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다. <돈의 철학>(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길 펴냄)은 경제서나 사회과학서가 아닌, 돈이 인간 세계의 거의 모든 부면에 끼치는 영향과 역할에 대해 숙고하는 철학서다.
게오르그 짐멜은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보강하는 것이 이 책의 "방법론적 의도"라 밝히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거나 돈을 악마화하는 데 그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의 토대 위에서 어떻게 문화가 가능한가를 모색"(1009쪽)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 구조와 이념적 구조, 그러니까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를 (…) 상호작용 관계로 파악"(942쪽)해야 했고, 경제학이라는 경험과학과 철학이라는 형이상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철학은 "경험과학이 다루는 다양한 현상을 자신의 인식 대상으로 삼"거나 "경험적 현실의 세계로 임"(981쪽)할 수 있게 됐다.
"본래 돈과 화폐경제가 어떻게 개인들의 사고, 감정 및 의지를, 사회적 관계들을 그리고 사회, 법 및 경제 제도들을 변화시켰는가다. 다시 말해 근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조직인 돈이 문화의 모든 중요한 측면에 끼치는 영향, 바로 이것이 그의 주제다."
<돈의 철학>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유를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옮긴이 김덕영은 912쪽에 달하는 본문에만 600개가 넘는 상세한 각주를 달아 일일이 단어와 문맥의 당대적 의미를 분석하거나, 개념에 대한 오해나 억측을 바로잡는 해설을 게재했다(그는 이에 대해 "짐멜 전문가가 아닌 독자들에게 짐멜의 지적 세계에 대한 – 최소한 이 책과 관련된 – 전반적인 조망을 주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성실하고 지성적인 이 학자의 놀라운 노고 덕분에 20세기 사상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대작 <돈의 철학>은, 본문과 해제의 결합이 그 자체로 뛰어난 해설서로 작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지난 12월 말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에서 번역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프레시안 books'는 현재 독일 카셀 대학 사회학과 강의 때문에 독일에 체류 중인 옮긴이 김덕영과 <돈의 철학>에 관한 서면 인터뷰를 나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먼저 늦었지만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하신 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베버와 짐멜의 최고 전문가로서 주요 저작을 한국에 소개하는 것에 사명감을 갖고 계신 점에 대해 독자로서 늘 감사드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덕영 :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식인에게 이보다 큰 개인적 영예가 있을 수 없고 이보다 큰 사회적 보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좌우명에 따라 번역에 기반하는 연구와 연구에 기반하는 번역을 추진해 왔습니다. 이 상은 그 동안 제가 이룩한 작은 일에 대한 큰 사회적 인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선생님께선 사회학과 철학에 기반하여 게오르그 짐멜과 막스 베버에 대한 비교연구를 전공하셨습니다. 애초에 이 두 사상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김덕영 : 저의 석사학위 논문과 박사학위 논문은 막스 베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자격) 논문은 게오르그 짐멜과 막스 베버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저에게 베버가 주전공이고 짐멜은 부전공입니다.
이처럼 베버에서 시작해 짐멜과 베버의 비교연구로 넘어간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냐 베버냐'라는 비교 축의 대안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짐멜이냐 베버냐'라는 비교 축에 의해 '마르크스냐 베버냐'라는 축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이 비교 축 이외에도 다양한 비교 축을 제시하면 사회(과)학적 인식과 사유를 더욱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짐멜은 베버와 더불어 ― 그리고 에밀 뒤르케임(Emile Durkheim)과 더불어 ― (현대) 사회학의 틀을 다진 거장입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비교 축을 발전시킬 생각입니다. 그 중심에는 막스 베버가 있습니다. 예컨대 "베버냐 엘리아스냐", "베버냐 루만이냐" 하는 식으로…….
프레시안 : 막연하게 짐멜과 베버 두 사람이 독일 '사회학'에서 '유사한'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진 학자라고 짐작하는 독자들을 위해 두 사람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신다면요.
김덕영 : 짐멜과 베버는 여러 측면에서 유사점과 상이점을 보입니다. 이 두 거장은 사회학자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사회학자이었지만 사회학자이기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거장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는, 짐멜이 사회학과 더불어 철학을 추구했다면(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짐멜에게는 철학이 전공이었고 사회학이 부전공이었음), 베버는 철저하게 경험과학적 인식에 머물렀습니다. 다시 말해 베버는 사회학을 포함해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 문화사, 국가학 등 다양한 경험과학적 인식영역을 포괄했습니다. 베버는 문화과학 및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구축하는 데에 철학,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식론을 원용했습니다.
