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임창순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신영복 깊이 읽기’ 모임에서였다. 대학원에서 신영복 한글 서예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신영복의 삶과 정신을 더 깊이 배우고자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미나 형식의 연속 강좌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세미나의 한 강좌가 지곡서당에서 있었다.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로부터 근현대사 관련 강의를 듣는 자리였다. 바로 지곡서당이 임창순이 세운 한문학연구소였던 것. 지곡서당은 임창순이 지곡정사를 세우고 후학들을 키우기 위해 열었던 현대식 서당의 명칭이라고 했다.
옥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교사가 된 이후에 옥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으면서도 임창순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던 나에게 그 이름은 그렇게 낯설게 다가왔다. 한학자이자 교수였으며 민족의 분단을 가슴아파했던 사람, 한학 속에 민족문화의 맥이 숨어 있음을 생각하고 그 맥이 끊길 것을 염려하여 전재산을 바쳐 고전 연구소를 세우고 후학을 길러내는데 헌신했던 사람.
금석학 대가인 한국 서예계 권위자
신영복 깊이읽기 모임에서의 만남 이후에 그의 이름은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내 관심의 대상으로 될 만한 계기는 없었다. 뉴스를 통해 다시 임창순의 이름을 접한 것은 2008년 바로 신영복 교수가 3회 임창순 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묘한 인연이 닿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말 묘한 인연은 이번 글을 쓰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려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바로 그분은 깃발 글씨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깃발글씨의 대중화를 이룩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내 주변의 지인들도 나의 이런 활동을 격려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임창순은 바로 4·19 혁명의 분수령으로 평가되는 교수단 데모 행진의 플래카드 붓글씨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를 쓴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붓글씨를 배우고 그 현실적 쓰임새를 고민하고 있던 중 보은 동학제가 처음 열렸는데, 이때 내가 천에 붓글씨를 써서 만든 깃발을 들판에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이후 집회와 행사에 나의 깃발 글씨를 요청하여 지금까지도 틈틈이 그 활동을 해오고 있다.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금석학의 대가였다. 서예인들에게 금석학은 몰라도 금석학의 기본인 비석 탁본 글씨를 임서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서예인들이 붓글씨를 익히는 과정에서 배우는 한자의 경우 석고문을 비롯한 상당량이 금석문의 탁본들이고 최근에는 광개토대왕비문을 임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1975년에 동화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미술 전집'의 15권 중 11권째 <서예>편이 임창순의 책임편집이었을 정도로 임창순은 한국 서예계의 권위자였다. 그 책은 지금도 중고 서적상에서 계속 거래가 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책이다. 서예가로서 <한국현대서예사(韓國現代書藝史)>(1981)를 내고 1998년 경복궁 흥례문을 상량문을 직접 쓰기도 했으니 내가 기꺼이 그의 삶을 배울만하지 않은가 싶다.
깃발 글씨 선구자와 통한 묘한 인연
갑작스레 임창순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으로 받고 자료를 찾던 중 임창순이 집회용 붓글씨를 쓴 사람이라는 사실에 고무된 나는 들뜬 기분으로 임창순 생가를 찾아갔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옥천 읍내에서 40㎞ 가까이 되는 거리, 지금도 오지라면 오지랄 수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최근에는 청산면에서 팔음산을 넘는 길이 뚫려 차를 타고 산을 넘을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경상북도 상주군 화동으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북서면에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옥천 지리를 잘 아는 조만희 선생님과 동행하였다. 임창순이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해하던 차라서 기꺼이 함께 가 주셨다. 복우실 가기 직전의 법화리 숫골에 사는 길가집에서 복우실과 임창순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길을 안내해주면서 김용선씨가 그 마을에 대해서 잘 알거라고 하신다.
복우실 마을에 도착해 김용선씨를 찾았다. 팔순이 넘은(83세) 분이셨는데 마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다. 지금도 일간 신문을 보신다고 했다. 물론 그분은 직접 임창순과 만났거나 친인척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머리가 좋기로 소문이 나있어서 그런지 임창순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
임창순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말은 ‘총명하고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이었다. 책을 한번 보면 다시 볼 필요가 없이 다 외워버릴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임창순 일가는 그 마을의 뿌리깊은 토박이는 아니었으며 그 후손들도 없었고 아무런 유적도 남아있지 않다.
