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안성은 미륵불상들의 고을이다. 쌍미륵사 앞의 쌍미륵. Ⓒ고을학교 |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강 답사지인 안성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서 한강의 남쪽 산줄기[漢南正脈]와 금강의 북쪽 산줄기[錦北正脈]의 겹침 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백두대간 상의 속리산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안성 칠현산(七賢山)에 이르러 한줄기는 경기도 남부를 가로질러 서울의 관악산으로 향하고 다른 한줄기는 충청남도를 가로질러 서해로 향합니다.
충남을 가로지르는 금북정맥이 안성 땅에 들어와서는 400∼500m의 높이의 칠현산, 덕성산, 서운산 등을 일구는데 이 산줄기가 동북쪽에 치우쳐 있어 안성의 지형은 동북쪽이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서남쪽에는 서해를 향해 100m∼200m의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는 대체적으로 동북쪽이 높고 서남쪽이 낮은 지세입니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안성의 물줄기는 동북쪽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수세(水勢)로서, 동쪽에는 장호원의 백족산을 휘감아 온 청미천(淸美川)이 흐르고 서쪽에는 서북쪽에서 발원한 도곡천과 도량천이 남진하면서 고남저수지에서 발원한 한천과 합쳐져 남서진하는 안성천과 다시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안성의 서남쪽에는 여러 물줄기가 흐르면서 넓은 충적평야인 안성평야를 부려놓았고 북동쪽에는 금북정맥의 산줄기가 구릉인 죽산분지(竹山盆地)를 일구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안성은 충남을 관통하여 서해로 향하고 경기남부를 지나 서울로 향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동쪽은 이천시와 음성군, 서쪽은 평택시, 남쪽은 천안시와 진천군, 그리고 북쪽은 용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안성은 이러한 사통팔달의 지리적 특성으로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 되어 4세기 이전까지는 백제의 땅이었으나 5세기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6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한강유역까지 진출하자 비로소 신라의 영토에 편입됩니다.
고려시대는 안성현으로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지방을 8도로 나눌 때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고 이때 안성현(安城縣), 양성현(陽城縣), 죽산현(竹山縣) 세 곳에 현감을 두었으며 중종 때 죽산은 부(府)로 승격되어 부사(府使)를 두었고 지금의 안성은 일제 강점기 때 안성, 양성, 죽산의 세 고을을 합쳐 형성된 것입니다.
읍치구역(邑治區域)의 안성객사(安城客舍)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객사와 마찬가지로 중앙에 궐패(闕牌)를 모시는 정청(政廳)과 양옆으로 익실구조(翼室構造)로 중앙관리들이 내려와 숙박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졌고,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의 지붕에서 '와장승인묘안 숭정후육십팔년을해(瓦匠僧人妙案 崇禎後 六十八年乙亥)'라는 명문(銘文) 암막새의 발견으로 1635년, 즉 인조(仁祖) 때 기와공 묘안(妙案)스님이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중수시기와 건축양식으로 미루어 이 건물의 축조연대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인 14세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안성향교(安城鄕校), 죽산향교, 양성향교는 모두 중종 때 세워진 것으로, 특히 안성향교는 배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에 공자(孔子)를 비롯한 오성위(五聖位)와 공자의 문하생 열 명[十哲]을 모시고 좌우에 동무(東撫), 서무(西撫)를 따로 두어 우리나라 유학자인 동국18현(東國18賢)을 모셨으며, 강학공간에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두었고, 일반적으로 향교에서는 볼 수 없는, 명륜당 앞에 또 다른 강당의 역할을 하는 풍화루(風化樓)를 세웠습니다.
