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화성(華城) 및 그와 밀접한 융건릉(隆健陵)·용주사(龍珠寺) 등을 돌아보며 그 깊은 뜻을 공부하는 화성학교가 오는 3월 개교합니다. 교장선생님은 ‘화성박사’인 김준혁 교수(한신대)입니다.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할 만큼 성을 많이 쌓았죠. 그중에서도 수원 화성은 ‘성곽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우수한 기능을 갖춘 조선시대 성곽입니다. 유네스코는 1997년에 수원 화성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김준혁 교장선생님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개혁군주라고 평가받는 정조가 세운 ‘수원신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정조가 조선의 농업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자 만든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습니다. 훗날 정조를 공부하면서 정조가 대유평이란 이름을 지은 의미를 알고, 미리 알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가 아들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함께 등교할 때 힘들게 페달을 밟으면서도 하루에 한 꼭지씩 역사 이야기를 해준 것이 가슴에 남아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정조를 전공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이후 수원시가 본격적인 화성 복원 사업을 추진할 때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어 화성의 복원과 컨텐츠 개발에 참여하였고, 이후 화성박물관 건립을 주도하여 학예팀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신대학교에서 정조교양대학을 설립하면서 이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이 바로 정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있고, 화성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화성의 우수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조시대 개혁과 민본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화성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최근 대한민국 역사교사 100명에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 100명을 추천받았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이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였습니다. 2위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고 3위가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만큼 정조가 만들고자 했던 백성의 나라, 그가 추진하였던 소통의 정책이 오늘 이 사회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가 과대 포장되어 그가 추진했던 모든 일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전근대 그 어떤 국가지도자들보다 백성을 위해 헌신한 그 같은 국왕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운 개혁기반도시 화성은 이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찾는 역사문화도시가 된 것입니다. 화성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입니다. 성곽의 웅혼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아름다움이 곧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정조의 표현대로 화성의 아름다움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속에 더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본주의입니다. 정조는 화성 축성 당시 참여한 기술자와 날품팔이들 모두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름 더위를 막기 위한 척서단(滌暑丹)과 오늘날의 영양제인 제중단(濟衆丹)을 하사하고 겨울에 솜옷과 털모자를 주었습니다. 당시 털모자는 정3품 당상관 이상 되는 고위직들이나 썼던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축성에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하사하였으니 이들의 기쁨은 그 무엇보다 컸을 것이고 국왕의 따스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화성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 회갑진찬연은 단순한 회갑잔치가 아니라 조선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의식 혁명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남녀가 함께 잔치를 하고, 여성이 상위에 남성이 하위에 자리하며, 조선의 악기만을 사용하고, 백성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은 근대화로 나가는 시대의 변화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모두 화성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화성 안에는 국방 개혁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최강의 군대라고 평가받는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이 주둔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가 2대에 걸쳐 완성한 무예24기를 익히고 그 무예를 토대로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화약 신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성공시켰습니다. 중국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약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의 흔적이 지금 화성에 오롯이 남아 무예24기를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화성을 찾아가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조가 꿈꾼 평화롭고 평등하고 자주적인 나라만들기의 모든 것을 현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정조시대 역사의 길을 걸으며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국가,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김준혁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월 답사지인 화성과 융건릉, 용주사 등에 대해 자세히 들어봅니다.
우리는 왜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방문할까요?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상징이자 정조시대 개혁정치의 산물입니다. 정조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기반도시로서 화성을 축성하였습니다. 더불어 조선시대 모든 문화적 역량을 동원하여 변화의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 화성을 건설하였습니다.
정조는 모든 백성들을 평등한 신분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펼쳤고 이를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한 공간으로 화성을 축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치적 행위 공간을 서울의 창덕궁이나 경희궁이 아닌 이곳 화성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정조에게 서울은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정조는 자신이 새로 조성한 신도시 수원에서 상왕(上王)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성곽이 필요했고 이 성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나타난 여러가지 문제점을 보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가 설계하고 마찬가지로 최고의 기술자들이 축성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화성에는 조선·중국·일본 성곽의 장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서양의 모든 문화를 수용하여 그것을 조선화(化)하고자 했던 정조와 당대 학자들의 포용력이 보여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배척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 화성에서 극명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중국식 건물인 듯하면서도 조선식이요, 일본식 성벽인 듯하면서도 조선식인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정조시대에 우리 산천과 우리 민족의 삶을 고민하는 진경문화가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니고 조선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조선중화주의가 나타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상에 대한 포용과 관용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포용정신은 화성 축성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의 신분이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밑으로는 승려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계층들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화성 축성에 참여한 이들은 신심을 가지고 화성 축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 결과 10년 예상의 공역이 3년이 채 되지 않아 마무리된 것입니다.
또한 화성에는 당대 최고의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비롯한 왕실의 최고급 문화가 살아 숨쉬는 문화의 땅입니다. 아울러 낙성연에서 보여주듯이 왕실문화와 산대희를 비롯한 평민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상하동락(上下同樂)의 땅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조선 역사상 국왕이 직접 백성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준 민본주의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어찌 화성을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정조시대 정신과 사상의 결정판으로 인해 완성된 화성이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제 세계 속의 역사문화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민본의 땅을 보기 위하여 화성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정조대왕은 왜 화성을 건설하였나
화성은 어떠한 특별함이 있어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화성에 다름아닌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을 심사하고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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