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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꿈‥아름다운 화성(華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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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조의 꿈‥아름다운 화성(華城)

3월 화성학교 개교

수원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화성(華城) 및 그와 밀접한 융건릉(隆健陵)·용주사(龍珠寺) 등을 돌아보며 그 깊은 뜻을 공부하는 화성학교가 오는 3월 개교합니다. 교장선생님은 ‘화성박사’인 김준혁 교수(한신대)입니다.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할 만큼 성을 많이 쌓았죠. 그중에서도 수원 화성은 ‘성곽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우수한 기능을 갖춘 조선시대 성곽입니다. 유네스코는 1997년에 수원 화성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노을 속 화성 Ⓒ수원시

김준혁 교장선생님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개혁군주라고 평가받는 정조가 세운 ‘수원신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정조가 조선의 농업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자 만든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습니다. 훗날 정조를 공부하면서 정조가 대유평이란 이름을 지은 의미를 알고, 미리 알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가 아들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함께 등교할 때 힘들게 페달을 밟으면서도 하루에 한 꼭지씩 역사 이야기를 해준 것이 가슴에 남아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정조를 전공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이후 수원시가 본격적인 화성 복원 사업을 추진할 때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어 화성의 복원과 컨텐츠 개발에 참여하였고, 이후 화성박물관 건립을 주도하여 학예팀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신대학교에서 정조교양대학을 설립하면서 이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이 바로 정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있고, 화성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화성의 우수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조시대 개혁과 민본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화성 Ⓒ두산백과

교장선생님은 <화성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최근 대한민국 역사교사 100명에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 100명을 추천받았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이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였습니다. 2위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고 3위가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만큼 정조가 만들고자 했던 백성의 나라, 그가 추진하였던 소통의 정책이 오늘 이 사회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가 과대 포장되어 그가 추진했던 모든 일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전근대 그 어떤 국가지도자들보다 백성을 위해 헌신한 그 같은 국왕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운 개혁기반도시 화성은 이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찾는 역사문화도시가 된 것입니다. 화성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입니다. 성곽의 웅혼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아름다움이 곧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정조의 표현대로 화성의 아름다움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속에 더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본주의입니다. 정조는 화성 축성 당시 참여한 기술자와 날품팔이들 모두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름 더위를 막기 위한 척서단(滌暑丹)과 오늘날의 영양제인 제중단(濟衆丹)을 하사하고 겨울에 솜옷과 털모자를 주었습니다. 당시 털모자는 정3품 당상관 이상 되는 고위직들이나 썼던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축성에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하사하였으니 이들의 기쁨은 그 무엇보다 컸을 것이고 국왕의 따스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화성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 회갑진찬연은 단순한 회갑잔치가 아니라 조선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의식 혁명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남녀가 함께 잔치를 하고, 여성이 상위에 남성이 하위에 자리하며, 조선의 악기만을 사용하고, 백성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은 근대화로 나가는 시대의 변화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모두 화성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화성 안에는 국방 개혁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최강의 군대라고 평가받는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이 주둔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가 2대에 걸쳐 완성한 무예24기를 익히고 그 무예를 토대로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화약 신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성공시켰습니다. 중국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약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의 흔적이 지금 화성에 오롯이 남아 무예24기를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화성을 찾아가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조가 꿈꾼 평화롭고 평등하고 자주적인 나라만들기의 모든 것을 현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정조시대 역사의 길을 걸으며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국가,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서장대 Ⓒ수원시

김준혁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월 답사지인 화성과 융건릉, 용주사 등에 대해 자세히 들어봅니다.

우리는 왜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방문할까요?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상징이자 정조시대 개혁정치의 산물입니다. 정조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기반도시로서 화성을 축성하였습니다. 더불어 조선시대 모든 문화적 역량을 동원하여 변화의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 화성을 건설하였습니다.