안성향교의 이러한 건물배치는 국립대학인 성균관(成均館)을 따라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건물배치 형식은 남원향교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안성이 지정학적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즉 삼남지방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전략적 요새였기에 이곳에는 군사적 방어목적의 산성과 상업의 발달로 말미암은 장시(場市)가 일찍부터 발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주산성은 태평미륵이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매산리 비봉산에 있다. Ⓒ고을학교 |
안성지역의 산성은 확인된 것만 14곳이나 남아 있으며 그중에서도 원형이 잘 보존된 것은 비봉산(飛鳳山)의 죽주산성(竹州山城), 망이산(望夷山)의 망이산성(望夷山城), 서운산(瑞雲山)의 서운산성(瑞雲山城)입니다.
죽주산성은 성 둘레 1,688m, 높이 2.5m의 규모로 흙과 돌로 쌓은 토석성(土石城)으로 본성(本城), 내성(內城), 외성(外城)의 세 겹으로 쌓은 석축이 남아 있으며 270m의 내성은 신라 때, 1,500m의 외성은 고려 때 쌓았고 1,688m의 본성은 쌓은 연대가 확실치 않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후삼국시대 견훤(甄萱)이 이곳을 본거지로 9년을 보내며 후백제국의 기초를 만들었고 궁예가 산성으로 찾아와 견훤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던 곳이며 고려 때 몽고와의 전쟁에서도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을 크게 물리친 곳입니다.
특히 몽고군이 죽주산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자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장군이 성안에 피난해 있던 백성들과 힘을 합쳐 15일 동안을 싸워 적을 물리쳤는데 이는 장군이 일찍이 귀주성(貴州城) 전투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익히 알고 있어 가능했다고 전해지며 내성 가까이에는 장군을 기리는 사당과 함께 싸우다 죽은 백성들의 넋을 기리는 당집이 있습니다.
성안은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의 동문(東門) 자리에 장대석과 석재의 흔적이, 남쪽에는 장대지(將臺址)와 문터가, 남쪽 성벽과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는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稚城)이, 남쪽 성문 바깥에는 방어목적으로 팠던 도랑, 즉 해자(垓字)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망이산성은 망이산(望夷山), 즉 지금의 마이산(馬耳山) 정상에 능선과 골짜기를 둘러친, 안쪽의 내성과 바깥쪽의 외성의 이중으로 쌓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마이산은 현재의 지명이고 옛 기록에는 망이산으로 적혀 있어, 음(音)이 변하여 마이산으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산 정상을 250m쯤 둘러싼 내성은 백제시대에 흙으로 쌓은 것으로[土築式] 북쪽에 문 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고 북문 터 부근에는 샘이 있으며 그 주위로 기와와 자기조각이 흩어져 있고 직사각형의 봉수대 터도 남아 있으며, 앞쪽인 남쪽의 산세는 거의 절벽으로 되어 험준하나 뒤쪽인 북쪽은 낮은 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어 이 성은 남쪽의 적을 대비하여 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쪽으로 낮은 평원을 이룬 외곽 봉우리들의 능선을 따라 약 3㎞ 가량 둘러친 외성은 통일신라시대에 돌로 쌓은 것으로[石築式] 세 곳의 문 터가 확인되었고 산등성이 윗부분에는 공격에 유리하도록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킨 치성이 다섯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망이산성은 발굴조사 결과 철제단갑(鐵製單甲), 주조철부(鑄造鐵斧), 토기류, 와편, 청자편, 백자편 등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이곳이 중요한 군사시설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하였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죽산현의 봉수대로서 영남과 중부 내륙의 봉수를 받아서 도성으로 올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운산성은 서운산 정상의 봉우리 2개를 연결하여 쌓은 산성으로 마치 말안장 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부분 가파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부분적으로 토축을 쌓은, 둘레 1070m, 높이 6∼8m, 폭2∼4m의 테뫼식 토축산성으로 남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성벽이 잘 남아있습니다.
