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봄날! 인왕산·옥류동천과 서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봄날! 인왕산·옥류동천과 서촌

3월의 서울학교

꽃피는 봄입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 인문역사지리 전문가)의 3월 답사(제24강)는 2014년 3월 16일(일) 열리며, 주제는 <인왕산·옥류동천과 서촌>입니다. 살구꽃이 아름답게 피어 도성 안 경치 좋은 다섯 골짜기의 하나로 꼽혔던 인왕산(仁王山)·옥류동천(玉流洞天)과 유서깊은 서촌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옛부터 풍광을 자랑했던 탕춘대성 자하문밖. 북한산 연봉이 병풍을 이룬다.ⓒ서울학교


3월 16일 일요일 아침 9시, 서울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 입구 중국음식점 <팔선생> 앞에서 모여 출발합니다(광화문 KT빌딩 앞 버스정류장에서 7016번 상명대 가는 버스 이용하면 20여 분 걸립니다. 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홍지문→오간수문→석파정 별채→탕춘대성→너럭바위(자하문밖 조망)→기차바위→한양도성
→인왕산 정상(한양도성안 조망)→치마바위→곡성→선바위→국사당→택견수련터→황학정→사직단→점심식사 겸 뒤풀이(가고파식당)→필운대→송석원터→자수궁터(군인아파트)→옥류동천(옥인아파트)→기린교→선희궁터→백송→정철생가터

▲서울학교 제24강 답사지도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인왕산·옥류동천과 서촌>에 대해 들어봅니다.

인왕산은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중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됩니다. 인왕산이 부려놓은 계곡을 옥류동천(玉流洞天)이라고 하고 이곳에서는 중인(中人)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던 송석원(松石園)과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弼雲臺)가 있었으며, 세종과 송강 정철이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왕산을 달리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왕산이 임금이 계신 궁궐의 오른쪽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右弼雲龍)’는 의미로 그리 불렀고 이로부터 백사 이항복의 집이 있었던 필운대(弼雲臺)라는 지명이 나왔습니다.

▲인왕산에 오르는 호젓한 소나무숲길 Ⓒ서울학교


인왕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문 쪽과 사직단 쪽 그리고 창의문에서 오르는 길을 선택하는데, 서울학교에서는 일반인의 발길이 뜸한 서쪽능선으로 올라 사직단 쪽으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북한산 향로봉(香爐峰)에서 인왕산으로 뻗어있는 능선 상에는 허물어진 것 같은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고 부릅니다. 탕춘대성은 조선 숙종(肅宗) 때 한양도성(漢陽都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연결하기 위해 쌓다가 중단한 미완성의 성입니다.

탕춘대성은 북한산성과 한양도성 사이가 허술하여 쌓기 시작한 성입니다. 서해로 침입한 적들이 한강의 난지도(蘭芝島) 어름에서 홍제천(弘濟川)을 따라 쳐들어오면 바로 닿는 곳이 한양도성의 북서쪽 문인 창의문(彰義門) 밖이 되므로 이러한 지리적 취약성 때문에 도성 방위를 위해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잇는 보조성(補助城)으로 쌓은 것입니다.

애초의 계획은 북한산성의 문수봉(文殊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인 향로봉에서 한양도성의 인왕산에 이르는 부분과, 북한산성의 보현봉(普賢峰)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산줄기인 형제봉에서 보토현(補土峴)을 지나 한양도성의 북악에 이르는 부분에 성을 쌓기로 하였으나 인왕산에 이르는 부분만 공사를 시작하였고 그것도 미완성의 상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탕춘대성의 정문 홍지문 ⓒ서울학교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는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郞), 두 화랑을 기리기 위해 신라시대에 세워진 장의사(壯義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이 절을 작파하고 놀이터로 만든 후 그 이름도 ‘봄에 질펀하게 논다’는 뜻으로 탕춘대라 하였습니다. 장의사의 유적은 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에 당간지주(幢竿支柱)만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후 도성 밖 북쪽을 지키는 총융청(摠戎廳)이라는 새로운 군대가 이곳에 주둔했고 가까운 곳에는 군수품을 지원하기 위한 평창이 들어섰으니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평창동(平倉洞)과 신영동(新營洞)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탕춘대성은 쌓다만 성이지만 세 곳에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구기터널 위에 위치한 암문(暗門)이고 나머지 둘은 상명대학교 앞에 있는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문(五間水門)입니다. 성을 쌓게 되면 사람이 왕래할 문을 내야 하고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물길도 내야 합니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에서 사람이 다니는 공식적인 정문이고 암문은 비공식적인 비밀통로인데 정문은 누각이 있고 암문은 누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간수문은 물이 지나갈 길을 다섯 개의 홍예문(虹霓門)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여 오간수문입니다.

