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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 작가의 탐정, 비열한 거리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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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 작가의 탐정, 비열한 거리에 오다

[김용언의 '잠 도둑'] <대실 해밋 : 중국 여인들의 죽음 외 8편>

한국에서 미스터리소설을 읽는다는 건 늘 거꾸로 올라가는 작업이다. 현재 해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의 대표작이 먼저 소개되고, 그 다음 우후죽순으로 그의 예전 작품들이 여기저기서 번역되면서 일종의 '흩어진' 전집 컬렉션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작가가 인터뷰에서 롤 모델로 누군가를 언급했다든가, 그에 대한 해설에서 '사실 이 장르의 원류는…'이라는 식으로 계보도를 작성하고 나서야, 한참 뒤에 느릿느릿 성기게 그 예전의 원형이 한 조각씩 번역되어 등장한다. 물론 이렇게라도 접할 수 있는 게 어디냐 싶다가도, 그 시대 그 장소의 독자들처럼 연대기순으로 차근차근 읽으며 어떤 작가와 어떤 장르의 세계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과정을 현재진행형으로 목도할 수 없다는 것이 영 아쉽기만 하다.

▲ <대실 해밋 : 중국 여인들의 죽음 외 8편>(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 현대문학 펴냄). ⓒ현대문학
현대문학에서 새롭게 펴내고 있는 세계문학단편선에 포함된 <대실 해밋 : 중국 여인들의 죽음 외 8편>(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 현대문학 펴냄, 이하 <대실 해밋>으로 표기) 역시 대실 해밋의 초기작들이 가장 뒤늦게 찾아온 경우다. 국내에는 일찌감치 그의 장편 <붉은 수확>과 <몰타의 매>가 제멋대로 축약되고 왜곡된 버전으로 떠돌았고, 2012년 초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장편 전집(<붉은 수확><몰타의 매><데인 가의 저주><유리 열쇠><그림자 없는 남자>(김우열·구세희 옮김, 황금가지 펴냄))이 등장했으며, 2013년 말에 비로소 그의 초창기 단편 걸작들이 소개된 것이다.

<대실 해밋>에 수록된 9편의 단편, 즉 '배신의 거미줄(Zigzags of Treachery)'는 1923년에, '불탄 얼굴(The Scorched Face)'과 '중국 여인들의 죽음(Dead Yellow Women)'과 '쿠피냘 섬의 약탈(The Gutting of Couffignal)'는 1925년에, '크게 한탕(The Big Knockover)'과 '피 묻은 보상금 106,000달러($106,000 Blood Money)'와 '메인의 죽음(The Main Death)'은 1927년에, '국왕 놀음(This King Business)'은 1928년에, '파리 잡는 끈끈이(Fly Paper)'는 1929년에 쓰였다.

작가로서 대실 해밋의 전성기는 짧았다. 그는 이미 1930년대 중반부터 장편은 고사하고 단편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해밋의 이후 삶은 제2차 세계대전과 폐결핵과 술과 여자와 매카시즘 광풍(대실 해밋은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다)으로만 채워졌다. 그의 최고 정점은 1920년대 후반, 즉 <붉은 수확><데인 가의 저주><몰타의 매>를 차례로 탈고했던 1928년과 <유리 열쇠>를 집필하기 시작한 1929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실 해밋>에 포함된 단편들은 그가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다듬으며 당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로 단숨에 끌어올리던 절정의 시기에 연쇄적으로 터져 나온 걸작들이다.

콘티넨털 OP라는 익명의 탐정은 1923년 대실 해밋의 단편 '방화 그리고(Arson Plus)'에 처음 선보인 이래, 스물여덟 편의 단편소설과 두 편의 장편소설(<붉은 수확><데인 가의 저주>)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언제나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에서, 콘티넨털 OP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사십이 다 되어 가는 중년에 10킬로그램이나 과체중"('크게 한탕')이며 정확하게는 "85킬로그램"이고 거구의 범인에게 "비켜, 난쟁이"('파리 잡는 끈끈이') 소리나 듣는 작고 뚱뚱한 중년의 남성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탐정으로서 능력도 뛰어나고 직업 윤리의식도 나름대로 투철하다. 이를테면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에서 탐정 샘 스페이드가 모종의 결탁을 제안하는 악당에게 탐정으로서의 임무를 유기하지 않을 것임을 과시하는 일장 연설을 콘티넨털 OP가 선취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먼저 샘 스페이드의 말을 들어 보자.