프레시안 : 형이상학 차원에만 머무르는 '도그마'로서의 형이상학에서 "삶과 기능으로서의 형이상학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짐멜의 주장은 의미심장합니다. 다만 <돈의 철학>에서처럼 화폐라는 '측연(測鉛)'을 통해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방식의 철학은 매우 어려운 작업일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짐멜이 이 같은 고난의 학문에 투신한 궁극적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덕영 : 물론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짐멜이 말하는 형이상학은 분명 새로운 철학적 인식범주, 아니 짐멜 식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철학적 인식형식입니다. 그것은 경험과학과 결합된 형이상학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적 현실의 세계로 임하여 경험과학이 다루는 인식대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형이상학입니다.
이를 통해 언뜻 진행된 사고, 단편적이며 무의미하게 보이는 다양한 현상들이 철학적 인식의 지평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입니다. 심지어 유행, 모험, 남녀관계, 폐허 등도 형이상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짐멜이 새로운 형이상학적 인식을 추구하는 이유는 근대세계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에서 기인합니다. 짐멜에 따르면, 분화된 근대세계에는 다양한 경험적-실증적 개별과학이 ― 예컨대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심리학 등이 ― 존재하며, 철학은 바로 이것들의 값진 지적 생산물을 고려해야만 근대사회와 근대인 그리고 그의 삶을 적합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돈입니다. 돈은 경제학적 논의와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짐멜의 <돈의 철학>은 이 돈을 경제학적 대상이 아니라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제 철학적 담론은 더 이상 실증적 경험과학이 근대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 짐멜의 확고한 입장입니다. 만약 철학이 경험과학이 다루는 일상적인 삶의 세계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철학은 공허한 도그마로 남게 되고 결국에는 더 이상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라고 짐멜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김덕영 : 이 질문은 바로 앞의 질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학적 시선'이란 말은 이른바 '미'나 '추'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식방법, 즉 철학적 측연을 던지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짐멜은 <돈의 철학>에서 철학적-형이상학적 인식목표와 미학적 인식수단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개별적이고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파악하려는 짐멜의 형이상학적 의도가 상징적인 성격의 미학적 관찰방법과 선택적 친화력을 갖기 때문입니다.
짐멜에 따르면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자족적인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예술작품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술작품의 모든 개별적인 요소는 예술작품의 전체적인 의미와 가치를 담지하는 동시에 바로 이 의미와 가치에 의해 담지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돈이라는 근대세계의 한 개별적인 요소는 근대세계의 전체를 담지하는 동시에 근대세계 전체에 의해 담지됩니다. 그러므로 돈이라는 표면적 현상에서 근대세계의 심층에 철학적,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적-미학적 측연을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짐멜이 19세기 말 '돈'이라는 주제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김덕영 : 짐멜은 처음부터 돈에 대하여 지대한 인식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이 그 어떤 것보다도 근대세계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짐멜에 따르면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실체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모든 것이 해체되어 유동하며 역사적으로 무상한 것으로 바뀝니다. 다시 말해 실체적이고 확고부동한 가치들이 다양한 요소들의 생동하는 상호작용으로 대체됩니다.
돈이야말로 영원한 운동이며(부단히 주고받기 때문에, 또는 돌고 돌기 때문에) 상호작용의 결정체입니다. 말하자면 돈은 근대세계의 표면에서 그 심층에 던지는 철학적 측연들 가운데에서 가장 확실하고도 명백한 측연이 되는 셈입니다.