정조는 모든 백성들을 평등한 신분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펼쳤고 이를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한 공간으로 화성을 축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치적 행위 공간을 서울의 창덕궁이나 경희궁이 아닌 이곳 화성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정조에게 서울은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정조는 자신이 새로 조성한 신도시 수원에서 상왕(上王)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성곽이 필요했고 이 성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나타난 여러가지 문제점을 보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가 설계하고 마찬가지로 최고의 기술자들이 축성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화성에는 조선·중국·일본 성곽의 장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서양의 모든 문화를 수용하여 그것을 조선화(化)하고자 했던 정조와 당대 학자들의 포용력이 보여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배척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 화성에서 극명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중국식 건물인 듯하면서도 조선식이요, 일본식 성벽인 듯하면서도 조선식인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정조시대에 우리 산천과 우리 민족의 삶을 고민하는 진경문화가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니고 조선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조선중화주의가 나타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상에 대한 포용과 관용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포용정신은 화성 축성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의 신분이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밑으로는 승려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계층들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화성 축성에 참여한 이들은 신심을 가지고 화성 축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 결과 10년 예상의 공역이 3년이 채 되지 않아 마무리된 것입니다.

또한 화성에는 당대 최고의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비롯한 왕실의 최고급 문화가 살아 숨쉬는 문화의 땅입니다. 아울러 낙성연에서 보여주듯이 왕실문화와 산대희를 비롯한 평민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상하동락(上下同樂)의 땅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조선 역사상 국왕이 직접 백성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준 민본주의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어찌 화성을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정조시대 정신과 사상의 결정판으로 인해 완성된 화성이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제 세계 속의 역사문화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민본의 땅을 보기 위하여 화성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서북공심돈(좌)과 화서문 Ⓒ수원시


정조대왕은 왜 화성을 건설하였나

화성은 어떠한 특별함이 있어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화성에 다름아닌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을 심사하고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는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초기 군대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라고 하였습니다.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고 조사한 국제기념물유적협회는 "화성은 18세기 군사건축물을 대표하여 유럽과 동아시아의 성곽 쌓는 제도의 특징을 통합한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네스코 심사위원으로 화성을 방문한 스리랑카 실바(Nimal De Silva) 교수는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밖에 안 됐지만 성곽의 건축물이 동일한 것이 없이 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심사위원들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당시 백성들에게 일한 만큼의 돈을 주고 거중기를 비롯한 과학적 기계를 이용하여 성곽 축성에 참여한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고자 했던 인본주의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성곽에 백성을 위한 정신까지 더해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 전체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깊은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정조는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하여 화성 축성의 설계를 우리 역사상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맡겼습니다.

1789년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수원부 중심지로 들어서자 그 곳에 있던 관청과 200여 호의 민가를 값에 맞게 보상금을 주고 팔달산 동쪽 넓은 들판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팔달산 동쪽 지역이 새로운 수원의 중심지이자 조선의 개혁 터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수원 이외의 지역에서 새로 이사 온 사람들까지 합하여 319호가 새로운 수원의 중심지에 정착하였습니다.
이후 정조는 1793년 1월에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을 시키면서 도시 이름도 아예 화성(華城)으로 바꿨습니다. 이제 도시 이름이 수원이 아닌 화성이 된 것이다.
화성은 정조대왕이 특별히 지은 이름인데 ‘화(華)’라는 말에는 부(富)·수(壽)·다남자(多男子)가 담겨있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화성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인구가 번성하여 큰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 이름을 화성으로 변경하고 위상을 높인 것은 바로 화성에 성곽을 축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훗날 자신이 내려와 살 것을 대비하기 위하여 국왕이 머무는 도성 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기에 정조는 미리 준비를 한 것이죠. 정조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고 어떠한 무기에도 무너지지 않을 성곽을 설계할 사람은 정약용밖에 없었습니다. 몇 년 전 그가 한강의 배다리 설계를 성공리에 마친 것을 누구보다도 정조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정재원) 상중에 있는 정약용에게 은밀히 화성 설계를 지시하였습니다. 그 시점이 바로 수원을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기 전인 1792년 12월이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정조가 정약용을 사랑하고 신뢰한 것입니다. 당시 수원도호부에 성곽을 축성하는 것은 알고 있는 있물은 정조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 그리고 다산 정약용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아 새로 옮긴 수원부를 위한 성곽 계획안을 축성 공사 개시 2년 전에 작성하였습니다. 다산이 계획한 축성안의 가장 큰 특징은 성곽 규모를 적절히 조정하고, 지금까지 조선의 성에 설치되지 않았던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추어 성의 방어력을 높인 것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조선의 성이 임진왜란을 겪으며 무참히 허물어져 성곽의 방어 체제와 능력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낸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전쟁이 끝난 후 <징비록>이란 책에서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과 치성이 갖춰져야 한다"고 거듭 역설하였습니다.