▲ <몰타의 매>(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준비를 다 마치고 있다가 심판의 날이 오면 경찰 본부로 들이닥쳐 희생양을 들이밀고 소리치는 거요. '자, 이 얼간이들아, 이자가 범인이야.' 그렇게만 되면 육법전서를 다 가지고 나와서 온갖 법률을 들이대도 코웃음 쳐줄 수 있소. 하지만 실패하는 순간 나는 끝장이오. 아직은 그런 적 없었소.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을 거요. (…) 이 일은 내가 전문가요. 여긴 내 도시고 이건 내 문제요."(<몰타의 매>)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에서 살아가고 생계를 이어야 하는, 경찰과 언론과 정치인들의 등쌀 사이에서 탐정이라는 특수한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교묘하게 경계선 위를 줄타기해야 하는 원칙과 임무가 있다. 제아무리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탐정이란 족속을 "주머니에 속임수용 카드를 넣고 다니거나 종종 거짓 증언을 일삼으며 결백한 사람을 감옥에 처넣지 않은 날은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배신 전문가"('배신의 거미줄')로 터부시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완수했다는 자부심을 은밀히 유지하며 오늘도 비열한 거리를 걸어 다닌다. 이곳은 20세기 미국 대도시, 자본주의의 심장이다. 그런 자기만족으로 버티지 않는다면 어떻게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콘티넨털 OP는 악당 앞의 샘 스페이드처럼, 자신을 돈으로 회유하려는 범인에게 단호한 거부의 뜻을 밝힌다.

"월급은 꽤 괜찮은 편이지만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찾을 수도 있겠죠. 한 달에 100달러만 더 번다고 해도 1년이면 1,200달러에 이릅니다. 지금부터 예순 살 생일까지 햇수를 계산해 보면 2만 5천 내지 3만 달러죠. 그런데 지금 나는 탐정이라서 좋고 일이 좋아서 그 2만 5천 내지 3만 달러를 퇴짜 놓는 사람이에요. 일을 좋아하게 되면 가능한 한 그 일을 잘하고 싶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요. (…) 지난 18년간 나는 사기꾼들을 뒤쫓고 수수께끼를 풀면서 재미를 느껴 왔고, 또 사기꾼들을 잡아들이고 사건을 해결하면서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그건 내가 잘 아는 유일한 스포츠고, 그런 삶을 20년쯤 더 하게 될 미래보다 더 유쾌한 삶은 상상이 되질 않아요. 난 내 미래를 망치지 않을 겁니다!"('쿠피냘 섬의 약탈')

여러 비평가들은 하드보일드 소설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흥청망청 가장된 평안과 쾌락에 젖어드는 상류층을 혐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육체로 돈을 버는 평범한 '남성' 노동자들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하드보일드의 원류인 대실 해밋의 콘티넨털 OP 역시, 더러운 돈에 매수되지 않고 일단 나 자신이 떳떳할 수 있는 노동으로 정직하게 일한다는 자기만족을 선택한다.

심지어 거기에는 여성의 육체 공세도 끼어들 틈이 없다. 팜 파탈 브리지드 오쇼네시가 샘 스페이드에게 "날 사랑했잖아요!"라며 목숨을 구걸할 때, "누가 누굴 사랑하든 상관없어. 난 당신의 봉이 되지 않아. (…) 이젠 도와줄 수 없어. 할 수 있더라도 하지 않을 거야"라며 단호하게 거절하던 <몰타의 매>의 충격적인 결말을 떠올려 보라. 콘티넨털 OP 역시 '여성' 범인의 유혹 앞에 "또 그 수법이었다. 여자들이 대체 어디서 그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며 불쾌감을 드러낸다.

"나는 남자고 당신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틀린 생각이에요. 나는 범죄자를 쫓는 사람이고 당신은 내 앞에서 달아나고 있던 존재죠. 그 상황에 인간이 낄 곳은 없습니다. 여우를 쫓던 사냥개가 사냥감을 덮치기 전에 이리저리 몰아대며 갖고 노는 것이나 마찬가지랄까요."