홍지문에서 차도를 건너면 지금은 음식점으로 변한 석파정(石坡亭) 별채가 있습니다. 석파정의 원래 이름은 삼계정(三溪亭)입니다. 북한산의 문수봉(文殊峰)과 보현봉(普賢峰) 그리고 북악(北岳) 사이로 흘러내리는 세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홍제천(弘濟川)이 되어 난지도(현재의 하늘공원)에서 불광천(佛光川)과 만나 한강(漢江)으로 합류하는데,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 지은 별장이라고 삼계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삼계정은 조선 철종(哲宗) 때 영의정을 지낸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인 김흥근의 별장이었으나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잠시 머물기로 하고는 그냥 눌러앉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대원군의 호인 석파정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석파정의 본채는 부암동 터널 입구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고 서예가 손재형이 지금의 자리에 자신의 한옥을 지을 때 별채를 사들여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대원군 별장’으로 명명되어 본채와 무관하게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별도 지정되었습니다. ‘대원군 별장’은 한국식과 중국식이 혼합된 새로운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원군 별장’ 석파정 별채 Ⓒ서울학교


‘대원군 별장’을 나와 홍제동쪽으로 인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왼쪽으로 인왕산에 오르는 나무계단이 나타나고 조금은 가파른 산자락을 올라가면 탕춘대성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고 산성은 도중에 끊어져 있습니다.

능선에 오르면 멀리 북한산이 서남쪽으로 보현봉, 문수봉,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수리봉으로 뻗쳐 있고 동남쪽으로는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지나 구준봉을 거쳐 북악에 이르는 능선이 뻗어 있습니다.

이 두 능선 사이의 계곡을 아름다운 바위와 맑은 물로 유명한 한양5경의 하나인 ‘세검정 계곡’이라 하고 달리 경치 좋은 곳으로 통칭되는 ‘자하문밖’이라고도 합니다. 자하문은 창의문의 다른 이름으로 ‘자하문밖’이라 함은 지금의 세검정,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일대를 말합니다.

이곳에 평창(平倉), 탕춘대, 조지서(造紙署) 그리고 세검정(洗劍亭)이 있었습니다. 평창은 오위영의 하나로 도성 밖 북쪽을 경비하는 총본부인 총융청(摠戎廳)의 군수물자를 보관하던 창고이고 조지서는 이 계곡의 물이 너무 맑아 한번 사용한 한지의 먹물을 씻어내고 넓은 바위에서 말려 다시 종이로 만들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세검정은 인조반정 때 반정의 주역들이 칼을 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보다는 총융청이 이곳에 있었기에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쉬면서 칼을 씻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검이란 단순한 칼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칼을 씻어 칼집에 넣어둠으로써 더 이상 칼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인왕산의 서쪽능선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한적한 곳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의문(彰義門)에서 바로 인왕산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호젓한 소나무 길을 걸어가면 도시에서 켜켜이 쌓인 홍진(紅塵)이 말끔히 씻어지는 듯 상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나무 길을 잠시 벗어나면 좌우로 낭떠러지인 커다란 바위덩어리인 유명한 기차바위가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잠시 다리쉼하며 내려다보면 북악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이 띠처럼 둘러쳐 있고 북악과 인왕산 사이의 안부에 창의문이 서 있습니다.

인왕산 정상에 오르면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과 내사산(內四山)인 북악, 낙산, 목멱산, 인왕산을 둘러친 한양도성이 내려다보입니다. 한양은 내사산을 잇는 도성을 둘러치고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네 개의 큰문과 네 개의 작은 문을 내고 도성 중심에 종루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성 안의 명당수 물줄기인 청계천이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흥인지문 옆에 오간수문을 설치하고 그 위로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우리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수련하고 시합까지 하였던 곳이 남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 택견시합이 열렸다는데 우대와 아랫대 두 지역으로 편을 갈라 시합을 하였답니다.