다산은 모두 7편의 글을 작성하여 국왕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곧 <성설(城設)> <옹성도설(甕城圖設)> <현안도설(懸眼圖設)> <포루도설(砲樓圖說)> <누조도설(漏槽圖說)> <기중도설(起重圖說)> <총설(總說)>입니다. 이 글들은 화성의 기본적인 형태와 규모, 각종 방어시설, 그리고 축성공사와 관련된 공사방법 등을 적은 것입니다. 이 가운데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방식 등 전반에 걸친 내용을 기술한 것이고 나머지 <옹성도설>이나 <포루도설> <누조도설> 등은 성벽에 설치하는 각종 새로운 시설에 대한 설명이며 마지막의 <기중도설>은 석재를 들어올리는 기계장치인 거중기에 관한 설명입니다. <성설>에서 다산은 화성의 전체 규모를 3천600보로 잡았습니다.

보는 보통 성벽처럼 긴 거리를 재는 단위로 쓰이는데 대개 1보의 길이는 지금 치수로 보아 1.18m 정도가 됩니다. 전체 길이가 3천600보라는 것은 네모난 성일 경우 한 변 길이가 900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대략 한 변이 1km 정도 되는 거리죠. 하나의 이상적인 성의 크기로 다산은 이 정도의 크기를 상정했던 것입니다.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수원시

이 크기는 당시 지방도시의 일반적인 성곽 규모에 견주어 보면 결코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도성인 한양에 비해서도 거의 3분의1 정도밖에 안 되는 규모입니다. 다산은 이 크기면 가히 한 도시를 수용할 만하다고 하였고 한 변 1km 정도의 크기가 성을 지키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산은 이 성벽에 각종 방어용 시설을 구비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우선 성문 앞에는 반드시 옹성(甕城)을 갖추는 것입니다. 성문은 가장 우선적인 공격목표가 될 것이므로 성문을 이중으로 만들어 방비를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또 성벽 곳곳에 치성(雉城)을 비롯한 포루(砲樓)·적루(敵樓)·적대(敵臺)·노대(弩臺)·각성(角城)을 갖추도록 하였습니다.

치성이란 성벽의 일부를 요철 모양으로 돌출시켜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옹성은 성문 앞에 둥근 혹은 네모난 성벽을 한 겹 더 쌓아 성문을 이중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한 시설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고대 중국에서부터 고안되어 활용되어 온 것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곳 외에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성곽의 설계와 함께 다산은 공사 과정에서 가급적 백성들의 수고를 덜고 일의 능률을 올릴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성벽을 쌓아 나갈 때 일한 양에 따라 노임을 지급해 주면 감독하기도 수월하고 작업능률도 올라갈 것이라 하였고, 또 짐을 나를 때 적극적으로 수레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 수레가 무거운 짐을 싣는데 불편하므로 돌을 싣고 부리는데 편리한 새로운 형태의 유형거(遊衡車)라는 수레를 직접 고안하였습니다. 또 돌을 들어 올리는데 기계의 힘을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도르레의 원리를 응용하여 거중기(擧重機)를 고안하였습니다.

이 거중기는 여러 개의 활차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 올리도록 고안한 장치입니다. 다산은 서양인이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이라는 책에 실린 서양의 기구 그림들을 보고 조선에서 만들어 사용할 만한 새로운 기구를 고안한 것입니다.

<기기도설>을 쓴 사람은 포루투갈 선교사인 테렌스(Terrens)로 한자식 이름은 등옥함(鄧玉函)입니다. 테렌스는 1627년 온갖 고생 끝에 북경으로 와서 왕징(王澄)을 만나 <기기도설>을 한문으로 번역하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서양의 과학문명을 중국에 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테렌스의 스승은 그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였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그리고 과학문명론자였습니다. 테렌스는 중국에 와서도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갈릴레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완성한 것이 바로 <기기도설>이었습니다.

이 <기기도설>을 분석한 정약용은 <기기도설>에서 나온 크레인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이해하여 거중기 제작에 반영하였습니다. 거중기는 공사 현장에서 빠르게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명을 들을 수 있는 적은 무게이되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도르레의 원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곳에 고정되어서 사용되는 테렌스의 크레인과 다르게 공사현장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작은 크레인인 거중기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멀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과학적 능력이 중국을 거쳐 우리의 천재 정약용에 의해 동서양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니 참으로 놀랄 일입니다.

