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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통령은 정말 세계의 멸망을 막아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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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통령은 정말 세계의 멸망을 막아낸 걸까?

[프레시안 books] 셀던 M. 스턴의 <존 F. 케네디의 13일>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인류가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건이다. 그런 만큼 대단히 많은 연구서와 논문들이 발표됐고, 몇 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책 <존 F. 케네디의 13일(원제: The Week The World Stood Still)>(셀던 M. 스턴 지음, 박수민 옮김, 모던타임스 펴냄)은 위기의 13일 동안(10월 16~28일)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맥조지 번디 안보보좌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딘 러스크 국무장관 등 핵심 각료들의 회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연구 또는 분석서가 아니라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기록이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가 핵전쟁이라는 ‘결정적 실패’를 피하면서 소련의 쿠바 핵미사일 기지 건설을 철회시킨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존 F. 케네디의 13일>(셀던 M. 스턴 지음, 박수민 옮김, 모던타임스 펴냄). ⓒ모던타임스
저자 셀던 M. 스턴은 1960년대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대학에서 10년간 미국사를 가르치다 1977년부터 1999년까지 23년간 케네디도서관에서 역사학자로 일했다. 미국의 대통령도서관은 해당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사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1983년부터 1997년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된 쿠바 미사일 위기 관련 녹음테이프의 해제 작업에 관여했고, 그 녹취록을 2003년 <결정적 실패 피하기>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결정적 실패’란 최소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미소간의 핵전쟁을 말한다.


500쪽이 넘는 <결정적 실패 피하기>의 핵심 내용을 일반 독자들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간추린 것이 이 책 <존 F. 케네디의 13일>이다. 2005년에 출간됐다.


저자에 따르면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초여름,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회의실에 비밀 녹음 장치를 설치했다. 케네디는 설치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저자는 취임 직후 쿠바 피그스만 침공작전(1961년 4월)의 실패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케네디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피그스만 침공작전은 전임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부터 추진됐던 것으로, 케네디 행정부 들어 실제 행동에 들어갈 당시 비공개회의에서 침공 계획을 지지했던 일부 자문위원들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말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침공작전의 책임자였던 알렌 덜레스 CIA 국장을 경질한다. 결국 퇴임 후 회고록 작성에 필요한 정확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비밀 녹음 장치를 설치했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케네디는 소련의 쿠바 핵미사일 기지 건설이 확인된 후 1962년 10월 16일 오전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이 회의는 미국이 쿠바 봉쇄를 철회한 11월 20일까지 계속된다. 이 회의는 케네디가 소련의 기지 건설 사실을 미 국민들에게 공표한 10월 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엑스콤)로 명명됐으며, 248시간 분량의 회의 내용과 12시간 분량의 전화통화 내용이 녹음됐다. 이 책에는 10월 16일부터 흐루쇼프가 미사일기지 철수 의사를 밝혀 위기가 해소된 28일까지의 주요 회의 내용이 수록돼 있다. 그리고 책 앞부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시작된 배경을, 뒷부분에는 위기 이후의 상황과 평가를 담고 있다.


<존 F. 케네디의 13일>은 케네디 대통령 등 당시 주요 정책담당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당시 위기의 배경이나 전개 과정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는, 특히 미국 외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논의의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살펴본 뒤 간단한 평가를 붙이기로 한다.

흐루쇼프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심한 것은 1962년 5월이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미국의 전복공작으로부터 카스트로 정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로 국제적 망신을 당한 케네디는 병적일 정도로 카스트로 전복에 집착했다.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책임자로 하는 스페셜그룹을 만들어 카스트로 전복(몽구스작전)에 전력을 투입했다. 1962년 2월에는 쿠바에 대한 전면적 경제봉쇄를 단행했고, 8월부터는 전설적인 공작전문가 에드워드 랜스데일 지휘 하에 쿠바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2000년작 [D-13일]. 가운데가 케네디 대통령(브루스 그린우드), 오른쪽이 보좌관 케네스 오도넬(케빈 코스트너). ⓒNew Line Cineam

둘째, 미국에 대한 핵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케네디는 미국의 핵미사일 전력이 소련에 뒤진다고(이른바 미사일 갭)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미국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예컨대 1961년 소련은 미국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겨우 4기 보유하고 있었다. 이 숫자는 1962년에 최소 20기에서 최대75기로 늘었지만 여전히 미국에 한참 모자랐다. 당시 미국은 170기의 ICBM과 소련 근해에서 소련을 공격할 수 있는 잠수함 발사 중거리 미사일 폴라리스를 128기 보유하고 있었다. 핵탄두 숫자에서도 2만 3000 대 3600으로 미국이 훨씬 앞서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1962년 4월 터키와 이탈리아에 소련을 겨냥한 중거리 미사일 주피터를 배치했다.


