의 원작을 바탕으로 그린 <선생님의 가방>(전 2권, 다니구치 지로 지음,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을 읽으려고 한다. 아, 좀 사는 것 같다.
사족을 달자면,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면서 우연에 기대어 <미학 오디세이>(휴머니스트 펴냄)를 썼다고 진중권은 이 책에서 말한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글은 늘 너무나 명확하다. 이 책도 진중권답게 틈을 주지 않고 명징하다. 엊그제 진중권은 '김연아의 유일한 적은 심판이다'라는 트위터 글을 날렸다. '역시 진중권'이라는 감탄사를 다시 내뱉었다. 대체 불가능한 캐릭터인 진중권에게 멋진 독서평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재주가 미천해서 '진중권의 유일한 적은 진중권의 재능이다'라고 그의 일갈을 살짝 표절해서 장난을 쳐본다. <미학 오디세이>가 30주년까지 쭉 순항하기를 바란다.
노정태(자유기고가, <논객시대> 저자) : 스포츠와 저널리즘. 저널리즘과 스포츠. 잘 생각해보면, 저널리즘의 기본은 스포츠 글쓰기일 수밖에 없고, 스포츠 글쓰기는 저널리즘의 본령에 대단히 가까운 것이어야만 한다. 스포츠의 현장에는 신속하게 전달해야 할 어떤 사실이 있고, 사실 자체는 공개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다양한 각도로 열려 있으며, 대중들은 정확한 사실과 명확한 설명을 동시에 요구하니 말이다. 적어도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스포츠 저널리즘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나라에서, 그보다 더 복잡한 게임이 진행되며 이해당사자가 얽혀들어가는 분야, 가령 정치에 대한 저널리즘이라고 온전히 성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The Best American Sports Writing of the Century》(David Halberstam (Editor), Glenn Stout (Editor), New York: Mariner Books, 1999)는 20세기 미국 언론에 등장한 스포츠 기사 중 가장 훌륭한 것들만 골라 묶은 (The Best of Century!) 책이다. 이 책에, 데이비드 핼버스탬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이유를 이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핼버스탬은 <최고의 인재들>(송정은·황지현 옮김, 글항아리 펴냄), <콜디스트 윈터>(정윤미 옮김, 살림 펴냄) 등으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칼 번스타인이 스승처럼 여기는 미국 저널리즘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스포츠를 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 이 책을 펴게 된 것은, 그나마 최소한의 참여를 하는 종목인 체스에 대해 무크지 《DT 3 :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구동희 외 지음, 작업실유령 펴냄)에 글을 한 편 썼는데, 그것을 본 또 다른 참여 필자께서 바비 피셔(전설적인 미국의 체스 선수)에 대한 글이 등장하는 책 《The Best American Sports Writing of the Century》를 빌려주신 덕분이었다.
그리고 김연아 선수는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은메달을 땄다. 한동안 국내 언론은 '외신 반응', '카타리나 비트의 분노' 등을 전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요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틈틈이 이 책을 펼쳐 읽는다. 저널리즘이란 무엇이며, 사람과 사람이 최선을 다해, 공정한 규칙 하에 겨루는 것, 스포츠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셜리 잭슨의 소설을 처음 읽은 건, 트위터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설 중 하나”라며 단편 <제비뽑기(The Lottery)>를 읽을 수 있는 페이지를 링크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그 페이지를 클릭했고, 그냥 두세 문단만 읽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만약에 내가 소설가였다면, 나는 이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내 이름은 메리 캐서린 블랙우드. 열여덟 살이고 언니 콘스턴스와 같이 산다. 양손 둘째와 셋째 손가락이 같은 길이라서 혹시라도 운이 있었다면 늑대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종종 생각했지만, 욕심은 그만 부리기로 했다”로 시작하는 첫 페이지부터, 20세기 고딕 호러의 음산한 안개가 내 방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건 순진한 소년소녀들을 위한 소설이 아니다. 악의가 무엇인지 알고, 악의를 품었고 악의를 당해본 적 있는, 따돌림과 폭력과 희생제의와 신경증과 고독과 공포를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소설이다. 그리고, 걸작이다.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내가 읽어보지 않은 책을 남에게 추천한 적이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였다. 시장만능주의로 향하던 역사의 물줄기가 방향을 트는 기미가 뚜렷했다. 사태의 핵심에는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 속에서 이뤄진 금융규제 완화가 낳은 파생금융 상품의 부작용이 있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끝난 뒤인 1990년대, 일자리를 잃어버린 로켓 과학자들이 금융으로 눈을 돌리면서 파생금융 상품은 고도로 정교한 수학적 구조물이 됐다. 보통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파생금융 상품의 부작용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추천받은, 제목만 아는 책을 추천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 책을 찬찬히 읽어봤다. 나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관련 지식을 혼자 공부한 시간도 아주 짧다. 이런 내가 보기에도, 그 책은 사실관계와 논리 전개에서 오류가 많았다. 그렇다면 전문가가 보기엔 오죽하겠는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시는 내가 읽지 않은 책을 남에게 권하지 않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서점가엔 어려운 경제현상을 쉽게 설명해준다는 책이 넘쳐난다. 하지만 대부분 남에게 권하기 민망한 책들이다. 쉽게 부자 되는 법을 알려준다는 재테크 서적 가운데 상당수는 사기에 가깝다. 진보 성향 독자들을 겨냥한 책들 역시 부실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금융위기를 설명하면서, 변죽을 울리는 내용만 담은 책들이 많다. 경제사 관련 교양서적으로서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걸로 사태를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 또 파생금융 상품에 대한 비판 그 자체에만 머무르는 책도 많다. 역시 좀 답답하다. 파생금융 상품이 ‘악마의 연금술’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으면, 책이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적어도 내가 살펴본 범위 안에선, 이만큼 쉽고 명료하게 파생금융 상품에 대해 설명한 책을 보지 못했다. 물론, 깊이 있는 설명을 담은 책은 아니다. 그러나 개념을 잡는 정도가 목적이라면, 추천할 만한 책이다. 저자는 기아자동차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미국에서 기계공학 박사를 받은 엔지니어 출신이다. 이후 경영학 석사를 받고 투자은행가로 직업을 바꿨다. 제조업과 금융, 이론과 실무를 두루 경험한 내공이 책에 잘 묻어난다.
이번엔 읽어보고 추천하는 책이다. 앞서 내 추천만 믿고, 영 허술한 책을 사서 읽었던 친구에겐 늦게나마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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