실제로 화성의 축성공사가 진행되면서 당초 다산이 계획했던 안이 100%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화성의 형태나 시설은 대부분 다산의 안을 바탕에 두고 이를 현장에서 조금씩 변경해서 완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화성은 중국의 성제와도 다르고 또 기존의 조선시대 다른 지방도시의 읍성과도 다른 가장 특징적인 성곽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완성된 화성의 전체 길이는 4천600보였습니다. 이것은 다산이 계획했던 3천600보보다 1천보가 더 커진 크기였습니다. 이 차이는 실제로 현장에서 성벽을 쌓을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늘어난 결과입니다.

다산의 과학기술과 더불어 화성이 3년 안에 빨리 공사를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술자들에 대한 우대 때문입니다. 정조는 화성 축성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임금을 주었고 여름에 더위 먹지 말라고 척서단을 하사하고 가을에 오늘날 영양제 같은 제중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겨울에 기술자들에게 털모자를 하사하였습니다. 당시 털모자는 정3품 당상관 이상 되는 높은 신분의 인물들이나 쓸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귀한 모자를 선물하였으니 기술자들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성을 가지고 성곽을 쌓은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모여 화성을 완공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 화성에서 진정한 개혁을 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새로운 저수지를 이용한 국영 농장농법을 시도하여 토지 소유자들에게 수탈당하지 않게 하고 양반도 장사를 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시키고 개개인의 재산도 늘려나가게 하였습니다. 즉 이곳 화성은 기존의 사농공상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터전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현장에서 화성의 가치를 이해하고 감동받는 것이 어떨런지요!

▲화홍문 Ⓒ수원시

융건릉(隆健陵)은 어떤 곳인가

18세기 문화의 총화가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인 융릉(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고 나서 붙여진 이름이며 세자 신분일 때는 현륭원이었음. 건릉은 정조의 능임)에 담겨있다고 말하는 연구자분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이야 융릉이 있는 지역이 세계적인 축구스타 박지성이 다녔던 안룡중학교가 있는 동네로 더 유명해졌지만 실제 융릉이 있는 곳은 1789년 이전까지 수원도호부의 읍치가 있던 역사적 도시였습니다. 비록 임금님이 살고 있는 한양처럼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서해안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아내는 큰 군사도시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수원도호부와 관련된 각종 읍지에 의하면 수원 사람들 혹은 지금의 화성 사람들은 “무예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수원 지역이 현대사에 들어와서도 유명한 주먹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지금 융건릉 일대가 있는 안녕면은 과거 현재의 수원·화성·안산·평택의 중심지였습니다. 수원도호부의 관아가 있던 이곳을 중심으로 서해안을 방어하는 방어영(防禦營)의 군사들이 즐비했고,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조운선의 휴식처를 위한 포구와 이들을 유혹하는 기생집들 역시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지역은 인근 도시들을 포괄하는 행정의 중심지로서 관리들과 유생들이 밀집되어 있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의 22대 국왕이었던 정조가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하게 되었고 지역 백성들은 국왕의 명을 받아 새로운 터전인 팔달산 동쪽 들판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국왕의 명령이 있었던 날이 1789년 7월 15일이었으니 이 날이 기쁜 날인지 슬픈 날인지 정확히 규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지역 거주자들은 아마도 우리 역사상 최초로 국가의 신도시 추진계획으로 집단이주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수원 사람들을 왜 이전하게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신을 낳아준 생부(生父)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뭐고 생부는 무엇인가요?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은 인물입니다.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큰 대역죄를 저질렀기 때문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대역죄인의 아들은 국왕이 될 수 없었기에 영조는 세손이었던 정조를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이었지만 10세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게 하였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정조를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왕실의 족보를 수정하게 한 것입니다. 하니 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가 정조의 아버지이고 사도세자는 생부(生父)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첫날 자신의 공식적인 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늘 자신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애끓는 사부곡(思父曲)이 있었기에 큰아버지이자 족보상의 아버지였던 효장세자를 추존하듯이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국왕으로 있는 동안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인 영조가 생전에 세손이었던 정조가 국왕으로 있는 한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그 대안으로 사도세자의 묘소를 당대 최고의 묘자리에 이장해주는 것이 최선의 효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명당자리에 잠들고 있는 사도세자는 역적이 아닌 국왕의 아버지라는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방화수류정 Ⓒ수원시