우대라 함은 청계천 상류지역인 도성 안의 서북쪽으로 주로 하급관리들이 살았고, 아랫대는 청계천의 하류지역인 도성 안의 동남쪽으로 주로 하급 장교들이 살았습니다. 도성 안의 서북쪽은 경복궁에 가까워 하급관리[吏胥]인 중인들이 많이 살았고 동남쪽은 훈련원이 있어서 하급장교[軍摠]인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사직단으로 내려서기 전에 만나는 황학정은 사정(射亭)으로 1898년(광무 2) 대한제국 시절에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지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등과정 터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이 다섯 군데가 있었는데, 필운동(弼雲洞)의 등과정(登科亭), 옥동(玉洞)의 등룡정(登龍亭), 삼청동(三淸洞)의 운룡정(雲龍亭), 사직동(社稷洞)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樓上洞)의 풍소정(風嘯亭)으로, 그 위치가 모두 인왕산과 북악 사이에 있는 서촌에 있어 서촌 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사정은 조선 전기부터 무인의 궁술연습지로 유명했는데, 갑신정변 이후 활쏘기 무예가 쇠퇴하자 많은 활터가 사라졌고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활쏘기를 금지하여 황학정만 그 맥을 이어왔으며 지금 황학정이 세워져 있는 곳은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입니다.

인왕산의 서쪽 끝자락에는 토지의 신[社]과 오곡의 신[稷]에게 제사지내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습니다. 고대국가에서는 임금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해서 대대로 세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의 씨가 마르지 않게 대를 잘 잇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어야 함으로 비옥한 토지와 튼실한 씨앗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궁궐을 중심으로 임금의 조상 위패를 모시는 곳[宗廟]을 왼쪽에 두고 토지와 곡식의 신에 제사 지내는 곳[社稷壇]을 오른쪽에 두어[左廟右社] 임금이 친히 납시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점심식사는 배화여대 앞에 있는 금천시장의 가고파식당에서 합니다. 금천시장이라는 지명은 경복궁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금천(禁川)이라 하는데 이 물길이 시장 입구에서 북악과 인왕산에서 흘러온 백운동천, 옥류동천과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이곳이 세종대왕께서 태어난 곳이라 최근에는 세종음식문화거리로 불리기도 합니다.

점심식사 후에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와 서촌 일대, 선희궁터와 정철생가를 둘러볼 예정입니다.

▲백사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 Ⓒ서울학교


필운대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로서 바위에 새겨진 글씨 세 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집을 지을 때 감독관으로 보이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외 9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으며 오른쪽 위에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쓴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푸른 바위에는 흰 구름이 깊이 잠겼고,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전해오니,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선희궁(宣禧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신주를 봉안한 묘사(廟祠)로 1764년(영조 40)에 건립되었으며 원래 영빈이씨의 시호(諡號)를 따서 의열묘(義烈廟)라 하였다가, 1788년(정조 12)에 선희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1870년(고종 7)에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렸는데 그렇게 된 데는 연유가 있습니다. 영친왕이 태중(胎中)에 있을 때 순헌 엄귀비(淳獻嚴貴妃)의 꿈에 영빈이씨가 나타나 폐(廢)한 사당을 다시 지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기에 엄귀비가 영친왕을 낳고 나서 꿈 이야기를 고종에게 고하여 본래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어서 다시 신주를 받들었다고 합니다만, 1908년에 신주를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 받들었다고 합니다.

육상궁은 왕실의 사묘(私廟)로서 달리 칠궁(七宮)이라고도 부르는데, 왕실의 사묘란 조선 시대 정실왕비(正室王妃)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그의 어머니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육상궁은 원래 1725년(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되었고 1882년(고종 19)에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으며, 1908년 추존된 왕 진종(眞宗)의 생모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연우궁(延祐宮),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경우궁(景祐宮),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선희궁(宣禧宮), 경종의 생모 희빈장씨(禧嬪張氏)의 대빈궁(大嬪宮), 추존된 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저경궁(儲慶宮) 등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嚴氏)의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습니다.


▲선희궁터 Ⓒ서울학교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가벼운 등산 차림, 식수, 따뜻한 여벌옷, 모자, 스틱, 아이젠(미끄러울 때), 우의,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24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점심식사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역사지리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역사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지리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셋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보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