임창순의 생가였던 자리는 어느 할머니 한분이 조립식 주택을 지어 살고 계셨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쌓여 그리 큰 마을이 들어설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을 앞쪽으로 펼쳐진 들판은 자그마한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 만한 곳이었다.
당대 최고의 한학자, 통일을 갈망했던 진보적 지식인 임창순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지만 그가 뛰어놀았을 마을 골목길을 걸으며 잠시 그의 삶을 더듬어 보았다. 민주주의라는 시대 가치를 소중하게 받들던 인물의 마을을 돌아보는 것은 지금 그렇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느끼는 나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군사 독재의 시대를 마감하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1차 단계인 대통령 직선제를 국민의 힘으로 쟁취한 87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점차 민주주의가 자리잡아가는 듯하더니 이명박을 거쳐 다시 극단적 우파 회귀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행태를 생각해볼 때 임창순이 걸어간 길은 아직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창순이 맞서 싸웠던 반민주 세력의 힘이 다시 부활하는 듯한 요즘, 임창순이 추구했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그가 갈망했던 통일 또한 요원하다고 느껴지는 상황이니 어찌 임창순의 삶과 정신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명문화재단 기념사업 임창순상 제정
나는 그의 한학의 깊이와 경지를 더듬어 볼만한 지식과 역량이 없다. 그가 길러낸 후학들이 있어 그의 흔적을 인터넷에서 찾아내는 데는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우선 그의 호를 딴 재단법인 청명문화재단 홈페이지(http://www.chungmyung.org/)가 있어 그의 삶을 살펴볼 수 있고 그의 정신이 지금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의 이력에는 시대와 끊임없이 마찰하는 부분이 있다.
1946년, 대구 사범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친일파 학장과의 대립으로 사직. 1960년, 4·25 교수 데모 때 이승만 대통령하야를 강력히 주장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씀. 1962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서의 통일 운동 때문에 중부경찰서에서 구류 당함. 군사정권에 의해 성균관대 교수직에서 쫓겨남.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 되어 옥고를 치름.
이 이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민주주와 통일의 가치를 꼭 잡고 놓지 않았던 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의 일관된 길이다. 개인의 안위에 눌러 앉은 소시민이 아닌 올곧게 사회적 문제에 맞서고자 했던 한 인간의 결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46년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임창순이 친일파 학장과의 대립으로 직장을 떠나는 일은 그의 사회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해방 후 우리는 친일파를 정리하지 못함으로써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 혼란의 핵심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임창순의 행동은 그가 어떤 포즈로 우리 시대와 민족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군사정권 반대 인혁당 1차 사건 피해
인민혁명당 사건은 2005년에 재심결과 무죄로 판결된 바 있다. 637억여 원, 시국사건 최대의 국가 배상액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며 박정희 정권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사법사건이었음이 사건 이후 반세기가 되어서야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2차 사건에서는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어 세계적 반향을 일으키는 충격을 주었다.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가해진 시대의 억압이 어떠했는지 다시 되새겨보게 된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극단으로 엇갈리는 이유는 박정희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고 그 이면에 고통스런 피해자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너무나 많고 그 상처는 아직 현재형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1995년 MBC는 사법제도 1백주년을 기념하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때 판사 315명을 대상으로 한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고 응답한 사건이 바로 인혁당 사건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임창순은 1차 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으로 끝났지만 2차 인혁당 사건에 의해 8명의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은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한 바 있다.
네 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 할아버지라는 분의 말씀이 재미있다. 학교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다니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한 것도 작용했다고 하는데 일제가 세운 신식학교라는 새로운 문명을 대하는 촌로의 자세로서는 만만치 않은 결기가 보인다.
임창순이 가진 올곧음과 결기가 이 할아버지의 정신세계나 가치관과 전혀 무관치는 않았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적지 않은 양반 지식인들이 신식학교에 대해 그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500년 이어온 조선 성리학적 틀로 바라본 서양의 문명과 그 교육체계가 모두에게 마음에 들기야 했겠는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입되기 시작해서 지금처럼 완전히 서양식 학제와 서양 문명을 배우는 체제가 되기까지 아무런 거슬림과 저항이 없었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일 것이다.