정조가 대리청정하는 과정에서 사도세자의 묘소였던 양주 배봉산의 수은묘(垂恩墓)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도 작고 초라한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세자의 묘소이지 일반 왕자의 예법대로 만든 작은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참으로 묘한 이중행동을 하였습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그에게 세자의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세손이었던 정조를 불러 자신이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세손과 채제공 앞에서 사도세자가 죽은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김상로와 홍인한 등 노론 주도세력의 간악한 사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글을 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더구나 세자의 장례식에 직접 묘소까지 찾아가서 제문을 읽는 등 죽은 아들에 대하여 엄청나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도세자의 묘소였던 수은묘는 규모를 일반 왕자의 예법에 맞춰 공사를 지시하고 위상 또한 왕자의 예에 따르게 하였습니다. 세자가 죽어 묻힌 곳을 ‘원(園)’이라 칭하여야 함에도 영조는 끝내 일반 왕자의 무덤에 붙이는 ‘묘(墓)’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몰아내고자 했다는 말이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괘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 수은묘를 방문하고 나서 참혹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국왕으로 즉위하면 반드시 아버지의 묘소를 조선 땅에서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옮겨 주자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국왕이 되었어도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길 수 없었습니다. <정조실록>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를 즉위년부터 옮기려고 했는데 ‘운(運)’과 ‘때[時]’가 맞지 않아 옮기지 못했다고 정조의 입을 빌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정조의 즉위년인 1776년부터 묘소를 옮기기로 결정한 1789년까지 모두 사도세자의 ‘운’이 무덤 천장의 운과 들어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조는 훗날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장하도록 지시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즉위년부터 옮기고자 했는데 하늘의 운과 땅의 때 그리고 사람의 운이 맞지 않았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행간을 읽는 것이 중요한데 그 ‘운과 때’보다는 정조가 아버지의 묘소를 옮길 수 있을 만큼 국왕으로서의 힘이 없었고 더불어 국가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번 역사 속으로 들어 가보도록 하죠! 1789년 7월 10일 밤, 승정원에서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의 상소를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내용인 즉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제는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조가 대를 이을 왕자가 없는 것이 바로 사도세자의 묘소가 불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조는 몇 년 전 TV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의빈성씨에게서 문효세자를 낳았지만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대를 이을 국본(國本)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곧이어 네 달 뒤에 임신 9개월 상태로 있던 의빈성씨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마지막으로 대를 이을 수 있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마저 의문사해 버렸습니다. 정조시대 ‘3대 미스터리’로 꼽히고 있는 문효세자와 의빈성씨 그리고 상계군의 죽음은 정조로 하여금 절망케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는 박명원의 상소를 보고 소리없이 울다가 마침내 다음날 어전회의를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 발표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침내 다음 날인 7월 11일 정조는 박명원의 상소를 승지로 하여금 읽게 하였습니다. 승지가 상소 내용 중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대목이 거론되자 정조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국왕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뒤주에 갇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자제하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죠. 국왕이 대성통곡을 하는 동안 신하들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덕궁 인정전 안에 있던 대소신료들 중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찬성한 이도 반대한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침통한 정조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정조는 자신의 불우한 이야기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전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효(孝)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데 유교국가인 조선의 국왕 정조가 부친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묘소를 이장하겠다는데 그 어느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아무런 반대가 없자 정조는 자신이 조사한 명당(明堂)을 거론하다 마침내 수원부 읍치가 천하명당이라고 하며 3정승과 6조판서가 지관(地官)들을 거느리고 수원부 읍치를 방문하여 명당 여부를 확인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융릉 Ⓒ수원시

정조가 수원도호부를 사도세자의 새로운 묘소 자리로 선택한 것은 그가 그곳의 지리를 사전에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수원도호부 관아가 있는 화산(花山)은 조선 건국 이후 천하명당이라고 소문이 나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도호부’조에 보면 수원도호부 관아 앞에 ‘국릉치표(國陵置標)’라고 하는 푯말을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이는 왕릉을 세울 자리라고 하는 푯말이었는데 그만큼 천하명당이었다는 것입니다.