프레시안 : 위의 질문에 이어, 마르크스의 혁명적인 <자본론> 발간 직후에 한정하여, 짐멜과 베버 이외에 '돈'에 대해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펼친 또 다른 작업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덕영 : 저도 지난 번 번역을 하면서 좀 뒤져보았는데 과문한 탓인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서구 지성사 전반을 통틀어 짐멜의 <돈의 철학>만큼 돈에 대하여 심층적인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 저작은 없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베버의 경우는 돈에 대한 철학이 아니라 돈에 대한 경제학과 사회학입니다. 그리고 베버는 짐멜처럼 돈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연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프레시안 : '돈'이라는 단어의 선택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원제에 나오는 'Geld'의 사전적 의미는 "돈, 금전, 화폐, 지폐, 은행권, 재산, 자산, 부" 등이더군요. 돈, 화폐, 재산, 부 등 중에서 가장 '일상적인' 용어인 돈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덕영 : 짐멜이 <돈의 철학>에서 논한 대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돈입니다. 그것은 물이나 공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독일어 'Geld'(영어로 'money')를 굳이 '화폐'로 옮기려고 합니다. 저 역시 '돈'과 '화폐'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단어가 짐멜의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컨대 "화폐로 뇌물을 준다" 또는 "화폐로 화대(花代)를 준다"는 식의 표현은 무언가 어색합니다. "돈으로 뇌물을 준다" 또는 "돈으로 화대(花代)를 준다"는 식의 표현이 어울립니다. 돈에 의해 매개되는 일상적인 인간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산'이나 '부'도 돈의 가치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사실 고전을 번역하면서 한국어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덕영 : 한국사회는 돈을 악마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모든 악의 근원을 돈에서 찾는 것이지요. 돈의 악마화이지요. 그러면서도 돈을 신처럼 받듭니다. 돈의 신격화이지요.
그러나 돈은 악마도 신도 아닌 수단, 그것도 수단 중의 수단, 절대적 수단입니다. 바로 이 수단이 근대문화의 물적-경제적 토대가 됩니다. 이 토대를 부정하면 현물경제 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돈은 인간에게 자유를 줍니다. 만약 돈이 없다면 어떻게 여행을 할까요? 필요한 모든 것을 짊어지고 숙박비로 지불할 돼지 한 마리 몰고 여행을 떠날까요?
"돈에 기반하는 문화의 가능성"이란 이러한 돈을 물적-경제적 토대로 하면서 돈에 함몰되지 않는 인간 삶을 의미합니다. 돈을 수단으로 하면서 그 수단에 예속되지 않고 개인적 인격과 문화의 함양하는 가능성, 바로 이것이 돈에 기반하는 문화의 가능성입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마치 돈이 끝나는 곳에서 문화가 시작된다는 식의,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고를 합니다. 그러나 돈이 끝나는 곳에 문화도 끝납니다. 그러므로 한국사회는 보다 합리적인 경제문화와 금융제도를 발전시켜 근대문화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해 모든 개인에게 최소한의 문화적 가능성을 제공해야 합니다.
프레시안 : <돈의 철학>이 집필될 당시인 19세기 말, "사회적 영역이나 문화적 영역과의 관계 및 거기로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봉쇄된 노동자계급은 '전대미문의 실천적 유물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2014년 현재에는 더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화폐경제 위에서 "나름의 정신문화 또는 이상 문화를 발전시키는 개인의 의지와 능력"을 발전시키기는 역설적으로 더욱 힘들어진 상황이기도 하고요.
결국 문제는 그 같은 개인의 의지와 능력을 어떻게 함양시키고 자극시킬 것인가일 텐데요. (물론 시스템 자체의 변화가 아닌 개인의 변화를 얘기한다는 비판도 가능하겠습니다만, 그 부분까지는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을 넘어서는 논지지요) 짐멜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그 같은 의지와 능력 함양은 어떻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김덕영 : 교육, 학교 교육입니다. 이는 짐멜한테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짐멜은 개인들의 교육에 중점을 두는 문화정책으로서 객관적 전문지식 및 객관문화와 더불어 인간적 교육, 즉 개인의 내적 인격체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새로운 교육체제의 구축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짐멜이 보기에 18세기적 교육 이념과 19세기적 교육 이념의 결합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18세기의 인문주의적-이상주의적 교육 이념은 원칙적으로 인간의 내적-인격적 가치의 형성과 발전에 지향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19세기의 교육이념은 일차적으로 객관적인 전문적-기능적 지식과 능력의 축적 및 전수를 지향함으로써, 18세기의 교육이 추구한 인문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짐멜이 보기에 이러한 교육의 이념과 체제의 변화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객관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궁극적으로는 객관문화가 주관문화에 대해 우위와 지배적 관계를 점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교육의 이념과 체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짐멜은 18세기적 교육이념과 19세기적 교육이념 사이의 양자 간 선택이 아니라, 이 둘을 한 차원 더 높은 통일체로 결합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김덕영 : 번역이란 원문을 완벽하게 소화한 후 두 언어의 차이점을 극복하면서 우리말로 표현해야 하는, 그야말로 지난하고도 지난한 해석학적 순환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번역을 할 때 한 구절을 읽은 후 책을 덮고 독일어 저자라면 어떻게 표현했을까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저의 제1부전공이기도 하지만 이런 가르침 때문에 좋아합니다.