그리고는, 여자의 종아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난 장애인한테서도 목발을 훔쳤던 사람 아니던가?"('쿠피냘 섬의 약탈')

▲ 소설가 대실 해밋. ⓒ출처 Wikimedia Commons
또한 콘티넨털 OP는 "생각을 방해"하는 "웅변을 싫어한다." 여성적 특질이라 치부되는 감정의 과잉은 일처리에 있어 방해가 되거나 명료한 눈을 멀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다. "일은 그냥 일로 대하는 게 좋다."('배신의 거미줄')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콘티넨털 OP를 비롯한 초기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과도하리만치 여성을 혐오하는 시선을 드러낸 이유일 것이다. 콘티넨털 OP는 자신만큼이나 두뇌 회전이 빠르고 상황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춘 여성 로메인에게는 기꺼이 감탄과 애정이 섞인 찬사를 바치고('국왕 놀음'), 자신을 아버지-연인으로서 대하는 연약한 가브리엘 데인에게도 연민과 신뢰를 보여주며 그녀를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다(<데인 가의 저주>).

하지만 결국 가브리엘에게조차 "난 솔직히 오후 내내 당신 말을 믿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괴물을 봤어요. 착한 괴물. 곤경에 빠졌을 때 가까이 두면 특별히 좋은 괴물. 그래도 괴물은 매한가지죠. 사랑 같은 어리석은 인간의 감정 같은 것이라고는 없는 괴물"이라는 말을 듣는다. 가브리엘의 시선은 정확했다. 콘티넨털 OP는 남성(적) 동료들과의 우정의 연대 안에서만 진정으로 속내를 터놓을 뿐, 여성(적 특질)과의 감성적 교류를 맞닥뜨릴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꺾어버릴 무언가로 여기고 경계하며 대립각을 세운다.

대실 해밋의 단편들이 이후 그를 열렬히 흠모했던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원천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대실 해밋>을 읽다 보니 불현듯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의 형사들도 연상된다. 예외적인 개인이 아닌 집단적 능력의 총체를 활용하는 법체제의 원형을 희미하게나마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의 다른 탐정들도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꽤 명확한 외모와 개성을 부여받으면서, 유능하고 터프한 콘티넨털 OP의 불완전한 지점을 채워나가는 재미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 <조각맞추기>(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 ⓒ피니스아프리카에
이를테면 '미행의 명수'로 불리는 동료 딕 폴리 같은 경우 1923년 작 '불탄 얼굴'에선 다소 수다스럽고 코믹한 인물로 그려진다. 콘티넨털 OP가 문제의 저택으로 들어가며 "자네는 밖에서 기다려야 할 거야. 도주로를 지키고 있어야 해"라고 딕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저도 낄 수 있겠다 싶은 재미있는 일만 생기면 꼭 저를 길모퉁이에 세워 놓더라고요!"라고 아우성을 친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보기 드물게 과묵한 인물로 거듭난다. 4년 뒤 '크게 한탕'에선 '불탄 얼굴'과 전혀 다른 특징이 분명하게 부여된다.

까무잡잡하고 왜소한 캐나다인으로 굽 높은 신발을 신고도 신장이 150센티미터 정도였고 체중은 45킬로그램도 채 나가지 않았다. 말은 스코틀랜드인이 보낸 전보처럼 짧게 했지만, 금문교부터 홍콩까지 소금물 한 방울에 대한 미행을 부탁하더라도 한순간도 놓치는 일 없이 성공을 거둘 사람이었다. (…) "영리한 여자고 미행이 붙을 거란 것도 짐작할 테니까 식은 죽 먹기는 아닐 거야.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 딕의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더니 드물게 보는 그의 장광설이 터져 나왔다. "어려워 보이는 상대일수록 더 쉬운 법이죠." ('크게 한탕')

또 다른 젊은 동료 잭 커니핸 역시 독특한 인물이다. 백만장자의 망나니 아들로 태어나 집에서 쫓겨난 뒤 먹고 살기 위해 탐정 사무소로 흘러든 잭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보기 드물게 잘생겼다. (사실 탐정으로선 부적합한 외모다) 잘해보려는 욕심이 앞서지만 번번이 그 욕심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며 실수를 연발한다. '영감님'이라 불리는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의 보스는 경력 50년의 세월을 거치며 "명석한 두뇌와 함께 상황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똑같이 부드러운 말투와 온화한 미소로 대하는 가면 같은 정중함"을 갖춘, "사형집행인의 밧줄보다도 더 온기가 없는 인물"이며 "8월에도 고드름을 뱉어 낼 수 있"는 "본디오 빌라도"로 묘사된다.('불탄 얼굴', '크게 한탕') "큰 바위 같은 사람"으로 묘사되는 앤디 매켈로이는 "계산기 이상의 상상력은 동원할 줄 모르는 침울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글을 읽을 수 있는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키면 오로지 그 일만 할 뿐 다른 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건 자신할 수 있었다."('피 묻은 보상금 106,000달러')