흐루쇼프는 미국에서 145킬로미터 떨어진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핵전력 열세를 만회하는 동시에 미국의 전복공작으로부터 카스트로정부를 보호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흐루쇼프는 쿠바 배치 미사일과 서베를린을 맞교환할 수도 있다는 계산을 했다. 동독 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은 소련에게는 큰 골칫거리였으며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소련은 1949년 6월 베를린에 대한 서방측의 접근을 차단함으로써(베를린 봉쇄) 미국 등 서방이 베를린을 포기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은 20만회에 이르는 공수작전으로 이를 물리쳤으며, 결국 베를린은 미국 등이 관할하는 서베를린과 소련이 관할하는 동베를린으로 분할됐다. 이후 베를린을 통해 서독 등으로 탈출하는 동독 주민이 늘어나자(350만 명) 소련은 이를 막기 위해 1961년 8월 서베를린을 둘러싼 장벽을 건설한다. 이른바 베를린장벽이다. 베를린장벽 건설을 둘러싸고 미소 간에 긴장이 고조됐으나 장벽은 결국 건설된다.

피그스만 침공과 베를린장벽 건설에서 케네디가 유약한 대응을 했다고 판단한 흐루쇼프는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나면 서베를린과의 맞교환을 흥정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흐루쇼프와 카스트로는 1962년 7월 쿠바 미사일 배치를 위한 비밀협약을 맺는다. 당시 카스트로는 미국이 터키와 이탈리아에 미사일을 배치했으므로 양자 외교의 합법적 행위의 일환으로 공개적으로 배치하자고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하고 비밀 배치를 단행한다. 야자나무 등으로 미사일을 위장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비밀 배치를 결정했고, 배치가 완료된 이후 11월 유엔을 방문하면서 쿠바 미사일 배치를 공개할 심산이었다는 것이다.


불과 1500명의 쿠바 망명인이 피그스만에 상륙하면 쿠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반카스트로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 아래 피그스만 침공작전을 벌인 케네디나 야자나무 등으로 미사일 배치를 은폐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들인 흐루쇼프 모두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는 게 저자 스턴의 지적이다.

▲에롤 모리스 감독의 2003년 작 <전쟁의 안개 : 로버트 S. 맥나마라의 삶에서 얻은 11가지 교훈>. ⓒSony Pictures Classics

소련의 미사일 배치는 10월 14일 미군 정찰기에 항공 촬영된다. 다음 날인 15일 CIA는 정밀 판독 끝에 공격용 미사일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16일 오전 백악관 각료회의실에서 긴급회의가 열린다. 이른바 엑스콤 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엿새간의 비밀회의를 통해 쿠바에 대한 공습, 침공, 봉쇄 등 여러 방안을 논의한 끝에 소련 미사일 자재의 쿠바 반입을 막기 위한 해상 봉쇄가 결정됐고 10월 22일 저녁 케네디 대통령이 TV 연설을 통해 이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다.


24일 흐루쇼프는 케네디에 보낸 친서를 통해 ‘해상 봉쇄는 전쟁 행위’라고 강력 반발한다(미국은 공격용 무기의 반입만을 선별적으로 막는 ‘검역’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케네디는 미소간에 핵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33~50% 정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26일에는 비밀전문을 통해 미국이 쿠바 불침공 약속을 한다면 미사일 배치를 철회하겠다고 제안한다. 이어 27일에는 언론과의 공개 인터뷰를 통해 미국이 터키 배치 미사일을 철수하면 쿠바 미사일 배치를 포기하겠다고 제안한다. 결국 다음 날인 28일 흐루쇼프가 미사일 배치 포기를 선언하면서 13일에 걸친 미소간의 핵 대치는 끝이 난다.