정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아버지 묘소를 옮겨주지 못하는 불우한 국왕의 처지를 비관하며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슬픔으로 지새우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왕실의 경비를 대폭 축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부터 비단옷을 입지 않고 반찬을 줄이는 등 쓸데없는 일상경비를 깎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경제개혁정책과 농업정책으로 경제활성화를 추진하였습니다. 가진 자들을 위한 경제개혁이 아니라 대다수 백성들을 위한 경제정책들의 추진이었습니다.
공교육인 향교교육을 강화함과 더불어 규장각을 통한 인재를 양성하여 새로운 국가개혁정책을 생산하게 하였습니다. 더불어 당시 국가재정의 56%나 차지하고 있던 터무니없는 국방예산을 축소하여 그것으로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둔전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여 경제를 회생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당대 최고의 명당인 수원도호부 읍치로 옮길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바로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의 상소가 있었던 것이죠. 박명원의 상소가 정조와 협의 하에 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사도세자의 묘소 이전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의 반대도 없었습니다.

정조가 특히 수원도호부 관아가 위치한 화산을 사도세자의 묘소 자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앞서의 내용과 더불어 특별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세자 자신이 그 자리를 천하명당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15세의 나이부터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는 영조와의 불화로 인하여 건강이 극도로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온양온천행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부친 영조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었겠지만 사도세자로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수원도호부에 도착한 세자는 효종의 능역 자리로 선정된 바 있는 그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능터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효종이 승하하자 남인의 영수이자 효종의 스승이었던 고산 윤선도가 효종의 왕릉 자리로 수원도호부 관아 뒤편의 화산으로 선정했었다는 것을 사도세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서인의 영수로 윤선도와 정적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반대로 끝내 왕릉으로 사용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처음 효종의 능터로 정해졌던 현장에 도착한 후 이곳이 진정 천하명당임을 확인하고 좋은 곳이라 감탄을 할 정도였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그 자리가 좋다고 했던 것이 아마도 머지않아 자신이 죽을 예감하고 이 자리에 묻혀 주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정조는 스스로 사도세자의 일대기를 저술하면서 사도세자가 화산의 능터에 대해 극찬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이러한 속내가 바로 수원으로 묘소를 이전하게 한 진실한 내용이었습니다. 부친이 원하는 곳에 묻어주고 싶은 자식의 마음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인 7월 12일 수원도호부 읍치로 내려간 영의정 김익을 비롯한 신하들은 현재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가 모두 천하명당인데 그 중에서도 수원도호부가 있는 화산이 최고 명당이라고 하였습니다. 용의 여의주를 희롱하는 ‘반룡농주(盤龍弄珠)’라는 것입니다. 실제 이 지역은 충청도 보은에 있는 속리산으로부터 지기(地氣)가 시작되는 한남금북정맥의 혈(血)이 마지막에 모인 그야말로 천하명당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묘한 것은 이 지역의 오랜 지명이 용복면(龍伏面)이었습니다. 즉 용이 엎드려있는 지역이란 의미였는데 결국 용과도 같은 존재인 사도세자와 뒤이어 정조가 묻혔으니 선현들의 땅이름 만들기는 신령스럽다 하겟습니다.

신하들은 수원도호부에 사도세자의 봉분이 들어설 자리를 확정하고 도성으로 올라와 7월 15일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도호부 관아 뒤편으로 이전하고 수원도호부 관아와 중심지역 백성들의 민가를 팔달산 동쪽의 넓은 들판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 최초의 신도시 건설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조가 수원도호부로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전한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그는 단지 억울하게 돌아간 부친을 위한 개인적인 효심 때문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이전한 것일까요? 지금까지 그런 평가가 있었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조는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즉위 하였을 때 조선이라는 국가의 상태가 “혈맥이 막혀 죽어가는 사람과 같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입니까! 오랫동안의 당파 싸움과 천재지변이 나라의 형편을 너무도 어렵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고자 하였지만 한양을 기반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의 힘은 너무도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국왕을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친위도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 이전을 통해 충청·전라·경상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교통로에 위치한 팔달산 동쪽의 넓은 들판을 주목한 것이고 바로 이 지역에 신도시 수원을 건설한 것입니다.
결국 정조의 사도세자 묘소 이전이 갖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국왕 정조의 효심만이 아닌, 국가 전체를 살리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자는 개혁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현륭원 조성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집권 13년 동안 이룩한 문화의 성숙도를 사도세자의 묘소에 투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이 18세기 우리 문화의 총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원찰 용주사

조선 왕실 원찰(願刹)의 대명사는 단연코 용주사(龍珠寺)입니다. 또한 정조(正祖) 하면 떠오르는 절집이 바로 용주사입니다. 용주사는 일반적인 사찰의 양식과 전혀 다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찰 건축을 잘 모르는 분들이라도 이곳이 유교식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왕실과 밀접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그렇다면 용주사는 어느 시기에 왜 건립되었을까요?