처음엔 사건 발생-사건 해결의 일차적 구조, 터프하고 감정 없이 사건을 처리하는 사립탐정의 활약으로만 이뤄지던 콘티넨털 OP 시리즈는 불과 몇 년 동안에 여럿 인상적인 결절점을 맞이한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도시 '포이즌빌'에서 진저리를 낸 바 있는 콘티넨털 OP(<붉은 수확>)는 이미 '불탄 얼굴'에서 "지난 1년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을 했거나 살해당했거나 실종된 부녀자들"에 관한 서류 분량이 "상공회의소를 난감하게 할 만한 규모"이며 "두께가 전화번호부 책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한다.

▲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차이나타운>(1974). ⓒParamount Pictures

혹은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차이나타운>이 분명히 참조했을 법한 단편 '중국 여인들의 죽음'에서, 콘티넨털 OP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집이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온갖 꺾어지는 복도와 옷장 뒤에 숨겨진 비밀 문과 전혀 구분할 수 없이 생긴 밀실들 속에서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른다. 아름다운 도시 샌프란시스코의 내부는 썩어 들어가는 사과처럼 부패의 그물망이 정교하게 자리잡은 미로다. 콘티넨털 OP는 자꾸만 그 안에서 길을 잃는 자신에게 당황한다.

"저는 이제 차이나타운에 들어가 볼 작정입니다. 저한테서 2, 3일간 연락이 없으면 거리 청소부한테 쓰레기 더미를 잘 살펴봐 달라고 해주시겠어요?"

그리고 자기 자신만큼이나 직업윤리를 소중히 여기는 도둑 앤젤 카디건이 "변절할 순 없어요. 난 못 해요, 그건 확실해요. 만약에 당신이 총잡이였다면…아무튼 내가 도움을 청할 사람은 우리 편이어야 해요"('크게 한탕')라고 다짐할 때 조롱하고 모욕하던 콘티넨털 OP는, 마침내 그 후속편격인 '피 묻은 보상금 106,000달러'에서 범죄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일망타진한다. 뒷맛은 전혀 개운치 않다. 전국의 범죄자들을 배후 조종하던 거물 파파도풀로스를 죽인 다음, 그는 "맞아. 난 또 다른 파파도풀로스인 셈이지"라고 인정하는 데 이른다. 뛰어난 탐정이, 뛰어난 범죄자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콘티넨털 OP는 믿었던 동료들 사이에도 탐욕과 죄악의 기세가 손쉽게 침투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처음으로 "지치고 진이 빠진 기분"을 느낀다. 그는 평생 악을 추적하고 그 악의 세력을 가로막는 직업에 투신했고 그것이 옳고 즐거운 소명이라 생각했지만,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 여겼던 동료들에게 손을 뻗친 악의 편재성 앞에선 무기력해진다. 그것은 선한 자들을 사악하게 물들이는 사회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순진한 연대의식과 신뢰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다.

결국 범죄자가 되어버린 동료를 살인하는 행위는 귀신들림을 쫓아내는 엑소시즘이 아니라,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려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회의와 자기성찰의 끝없는 회귀를 깨닫는 고통스런 결절점이기도 하다. 대실 해밋은 하드보일드의 초창기에 이미 탐정의 실존적 고뇌를 예언한 셈이다. 그는 시리즈 내내 유머 감각을 잃지 않지만, (이 단편집을 읽다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웃음을 터뜨린 적이 수없이 많다) 그 유머는 순진하지 않다. 예언자의 삶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 헌신한 사람만이 불안한 웃음을 커다랗게 터뜨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0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격주로 연재되었던 장르소설 서평 '김용언의 잠도둑'은 이번 글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곧 더욱 흥미진진한 장르소설 서평 연재물이 새롭게 시작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잠도둑'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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