가장 좋은 번역서는 역자가 직접 쓴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번역은 원저자와 그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어 독자들과 한국사회를 위한 정신적-지적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은 ― 사전에 기대어 ― 단순히 원문을 문자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한국화된 텍스트를 만드는 정신적-지적 작업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각주와 상세한 해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두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저는 연구에 기반하는 번역과 번역에 기반하는 연구를 추구하는 지식인입니다. 번역은 고전 중의 고전을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완벽한 한글화를 이루는 일련의 정신적-지적 행위이자 과정으로 봅니다. 전문가란 번역하는 책뿐만 아니라 원저자의 지적 세계 전반 및 그의 사회경제적 및 문화적 배경 그리고 그와 다른 사상가들과의 관계에 대해 넓고 깊게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을 가리킵니다.
한국에서는 각주가 원문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면서 각주를 안 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실은 그럴 만한 의지나 능력이 없기 때문은 아니냐고? 각주는 원문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원문을 보강하는 것입니다. 만약 각주가 원문 훼손이라면, 상세한 각주와 해제를 갖추고 있는 '막스 베버 전집'은 원문 훼손 중의 원문 훼손이며. 따라서 즉시 출간을 중지시켜야 합니다.
프레시안 : 혹시 현대 사상가 중에서 짐멜의 정수를 가장 잘 계승하고 있다고 판단되시는 분이 있다면, 누구를 꼽고 싶으신가요.
프레시안 : 현재 작업 중이신 책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김덕영 : 이리저리 하다 보니까 올해는(어쩌면 내년 초까지 포함해) 여러 권의 책이 나올 것 같습니다. 우선 <환원근대 : 한국 근대화 근대성의 사회학적 보편사를 위하여>가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원래 3월에 나와야 하는데 제가 강의와 저술 및 번역으로 좀 바빠서 막스 베버 탄생 150주년이 되는 4월 21일을 전후로 출간될 것입니다.
또한 번역서 <개인법칙>(게오르그 짐멜)과 <모더니티의 단편 1>(게오르그 짐멜) 그리고 저서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비텐베르크(루터)에서 빈(프로이트)까지>가 출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는 저서 <사회의 사회학: 한국적 사회학이론과 사회학사를 위하여>의 종반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사회학 거장 12명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한국적' 사회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석사과정 강의를 통해서 번역서 <렘브란트>(게오르그 짐멜)와 <역사철학의 문제들>(게오르그 짐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의 토론이 번역작업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 작업들이 끝나면 제가 추진해온 지적 생산의 제1단계가 마무리됩니다. 내년부터 한 15년 지속될 제2단계에서는 짐멜과 베버의 주요 저작을 번역하고 사회학이론과 사회학사에 대한 연구서들을 내고 '루터에서 루만까지'라는, 여러 권의 단행본으로 이루어진 지성사 작업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환원근대'를 총론으로 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근대성에 대한 각론들을 쓰고 싶습니다.
짐멜과 베버의 그들의 주요 저작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제2단계의 가장 큰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짐멜의 경우 방금 언급한 <렘브란트>와 <역사철학의 문제들> 이외에 다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회학>, <사회학의 근본문제(개인과 사회)>, <사회분화론>, <철학적 문화>, <칸트>, <괴테>, <쇼펜하우어와 니체> 등.
베버의 경우 두 권으로 된('막스 베버 전집'의 체제에 따라 볼 때) 방법론 관련 저서가 일차적인 번역 대상이 될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두 권이 저의 번역작업의 정점으로 봅니다. 거기에는 칸트 이후의 다양한 근대적 인식론과 방법론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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