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덕진공원에 가면 '법조 삼성'이라는 이름으로 세 사람의 동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한 분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 한 분은 서울고등법원장을 역임한 바오로 김홍섭 선생, 또 한 분은 서울고검장을 지낸 화강 최대교 선생.
얼마 전 50주기 추모식이 열렸던 김병로 선생은 강직하고 청빈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김홍섭 선생도 평생을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자신이 사형 선고를 내린 사형수의 대부가 되고 유가족을 돌봤던 '법정의 사도'로 존경을 받았다. 최대교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기 서울 지검장 재직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비리 혐의로 기소하는 등 대쪽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들 모두 전북 출신이어서 덕진공원에 '삼성'으로 모셔져 있지만, 만약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사성'을 꼽는다면 제2대 검찰총장을 지낸 충남 부여 출신의 심전 김익진 선생을 추가할 수 있겠다. 김익진 선생에 대해서는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문준영 교수의 논문에 잘 소개돼 있어 논문(헌정 초기의 정치와 사법 -제2대 검찰총장 김익진의 삶과 "검찰독립" 문제)의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정권의 시녀'이기를 거부한 검찰총장
1896년 태어난 그는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25세에 조선총독부 판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해 평양지방법원, 공주지방법원, 함흥지방법원 등에서 7년 동안 판사로 일했다. 그런데 일제 치하에서의 판사 일이 녹록치는 않았던 모양. 1920년 공주지법 강경지청 판사로 근무할 때는 판사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순사가 노골적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자 그 순사를 법정모독으로 법정에서 구속시켜버렸다고 한다.
결국 1927년 판사를 그만 두고 평양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조선 사람으로 이민족 통치 밑에서 오랫동안 무사하게 판사 노릇을 한 것이 부끄럽다. 애국자들은 처자식을 버리고 외국에 나가 독립운동을 하는 판에 나는 그동안 일본의 녹을 먹으며 호의호식했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는 평양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연루된 수양동우회 사건 등의 변론 등을 맡으며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됐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김익진은 조만식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해 조선민주당 초대 총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 군정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돼 7개월 간 옥고를 치르는 등 우파 세력 탄압이 벌어지자 1948년 월남을 한다.
그해 11월 대법관에 임명이 돼 다시 판사 활동을 하다 1949년 6월 6일 검찰총장에 임명됐다. 당시 검찰은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서울지검 검사장이었던 최대교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기소해 정권의 압력이 극심한 상황이었고,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수사권을 두고 군헌병대과 검찰이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정권에서는 김익진을 '자기 편'으로 생각해 검찰 통제에 용이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평양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을 받았기에 '대통령의 뜻'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익진 총장은 '정권의 시녀'로 남지 않았다. 당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이라고 있었다. 정치브로커 일당이 "공산당 게릴라들이 경무대(현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흘려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사설 수사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공산당 인사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문과 조작을 일삼았다.
그러나 김익진 총장은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검찰은 이 사건에 관여하지 말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채 수사를 지시했다. 대검 차장 검사가 수사를 지휘해 1950년 4월 대한정치공작대 일당 108명을 검거하고, 5월 대한정치공작대 대장 김태수 등 11명을 기소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기소하지 말라"고 친서를 보냈으나 김 총장은 검사들이 소신껏 기소장을 작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친서를 검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에게 "현행법상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하다"고 회답을 했다. 더군다나 김 총장은 수사를 정치공작대 뒤를 봐주던 것으로 의심되던 치안국장, 내무부장관 등 배후 권력층까지 확대시켰고, 이승만 대통령이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익진 총장은 대통령에게만 미운털이 박힌 게 아니었다. 한 번은 전남도경국장이 수뢰 혐의로 대검에 구속됐는데, 국회의원들이 찾아와 "전남도경국장은 공산당을 잡는 맹장이니 풀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전남도경국장이 몇몇 국회의원들의 뒤를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진 총장은 "구속사유가 있어 구속한 거니 국회의원들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면서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고 한다.
또한 국회의 검찰 국정감사 때 국회의원들이 수사 중인 사건기록과 기소·불기소 관련 기록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자 "검찰 사무에 관한 자료는 내줄 수 있지만 사법에 관한 비밀 기록은 법정에만 제출할 수 있다"며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앙금이 쌓여 김익진 총장은 당시 법무부장관과 함께 국회에서 해임 결의안까지 받게 된다.
이렇게 꼿꼿하게 버티던 김익진 총장이었지만 '인사권' 앞에서는 무력했다. '대한정치공작대' 사건 한 달여 뒤이자 6.25 발발 사흘 전 그는 검찰총장에서 서울고검장으로 좌천을 당한다.
"옷 벗고 나가라"는 경무대의 압력이 밀려왔지만, 그는 "대통령이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두면 나쁜 선례가 되며, 검사의 신분보장규정이 유명무실해져서 일선 검사가 소신을 갖고 수사·기소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이유로 끝까지 버텼다. 이에 사상 초유의 '강등 인사'가 벌어진 것이다.
김 총장은 강등의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리를 지켜 전쟁 중 서울고검장 직을 수행한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은 인사에 그치지 않았다. 1952년 부산에서 벌어진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 의혹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결국 파직을 당하고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평소 친분이 있는 야당 인사들(저격 미수 사건과 연관된)과 만난 사적인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해 '안녕질서에 간한 죄'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는 1,2심에서 무죄, 대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는다.
인사권 앞에서는 일개 공무원이지만
최근 검찰 인사를 두고 말이 많다.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채동욱 전 검찰총장 '찍어내기' 의혹 수사 등 정권에 가시 같은 수사를 맡던 검사들을 대놓고 한직으로 밀어냈다. '강등' 시키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좌천 인사다. 박근혜 정권은 '권력의 힘'을 제대로 시위했다. 검찰이 아무리 정치적 독립을 외쳐도 인사권 앞에서는 그저 일개 공무원일 뿐이라는 걸.
채동욱 전 총장이 스스로 사표를 쓰고 나간 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혼외자식으로 의심 받는 채모 군의 개인정보 열람 등 자신에 대한 불법적인 사찰 의혹을 밝히기 위해서는 검찰총장 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수사는 검찰 외부의 독립적인 수사 기관에 맡기고 그가 자리를 지켰더라면 지금과 같은 인사가 횡행할 수 있었을까?
이번 인사에 불만을 갖고 검찰을 떠난다면 정권이 의도하는 결과일 것이다. 김익진 총장이 강등이라는 수모를 견디며 검찰에 남았던 것은 검사가 정치권력에 굴해서는 안 된다는 걸 후배들에게 몸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후배들이 비단 1950년에 살았던 검사들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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