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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지우는 남자

'삼성 직업병' ② 이윤정 씨 남편 정희수 씨의 하루

'삼성 백혈병'으로 상징되는 산업 재해 피해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끝내 산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등진 희생자의 유가족은 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들의 일상을 따라가기로 한 것은 이 문제가 지금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매듭을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이 다르지 않은 고통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경고음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8년째 투병 중인 한혜경 씨와 그의 어머니 김시녀 씨, 작년 5월 세상을 떠난 이윤정 씨의 남편 정희수 씨를 만났다. 이들의 평범한 하루를 기록했다. <편집자>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의 한 정육점. 정희수 씨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 큼지막한 화면에 가족 사진을 띄웠는데 넘겨도 넘겨도 사진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가족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아내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고, 아이들은 부산에 내려보냈다. 혼자 사는 가장에게 사진은 큰 재산이었다. 사진을 넘기며 그가 살아온 얘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아내와 첫 만남, 그리고 이별

희수 씨가 아내를 만난 것은 2002년 크리스마스였다. 부산에서 막 서울에 올라온 그는 차를 몰고 천안까지 내려가 윤정 씨를 만났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윤정 씨는 4촌 누나의 회사 동료였다. 셋째 딸이라서 그런지 착해 보였다. 1년 반의 연애 끝에 2004년 5월 대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변변한 신혼집을 구하지 못해 상가 2층에 작은 방을 마련해 살았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조금씩 집을 늘려가면서 행복도 커졌다. 아들딸 하나씩을 뒀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2010년 5월 5일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급히 응급실로 옮겼다. 머리 사진을 찍자마자 중환자실로 옮겨야 했다. 교모세포종, 뇌암이었다. 병원은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병세가 깊어졌다. 말수가 적어지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간병을 하면서 가게에는 신경 쓸 수 없었다. 처남이 도와줬지만 고기 장사는 단골 장사라서 주인이 자리 비우면 매출은 줄게 마련이었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다. 보험금이 실비보다 적게 나왔다. 결국 벌어 놓은 돈을 까먹기 시작했다.

희수 씨는 좋다는 것은 모두 해 먹였다. 주위에서 가망이 없다며 말렸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병을 알고부터 2012년 5월 7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내는 딱 2년을 살았다.

삼성과 맺은 악연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쓰던 유독물질 때문이었다. 이윤정 씨는 1997년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 6년을 일했다. 반도체 칩이 꽂힌 기판을 챔버에 넣고 빼며 불량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2003년 퇴사하고 7년이나 지났는데 뇌암이 발병했다. 2010년 7월 산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2011년 4월 행정소송을 걸었다. 재판은 지지부진했다. 올해 2월 22일 7차 공판이 열렸지만 공판만 거듭될 뿐 아직 1심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그 사이 윤정 씨는 세상을 등졌다.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아내를 잃은 남자의 삶은 온전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부산 큰누님 집으로 보냈다. 가게에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데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카들이 커서 그나마 가능했다. 그는 혼자가 됐다. 억울한 마음에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앞 시위에 100번도 넘게 갔다. 갈 때마다 경호원들이 막았다. 울분이 치밀어 싸웠다. 그는 투쟁이니 민주화니 노동운동이니 그런 건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파탄 난 가정의 가장'이어서 그곳에 갔다고 했다.

황유미 씨가 죽은 지 6년 되던 날 희수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 갔다. 공장을 나오는 꽃다운 얼굴들이 보였다. 나오는 얼굴마다 밝지 않았다. 불쌍하고 마음이 안 좋았다. 살아서 윤정 씨의 표정이 그랬으리라.

혼자 남겨진 남자

희수 씨는 부천에서 10년을 살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방학동에 잠깐 살다 이곳에 이사와 정착했다. 장사를 시작한 것도, 결혼해 아내와 집을 늘려가며 자리를 잡은 것도 이곳이었다. 아이들도 여기서 키웠다. 그런데 여기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고향에 내려갈까 생각도 많이 했지만 떠나기는 또 쉽지 않았다.

오늘은 옆집 과일가게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마음 넓은 주인 아주머니가 불고기와 미역국을 끓였다. 혼자 지내다보면 끼니를 잘 챙겨먹지 않는다. 아침은 거를 때가 많고 점심은 사먹거나 가게에서 라면으로 대충 때운다. 그래서 이웃이 신경 써줄 때가 더없이 고맙다.

과일 가게에 들어섰다. 강아지 사랑이가 뜨끈한 앉을 자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 앉아 희수 씨는 전화를 건다. 부산에 있는 아이들이다. 뭘 잘못했는지 일곱 살 딸이 고모한테 혼나고 울고 있다.

"아빠~~~."

"고모한테 혼났어? 괜찮아."

"아빠 보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어."

"아빠 언제 와?"

"4월에 갈게."

"4월 언제? 6일?"

"글쎄 15일쯤? 그때 상황 봐서 갈게. 비행기 타고 숑 갈게 기다려."

"아빠 빨리 와~~~. 보고 싶어~~~."

아이가 서럽게 운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고개 숙인 희수 씨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는데......(한숨) 아이들 울고, 아빠 보고 싶다 하는데 그런 마음 누가 알겠어요. 애들은 무슨 죄라고…."

희수 씨는 사별 후 상당한 우울감을 겪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지금도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부산에는 두 달에 한 번 갈까 말까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가족 사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죠.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 않나요?"

귀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휑한 집에 잘 들어가지 못했다. 집에 들어섰다. 아이들 사진은 있는데 윤정 씨의 사진이 없다.

"처음엔 그냥 뒀는데 보면 자꾸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지금은 뗐어요"

그는 혼자 있을 때 아내 사진을 보기가 어려웠다고 말한다. 추억을 조금씩 지워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희수 씨는 이 집에 살기 어려워 4월에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희수 씨가 방 안에 들어가 아내의 유품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 공부했던 노트가 몇 권 보였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대신 공장으로 가서 언니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착한 아내는 늘 언젠가는 대학에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내의 유언도 자식들 공부시켜서 대학에 꼭 보내라는 것이었다. 공부 못해 대학 안 가고 공장 가면 싫다고. 윤정 씨는 결국 대학 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그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아픔을 지우기 위해 추억을 지워간다던 남자. 그는 그것을 지울 수 있을까? 돌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천천히 유품 상자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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