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틱한 인생행로 때문에 술레이마놀루라는 역도 선수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그는 전통의 역도 강국 불가리아에서 최고의 유망주였다. 하지만 불가리아의 1984년 LA 올림픽 보이콧 결정으로 그는 금메달 획득의 기회를 놓쳤다.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터키 소수민족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터키 혈통의 술레이마놀루는 모국으로 망명했다.
이 와중에 술레이마놀루의 '원 소속국가' 불가리아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터키에 은밀한 거래를 제안했다. 불가리아는 터키로부터 125만 달러를 받고 술레이마놀루를 터키 대표팀의 일원으로 올림픽에 뛸 수 있게 했다. 술레이마놀루는 1988년부터 올림픽 3연패를 하며 터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147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신장 탓에 '작은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술래이마놀루의 전설은 이렇게 완성됐다.
새로운 '스포츠 용병'의 유형을 만들고 있는 빅토르 안
전통적으로 적지 않은 스포츠 스타들은 술레이마놀루처럼 자신의 혈통을 찾아갔다. 그 외에도 이민자 신분으로 새로운 국가를 위해 뛰는 경우도 많았다. 터키 이주 노동자 출신의 외질이나 가나 이민자의 2세인 발로텔리가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 축구를 이끌고 있는 것은 좋은 예다.
순수한 스포츠 '용병'도 있다.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카타르 축구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브라질 출신의 선수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이런 선수들은 카타르 '오일 달러'에 팔려갔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카타르 국기를 가슴에 달고 뛰는 외국인선수의 자유를 박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0일 소치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1500미터에서 동메달을 딴 빅토르 안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국가인 러시아를 대표해 올림픽에 출전했기 때문에 순수한 스포츠 용병에 가깝다. 특히 최근 <뉴욕타임스>의 보도처럼 재정적 지원이나 귀화 요건 등에서 미국보다 러시아가 빅토르 안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용병은 항상 조건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한국에서는 빅토르 안을 '스포츠 용병'으로 취급하지 않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 주된 이유는 그가 국내 쇼트트랙계의 고질병인 파벌싸움의 희생양이라는 시각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빅토르 안은 새로운 유형의 '스포츠 용병'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에서는 아직 한 번도 메달을 따지 못한 쇼트트랙에서 메달을 안겨 줄 용병일 수는 있어도 한국에서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내부 정치 역학적 구조 때문에 러시아에 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어서다.
2개국서 금메달 노리는 빅토르 안의 도전
한국의 안현수가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되는 과정은 아주 복잡하지 않았다. ISU(국제빙상연맹)의 규정에 따르면 현지에서 1년이상 거주하고 체류 국가 연맹의 동의를 받아 귀화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국가 대표로 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여자 쇼트트랙 선수 최민경의 경우도 프랑스 국가 대표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최민경은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이후 프랑스 선수로는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최민경과 달리 빅토르 안에게는 러시아 선수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빅토르 안의 이름 석자는 동계 올림픽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된다. 아직까지 동계 올림픽을 통해 2개국에서 금메달을 모두 딴 선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선수들은 오직 하계 올림픽에서만 배출됐다. 럭비 선수로 호주와 미국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다니엘 캐롤, 구소련과 벨라루스에서 금메달을 딴 여자 체조 스타 스베틀라나 보긴스카야와 그루지아와 그리스에 각각 금메달을 안겨 준 역도 영웅 아카키데 카키아슈빌리가 그 주인공이다.
빅토르 안의 메달과 안현수의 부활
8년 만에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빅토르 안에게 국내 팬들은 성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한국 빙상계의 내부 알력 때문에 시련을 겪었던 안현수의 부활이라는 점이 부각된 셈이다. 한체대파의 에이스였지만 한체대파의 조언을 거부하고 성남시청에 입단하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안현수의 과거가 여전히 한국 팬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러시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소치 동계 올림픽을 강한 러시아 만들기 프로젝트의 정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빅토르 안이 동메달을 따자 "진정한 올림피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줬고 러시아를 훌륭하게 대표해줬다"며 반색했다. 메드베데프 총리도 "빅토르 안의 성적은 러시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 것이며 다음 경기에도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러시아는 빅토르 안이 자국의 동계 올림픽 종합 1위 달성에 기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빅토르 안의 현재이며 메달이 될 수밖에 없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최근 평창 동계 올림픽에 대비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현재 모습만이 한국에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다. 올림픽이란 공식 무대에서 그의 이름은 빅토르 안이겠지만 우리도 모르게 그의 질주를 보면서 안현수라는 이름이 튀어 나오는 것은 막기 힘들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참고로 불가리아에서는 술레이마놀루를 여전히 술레이마노프로 부른다. 역도 강국 불가리아에 대한 향수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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