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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폭' 때려잡은 김용판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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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폭' 때려잡은 김용판의 생존법

[편집국에서] 김용판의 진실은 드러날까?

‘주폭(酒暴)’. ‘주취폭력’의 약자로 술을 마시고 행사하는 폭력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특허청에 상표등록(등록번호 4020110020183) 돼 있다. 상업적 용도로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상표권의 출원자는 김용판. 그가 2011년 4월 충북지방경찰청장에 재직하던 당시 신청했다.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영전한 뒤엔 작심한 듯 취임사부터 ‘주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재활보다 구속이 효과적”이라며 이 잡듯 주폭들을 잡아넣었다.

주폭은 처지를 헤아릴만한 인간 취급을 못 받았다. ‘주폭 1호 검거’, ‘주폭 100호 검거’…. 서울경찰청은 그렇게 사람에게 번호를 매겨 세더니 취임 100일 만에 300여 명을 잡아넣는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검거된 주폭들은 대개 노숙인, 일용직 노동자, 실직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김용판이 진두지휘한 서울경찰은 573명의 주폭을 검거 및 구속한 공을 인정받아 2012년 12월 13일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에는 3개 대첩이 있는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명량대첩, 김용판의 주폭대첩”이라는 낯간지러운 칭송도 나왔다.

‘주폭대첩’은 김용판의 생존법을 잘 보여준다. ‘주폭’이란 단어를 상업적으로 이용할만한 창조적인 발상이 뭔지 모르겠지만, 상표등록까지 해가며 남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찜’해두고 자기 브랜드로 만들었다. 찍 소리 못하는 약자들에게 무자비한 공권력을 집행해 실적을 올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썼다. 그걸 공익으로 포장하면 뚝심이 된다고 봤는지 치밀한 언론 플레이도 폈다. 그가 ‘주폭과의 전쟁’을 선포하자마자 조선일보는 주폭 척결 기획기사를 몇날며칠 써댔다. 주폭이란 말은 그때부터 온 국민의 뇌리에 박혔고, 그는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그의 진짜 ‘전공’은 대통령 표창을 받기 하루 전인 12월 12일부터 은밀하게 움직여 이룩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은폐 대첩’일 것이다. 그날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해 수서경찰서가 국정원 직원 김하영의 컴퓨터, 노트북, 휴대전화 등을 압수하기 위한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려고 했다가 보류한 날이다.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던 권은희의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진술에 따르면 “수서서는 압수수색영장 신청 방침을 세웠지만 김용판 청장이 신청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바람에 영장 신청을 보류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대선을 사흘 앞둔 12월 16일 밤, 대선후보 TV 토론이 끝난 직후 경찰이 느닷없이 보도자료를 뿌려 ‘디지털 증거분석 결과 문재인·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비방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함으로써 선거의 명운을 가른 ‘은폐 의혹’의 중심에도 김용판이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권은희의 진술은 당시의 사건 진행상황이나 다른 경찰관들의 진술에 비춰 객관적 상당성, 합리성이 없다고 보이고 달리 그 진술에 일치하는 객관적 자료를 찾아볼 수 없어 믿기 어렵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를 축소·은폐해 불법 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6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을 마치고 법원 밖으로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결국 1심 재판부는 직권남용, 공직선거법 위반, 경찰공무원법 위반 등 김용판의 3대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무죄 판결 뒤 "공정하게 진실을 밝혀 나와 경찰 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재판부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진실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반드시 밝혀진다는 말을 믿는다"고 했다. 여론의 비판을 일거에 뒤집은 뿌듯함일까, 그의 만면에 웃음기가 묘하게 번졌다. 반면, 국기문란 행위를 폭로한 내부고발자 권은희는 세상을 농락한 희대의 거짓말쟁이, 소영웅주의자가 됐다. ‘주폭대첩’에서 노숙인들이 졸지에 척결 1호의 사회악이 됐던 것처럼.

주폭 척결에 손잡았던 조선일보는 “1심 재판부의 판단을 보면 검찰이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증거를 내놓지 못할 것이라면 재판을 더 끌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라고 검찰에 항소 포기를 종용하며 이번에도 호흡을 맞췄다. 재판 결과에 대한 권은희의 반박 기자회견에는 “인상 비평 수준에서 판결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역공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검찰이 이번 주 항소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채동욱·윤석열 ‘찍어내기’부터 집요하게 진행된 정권의 수사팀 무력화 과정을 돌아보면 검찰이 항소심에서 심기일전할지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재판부로부터 “검사의 주장과 논리가 우연적이고 지엽적인 사실들의 조각들로 성글게 엮어 그 안에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이 있다”고 면박까지 당해 검찰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산산조각 났다.

지난 대선의 물줄기를 바꾼 김용판의 ‘은폐 대첩’은 몇 고비만 무사히 넘기면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얘기다. 대통령 표창에 비할 수 없는 더 큰 보상이 뒤 따를만하다. 실제로 그는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던 지난해 5월 대구 달서구에서 출판기념회를 두 차례나 여는 배짱을 부렸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고향에서 여는 출판기념회는 정치인으로 넘어가는 필수 코스로 여겨진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책 제목이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다. 김용판에 관한 진실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 숨어 있지 않을 텐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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