국내 문화재단 첫 번째 설립 후학양성
그러나 그러한 살벌한 시대에 자기 정신을 가지고 꼿꼿하게 산 것만을 이야기한다면 임창순의 삶이 좀 삭막하지 않을까. 이러한 정신의 뼈에 또 다른 열매와 잎새를 가지고 있기에 그의 삶은 풍성하다.
그는 막노동자로 또는 광주리 장사를 하거나 화투를 만들어 팔았을 정도로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 사람이면서도 민족에 대한 애정과 학문에 대한 열정의 놓지 않았다. 이점이 우리를 감동케 한다. 그는 한문학을 우리 민족의 보배로운 자산으로 삼고 이를 이어가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교수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는 평생 우리 고전을 연구하는 데 매진했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바쳐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후학을 길러냈다. 태동고전연구소가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나라 문화재단 1호라는 기록까지 가지고 있다.
그는 1971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되고 문화재 연구 활동을 한다. 그는 민족의 역사를 밝혀내는데 금석학을 활용해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다. 전국 각지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 등 금석문을 해석 판독하여 ‘한국 금석집성(韓國 金石集成)'(1984)을 펴냈으며 특히 단양 적성비를 판독하여 삼국시대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 자료를 제공한다. 몇 번의 문화재위원장을 연임하고, 82세인 1995년에도 역시 문화재위원장을 맡은 것을 보면 그가 우리 것에 대한 열정과 애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14살 때부터 보은의 성리학자 겸산(兼山) 홍치유(洪致裕)에게 6년간의 서당 공부를 한 것이 정규 교육과정의 전부였음에도 당대 최고의 한학자가 된 것은 그의 타고난 역량과 끈기에 의한 것인 듯하다. 해방 공간에 독학으로 중등 교원 자격증을 따고 전쟁 중에 동양한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1954년에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한 것은 가문이나 사회적 배경과 학맥 인맥 없이 한 개인이 이룩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담배 예절 거부한 신식 지식인 면모
임창순은 태동고전연구소를 통하여 5000명이 넘는 제자를 길러냈으며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해도 4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내가 대학에서 책을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국문학계의 조동일 교수와 충북대 유초하 교수가 있다. 유초하 교수는 내가 처음 깃발 글씨를 선보였던 보은 동학행사에서 오셔서 격려해주시고 그 후로도 시민단체 활동 등에서 종종 만나곤 한다.
청명재단은 해마다 민족문화의 체계적 해명 또는 창의적 계발에 기여한 학문적-문화적 연구자,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민주적-평화적 발전에 공헌한 사회정치적 실천가들의 업적을 기리는 임창순 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첫 회에는 재야 사학계의 거물 이이화가 수상했다. 임창순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 곁에 있다 하겠다.
이번 기회에 그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재미있는 그의 말과 그에 대한 평가들이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다. 격동의 60년대 이후 뿌리를 바로 알아야 역사와 현실에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 청명이란 한 인물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모여 지둔리 골짜기에서 벌인 일은 외래 바람으로 척박해진 우리 지성계를 갈아엎고 민족과 현실의 건강하게 하는 문화의 뿌리찾기 작업이었다.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에 대한 <중앙일보> 고규홍 기자의 글이다.
“담배 피우나? 자, 이것 피우게. 고작 기호품 때문에 계속 불편해하지 말고…”
태동고전연구소 1기 장학생인 성태용 교수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고작 기호품 때문에’라는 말에 무릎을 치게 된다. 임창순은 당시(唐詩)를 번역해 출간하기도 하는데 그 책에 대한 서평에 이런 말도 있었다.
‘우리 시대 한문학의 대가인 임창순 선생의 평생의 학문이 온축되어 있는 듯하다. 그만큼 이 책은 완벽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번역서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오역일 터인데 임창순 선생의 번역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송재소 교수의 평이다. 나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그렇군.’
충북인뉴스=프레시안 교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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