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가야지 이제는 너무 지쳐.”
밑지고 파는 거라는 장사꾼의 말, 시집 안 간다는 말과 젊은 여성의 말, 그리고 이젠 가야지라는 노인의 말이 3대 거짓말이라고 한다. 노인은 습관처럼 “죽어야지” 소리를 했다. 능청을 떨며 “에이 할머니, 여전히 정정하신데요”라고 했다. 노인은 빙긋 웃고는 “그래” 했다.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아니라 지금 제 앞에 앉은 젊은 아가씨라는 걸.
“내 청춘 돌려다오… 오늘도 눈물 쏟는 아리랑”
올해 아흔을 넘긴 배춘희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다. 배 할머니는 아홉 분의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위안부’ 피해 여성 쉼터 ‘나눔의 집’에 살고 있다. 1997년 이곳에 처음 왔으니, 이번은 나눔의 집에서 17번째 맞는 설이다.
28일 오후 두 시. 평소 같으면 점심을 먹고 방에서 쉴 시간이지만, 이날은 느긋하게 쉴 틈이 없었다. 명절을 앞두고 손님들이 몰려오는 탓이다. 고령의 할머니들은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거실로 나와 손님을 기다렸다. 거실 한쪽엔 선물꾸러미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화장지, 과일, 김 박스. 조억동 경기도 광주시장이 보낸 선물이라고 했다.
선물보다 늦게 도착한 조 시장과의 만남은 짧았다. 안부 인사 한두 마디, 두 번의 기념촬영이 끝나자 조 시장이 일어섰다. 할머니들은 “놀다 가라”고 성화였다. 배 할머니와 이옥선 할머니는 서로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조 시장은 “다음에 꼭 듣겠다”며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손님이 왔다 간 자리가 휑했다. 잠시 들떠 보였던 할머니들은 다시 입을 닫았다.
삼십여 분 후 다음 손님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손자 손녀 40여 명. 인근 지역 고등학교 봉사동아리 학생들이다. 의자에 앉은 할머니들 앞에 둘러앉아 질문세례를 퍼붓더니, 이젠 재롱잔치를 하겠다며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를 부른다. 잔뜩 부끄러워하며 노래하던 학생들이 맹랑하게 이젠 할머니들 차례라며 마이크를 넘긴다.
풍류에 일가견 있기로 소문난 배 할머니가 냉큼 마이크를 잡았다. 시장님 앞에서 노래를 못한 한을 풀 기회가 왔다. 배 할머니는 가사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했다.
“봉숭아꽃 꽃잎 따서 손톱 곱게 물들이던 내 어릴 적 열두 살 그 꿈은 어디 갔나. 내 어릴 적 열세 살 내 청춘은 어디 갔나. 내 나라 빼앗기고 이내 몸도 빼앗겼네. 타국만리 끌려가 밤낮없이 짓밟혔네. 오늘도 아리랑 눈물 쏟는 아리랑. 내 꿈을 돌려다오 내 청춘 돌려주오."
할머니의 아리랑은 구성지다 못해 구슬펐다. 이 노래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 ‘소녀 아리랑’이었다. 할머니가 노래를 불러준다기에 까르르 웃으며 신나하던 학생들은 어느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19살에 중국 만주로 끌려갔다는 배 할머니는 유독 ‘옛날 얘기’를 꺼렸다. 다른 할머니들은 매주 열리는 수요시위에서, 또 언론 인터뷰에서 끔찍한 그 시절에 대해 고발하고 일본 정부를 꾸짖는다. 그러나 배 할머니는 말수가 적은 것도 아니면서 옛일을 증언하기를 거부했다. 과거 참상을 또다시 떠올리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이런 일을 당했었다’며 속 시원히 말하는 대신, 늘 이렇게 노래를 하며 속을 풀곤 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도 노래뿐이다. 자식도, 손자 손녀도 없는 배 할머니는 명절에도 나눔의 집에 남아있을 예정이다.
“난 공부도 못 하고,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TV에서 나오는 노래 따라 부르다 보면 금세 시간이 가.”
“아흔 다 됐지만 엄마, 아빠 생각만 하면…”
“나도 어렸을 땐 독창도 잘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노래를 못해.”
강일출 할머니는 배 할머니를 옆에서 부러운 듯 쳐다봤다. “난 노래만 부르려고 하면 엄마, 아빠 생각이 나서 부를 수가 없거든. 목이 갈라지고 떨려서.”
열두 남매 중 막내딸이라 무척 여렸다던 강 할머니는 씩씩한 할머니가 됐다. 배 할머니가 나눔의 집 공식 가수라면, 강 할머니는 자타공인 공식 웅변가다.
“우리는 나라가 힘이 없어서 중국으로 끌려갔어. 중국에 부모님도, 친척도 없었어. 그런데 할 수 없이 끌려갔어. 그러다 2000년에 한국 정부에서 나를 찾아주고 생활을 다 책임진다고 해서 아들 둘 딸 하나 손자들을 데리고 한국 왔어. 나는 고향이 곶감 나고 대추 밤 많이 나는 경상북도 상주인데, 와서 보니 엄마 아빠도 죽고 오빠들도 다 죽었어. 그게 너무 슬프지만 가족들이 없어도 우리나라 정부가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학생들 세배를 받고 덕담 한마디 한다는 게 말이 조금 길어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빨려 들어갈 듯 강 할머니 얘기를 들었다.
“중국에 살면서 내가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었는지 몰라. 나라를 지키려면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해야 돼. 그럼 우리들처럼 이렇게 강제로 끌려가지 않을 거야. 일본놈들이 말야. 아베 (총리)도 보면, 지금도 배상도 안 하고 고개를 쳐들고 다니잖아. 이런 걸 안 보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 땅을 밟았지만, 강 할머니의 가족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중국에 함께 ‘공출’로 보내졌다가 나눔의 집에서 다시 만난 벗도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지난 2008년 돌아가신 고(故) 문필기 할머니 얘기다.
“길림성 장춘이라는 곳에 있는 위안소에 같이 있었어. 그 사람하고 나하고 거기서 ‘언제가 되면 우리가 고향에 가보갔나’ 이런 얘기를 했어. 그러다가 할매 돼서야 여기 왔는데, 그 사람은 죽었잖아. 가끔 생각나.”
"이제 몇 명 안 남았는데 저기선 헛소리만…"
강 할머니는 지난 26일 돌아가신 고(故) 황금자 할머니 얘기도 꺼냈다.
“그 사람이랑은 수요집회 가서 많이 봤지. 이렇게들 다들 가. 정말 몇 명 안 남았어.”
강 할머니와 배 할머니 모두 ‘위안부’ 할머니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다고 했다.
“우리도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지쳤어.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다들 빨리 죽어야지….”
할머니들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크고 작은 명절 선물들이 끊임 없이 배달됐다. “선물을 받으니 기분 좋으시겠다”고 했다. 배 할머니는 “고맙다”면서도 “죽을 때 다 되어서 선물 받아야 뭣해. 모아두기만 하지.”라고 말했다. 배 할머니는 선물들을 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방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할머니들이 받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아니, 받아야 할 게 있다. 바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이다.
“저기선(일본에선)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 어찌 될는지….”
강 할머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237명 가운데 이제 생존자는 단 55명. 이들은 앞으로 몇 번 더 있을지 모를 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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