이 과정에서 미국 지도자로서 케네디의 역할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군부 및 의회 지도자들의 쿠바에 대한 강력한 군사대응 요구를 뿌리치고 협상에 의한 해결을 일관되게 모색했다는 점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출처 wikimedia commons
10월 19일 케네디는 맥스웰 테일러 합참의장과 커티스 르메이 공군 참모총장 등 군부 지도자들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군부 지도자들은 한 목소리로 쿠바에 대한 전면적 공습과 침공을 요구한다. 특히 르메이 장군은 “봉쇄와 정치적인 조치가 오히려 전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런 조치는 (체코에 대한 히틀러의 침공을 방관한) 뮌헨에서의 유화정책만큼이나 잘못된 정책”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한다.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는 1930년대 말 주영 대사로 있으면서 당시 영국의 대히틀러 유화정책을 지지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는 개인적으로도 커다란 모욕적 발언이었으나 케네디는 반발을 꾹 참고 봉쇄정책을 밀어붙인다.


또 22일 대국민연설 2시간 전인 오후 5시, 의회 지도자들과 가진 회의에서 풀브라이트 상원의원 등은 쿠바에 대한 침공을 요구했지만 이를 무시한다.

둘째, 엑스콤 구성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터키 배치 미국 미사일의 철수를 관철시킨다. 번디 안보보좌관 등 엑스콤 참가자들은 터키 배치 미사일을 철수할 경우 우방국들 사이에 미국의 안보공약에 대한 의심이 생겨 미국의 신뢰도가 저하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쿠바 배치 소련 미사일과 터키 배치 미국 미사일의 상호 철수라는 흐루쇼프의 공개 제안을 거부할 경우, 국제 여론에서 밀리는 것은 물론 흐루쇼프와의 협상이 결국 깨질 것으로 우려했다.

결국 케네디는 동생 로버트를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에 보내 쿠바 미사일 철수 이후 6개월 내에 터키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비밀협상을 성사시킴으로써 흐루쇼프의 양보를 받아냈다.


저자에 따르면, 위기가 끝난 뒤 케네디는 절친했던 갈브레이스 주인도 대사에게 “제가 얼마나 끔찍한 조언을 들었는지 모르실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아가 저자는 “엑스콤 테이프는 인류를 핵전쟁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어서 케네디 대통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만약 대응방안이 다수결에 따라 정해졌다면 전쟁이, 그것도 핵전쟁이 벌어졌을 것이 확실했다”고 평가한다.

결국 이 책은 위기의 13일 동안 케네디 대통령이 냉정함과 침착함, 그리고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핵전쟁의 위기를 평화롭게 해결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가는 ‘위기의 13일’에만 주목했을 때 가능할 뿐이지, 그 이전과 이후를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워싱턴 룰>(앤드루 바세비치 지음, 박인규 옮김,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
예컨대 미국의 역사학자 앤드루 바세비치는 <워싱턴 룰>(박인규 옮김, 오월의봄 펴냄)에서 미국은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도발이라고 규정한 반면, 자신들의 카스트로정권 전복 공작이 마찬가지로 소련에게도 받아들일 수 없는 도발이라는 점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즉 케네디 행정부가 벌인 몽구스작전이 쿠바 미사일 위기의 1차적 원인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쿠바 미사일이 발견된 10월 16일 이후 엑스콤에서는 소련의 조치가 미국에 대한 선제 핵공격 또는 베를린에서의 양보를 노린 것이라고 생각할 뿐, 미국의 대쿠바 공작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쿠바 불침공 약속을 요구한 26일의 흐루쇼프 전문이 도착한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요컨대 미국은 이란(1953년)이나 과테말라(1954년) 등에서 벌인 정부전복공작이 범죄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미국식 제도와 가치를 외국에 전파하는 것이 좋은 것이며 정당하다고 여전히 믿었던 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우발적 핵사고를 막기 위해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 핫라인을 설치한다. 또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6월 아메리칸 대학에서 ‘평화의 전략’이란 유명한 연설을 통해 소련과의 핵무기 경쟁을 중단하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8월에는 제한적 핵실험금지 조약이라는 구체적 성과를 얻어낸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 군사개입은 멈추지 않는다.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은 점차 강화되고 쿠바에 대한 제재와 압박도 풀리지 않는다. 전임 아이젠하워 정부 8년간 CIA의 대외 비밀공작은 170건이었던 반면, 3년이 안 되는 케네디행정부에서는 163건이나 시도된다. 결국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절반의 교훈만을 배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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