-용주사는 어떻게 창건되었나
<영원한 제국>과 <이산> 등 영화나 TV드라마 등을 통해서 정조의 파란만장한 삶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소설과 영화, 드라마의 내용은 과장과 허구가 많기에 진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사실 정조의 삶은 소설보다 더욱 드라마틱합니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한을 풀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즉위 13년(1789)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현륭원 원찰 용주사를 창건한 것입니다.

현륭원과 용주사의 창건은 거의 1년 간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곧 용주사의 창건계획은 현륭원 천원(遷園)과 동시에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의 추측대로 사실입니다. 현륭원의 천원(遷園)은 1789년(정조 13) 7월 박명원(朴明源)의 상소로 시작되어 10월 13일에 현륭원의 공역이 완료되었습니다. 박명원은 영조의 부마요, 정조의 고모부로서 정조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최고 측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명원이 올린 사도세자 묘의 이장 상소는 이미 정조와 깊은 교감을 한 상태였습니다. 공역이 완성된 직후인 10월 17일 현륭원 공역 담당자였던 원소도감당상(園所都監堂上) 이문원(李文源)이 새로운 원소(園所)에 원찰을 설치하자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에 정조는 흔쾌히 원찰의 설치를 지시하고 이로써 용주사가 건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용주사 건립은 이미 박명원의 현륭원 천원 상소가 있은 후 정조의 의중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륭원 천원 역시 정조와 사전 협의 후 박명원의 상소가 있었듯이 정조는 자신의 뜻을 직접 말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으로 하여금 조정에 건의케 하여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문원이 정조와 상의 없이 현륭원의 원찰 건립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전국의 원찰을 혁파했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원찰제도를 부활하자고 자신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으니 측근 신하를 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용주사의 창건은 정조의 강력한 의지와 그의 측근들의 동의에 의한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 대웅보전 Ⓒ아침안개

-용주사를 짓는데 얼마나 들었나
현대사회에서 대규모 건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공사비용입니다. 이것은 전근대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이 건설하라고 명령하면 무조건 건물이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왕 역시 이런 무모한 명령을 내릴 정도로 전제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공사비 문제는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용주사 건립비는 조선시대 왕실 원찰 건립에서도 매우 특이한 경우입니다. 용주사는 관료와 백성들의 시주를 받아 건립비용을 충당하였습니다. 1980년대 독립기념관을 건립할 때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캠페인을 벌여 독립기념관 건립비용을 모금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로 정조대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왕실과 관료, 사찰 그리고 백성들에게 용주사의 건립비용을 모금하였습니다. 물론 독립기념관 건립은 당시 군부정권이 자신들의 취약한 정통성을 감추기 위해 강제로 모금한 것이지만 정조시대 용주사 건립 모금은 진정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조선사찰사료>의 ‘대시주진신안(大施主縉紳案)’에서 용주사 창건에 큰 시주를 한 고위관료의 명단을 보면 당대의 주요관료들이 상당수 동원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경기감사 서유방 등 각도의 감사 9명, 군수·현감·부사·만호·첨사 등 지방관료 87명, 도합 96명에 달하는 관료의 관직명과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또한 ‘팔로읍진여경각궁조전시주록(八路邑鎭與京各宮曹廛施主錄)’에는 각 궁(宮)과 중앙 관청 그리고 지방 감영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전국에서 거둔 시주금은 총 8만7천505냥(兩) 1전(錢)의 돈과 필요한 물품들이었습니다. 각 궁과 관청만이 시주금을 낸 것이 아니라 전국의 백성들과 사찰에서도 무려 1만3천779냥 9전을 거뒀습니다. 이는 당시 사찰들이 용주사의 창건에 대단한 기대를 걸고 전국적인 시주를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5만7천388냥 8전은 건축비로 썼으며, 2만8천116냥 3전은 용주사에서 소유할 전답 매입비로, 2천냥은 용주사의 건립을 지휘하는 화주승들의 여비로 각각 충당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창건된 용주사는 가히 범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진 역사였습니다. 3년여의 공사 끝에 완공된 화성의 공사비가 87만냥이었는데, 그 1/10에 달하는 비용을 사찰 창건을 위한 시주에 의해 충당했다는 사실은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놀라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일대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주사 건립비용 모금은 정조의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륭원의 천봉으로 조정은 무려 18만4천냥 이상의 재정지출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의 의지가 있다 해도 원찰 건립은 재정 문제로 인해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건립비용으로 공명첩을 일부 발행하고, 나머지 비용은 각 방면에서 거두어 대소신료로 하여금 원찰 건립의 뜻을 반대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백성들이 사도세자의 원찰을 건립하는데 자발적으로 시주한 것은 그만큼 사도세자가 백성들로부터 높이 숭앙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정조가 즉위 초부터 하고자 했던 자신의 정통성을 확인시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용주사의 건립은 단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의 문제만이 아닌 정조의 정통성 확인, 왕권 강화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정치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조는 용주사 건립의 총책임을 수원부사 조심태에게 맡겨 용주사 건립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였고, 특히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후불탱화(後佛幀畵)를 김홍도로 하여금 총지휘케 하고 이명기가 보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김홍도와 이명기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용주사 후불탱화는 당대 최고의 불화로 탄생하였습니다.
용주사의 규모는 당대 최고의 사찰이라고 함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법당(法堂) 9칸[間], 선당(禪堂) 39칸 등 전각은 145칸이며, 중문(中門)이 9, 장원(牆垣, 담장)이 249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용주사의 격을 높이기 위해 당파를 불문하고 신하들에게 용주사의 상량문(上樑文)과 권선문(勸善文) 그리고 주련(柱聯) 등을 짓게 하였습니다. 상량문은 좌의정으로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에게 짓게 하였고, 권선문과 주련은 불교를 배척하였던 노론 문신 이덕무(李德懋)에게 짓게 하였습니다. 물론 채제공은 전부터 승려들의 비문을 지어주고 있었으나 이덕무는 규장각 문신으로 당대 유학 발전에 중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지시는 노론과 남인, 신세대와 구세대의 화합을 내포한 절묘한 탕평기술(蕩平技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금륜성왕(金輪聖王)의 내용이 함축된 <봉불기복게(奉佛祈福偈)>를 직접 지어 더 이상 용주사 창건에 대한 대소신료들의 잡음을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조선후기 용주사의 정치적 위상은 의승군을 지휘하는 데에서 절정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창건 이전까지 의승군 지휘자인 도총섭(都摠攝)은 남북한산성(南北漢山城) 도총섭이었습니다. 이 지휘권이 정조의 하교로 용주사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용주사 창건 6년이 지난 정조 20년(1795), 용주사는 수원부사 조심태의 건의로 장용영외영(壯勇營外營)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장용영은 정조의 친위부대로 당대 가장 막강한 군사력이었습니다. 이는 용주사에 승통(僧統)을 두어 남북한산성의 총섭을 총괄 지휘하고 팔도의 사찰을 다스리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정조는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보호하는 일을 맡고 있기에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야 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용주사의 역사적 의미
정조는 용주사 창건을 통해 외적으로는 불교의 효순사상(孝順思想)이라는 명분을 통하여 집권 유생층의 반발을 막으며 생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어주게 하였고, 내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통한 정조 자신의 정통성 확보라는 왕권강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창건한 용주사로 하여금 전국 사찰을 다스리고 의승군을 통솔하게 하여, 의승군 전체를 왕의 직속부대화 함으로써 군사적 힘을 증강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용주사의 창건이 갖는 의미는 이단(異端)으로 매도되어 억눌려 오던 조선불교계가 세상에 새롭게 몸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용주사의 창건 이후 19세기에 들어와 치열한 선(禪) 논쟁이 전개되고 고승대덕의 출현이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조선불교가 외압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발전을 통하여 끊임없는 수행과 발전을 이루어 현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화성행궁 Ⓒ수원시

2014년 3월 29일 토요일, 화성학교 제1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08:00 서울 출발 (정시에 출발합니다.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화성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강 여는 모임
09:00-10:00 화성행궁 도착. 화성행궁, 화령전 답사
10:00-12:30 화성 답사(서장대, 화서문, 서북공심돈, 장안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연무대)
12:30-13:30 점심식사 겸 뒤풀이(화성 안 궁정한정식)
13:30-14:20 융건릉 이동
14:20-16:00 융건릉 답사
16:00-16:10 용주사 이동
16:10-17:00 용주사 답사
17:00 서울 향발. 제1강 마무리모임

▲화성학교 답사지도 Ⓒ화성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의, 따뜻한 여벌옷, 충분한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화성학교 제1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십시오. 화성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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