산성 안에는 내황(內隍, 성안의 해자)을 두었으며 장대(將臺)로 사용되던 장수바위가 남아있고, 다섯 곳에서 우물터가 발견되어 물이 풍부했음을 짐작케 하고, 문지(門址)가 북쪽에 두개, 남쪽에 하나, 모두 세 곳에 남아 있으며 그 중 남문 터 근처가 대지가 평탄하여 이곳이 산성의 주된 통로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이일((李鎰)과 함께 신립(申砬)장군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충주 탄금대에서 대패하고 고향 안성으로 돌아와 의병을 모아 혈전을 벌인 의병장 홍계남((洪季男)장군이 북상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선조25년(1592)에 축성하였다고 하나 그 전부터 있던 것을 임진왜란 때 개축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봉업사지의 당간지주 사이로 바라본 오층석탑 Ⓒ고을학교 |
한양과 삼남지방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안성은 장시(場市)가 발달되어 상업이 번성하였던 고을로서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낳게 할 정도로 안성장시(安城場市)는 크게 성장하여 마침내 대구장시, 전주장시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장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래서 <택리지(擇里志)>에도 "수원 동쪽은 양성(陽城)과 안성(安城)이다. 안성은 경기도와 호서지방 해협 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수용되고 공장(工匠)과 상인이 모여들어 한남(漢南)의 도회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시의 번성은 생활용품과 관련된 수공업이 발달을 가져와 유기, 꽃신, 한지, 복조리 등 뛰어난 솜씨의 다양한 수공업 제품들이 생산되었고 그 우수성을 증명이나 하는 듯이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특히 안성유기는 '안성맞춤'의 대명사로 통할 만큼 우수한 제품이었습니다.
안성유기(安城鍮器)는 두 가지 방식으로 생산되는데 하나는 서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을 만드는 것으로 '장내기'라 불렀고 다른 하나는 관청이나 양반가의 주문을 받아 특별히 우수한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모춤(마춤)'이라 불렀으며, 유난히 안성유기가 다른 지방의 것보다 유명해진 이유는 한양의 양반들의 유기그릇을 '모춤'으로 도맡아 만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안성은 특히 전국에서 미륵불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고을입니다. 그 연원을 살펴보니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특성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사회변동기 때마다 발생되는 전란의 회오리가 안성을 비켜가지 않았으니 그때마다 이곳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렇듯 신산스런 삶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여윈 새로운 세상을 바랐을 것이고 그 바람은 미륵신앙(彌勒信仰)으로 자리잡아, 머지않아 이 땅에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몸서리치는 현실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갈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성의 미륵은 대부분 사찰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터전인 마을 앞에 세워져 있고 아직 출현하지 않은 부처님이라 발을 땅에 묻고 서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상 또한 일반적인 부처님과 달리 기교를 부리지 않은 투박한 모습으로 친근감을 주는 '마을미륵'입니다.
미륵은 불교교리에 의하면 현세불(現世佛)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 뒤에 나타나는 미래불(未來佛)로서 마이트리아(Maitreya)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메시아(Messiah)와 같은 의미이며 지금은 도솔천 내원궁에서 수행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이 세상에 몸을 나타내게 될 시절인연(時節因緣)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성유기는 '안성맞춤'의 대명사로 통한다. Ⓒ안성시 |
특히 안성의 미륵 중에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것이 있는 것은 궁예가 신라 말에 죽주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도모한 안성 출신 기훤(箕萱)의 수하에서 미륵의 꿈을 키워왔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말, 지방의 호족들은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왕이 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를 시작으로 신라 조정에 대하여 공공연히 반기를 든 세력들이 속출하였으며 죽주 출신인 기훤도 죽주산성을 거점으로 거사를 하였습니다.
이때 궁예는 기훤의 휘하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의 주인으로서 미륵을 꿈꾸었으나 기훤이 오만하여 그를 예우하지 않자 궁예는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와 신훤(申煊) 등과 결탁하여 기원을 버리고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에게로 몸을 의탁하였고 그곳에서 힘을 키워 마침내 철원을 중심으로 태봉국(太封國)을 세워 비로소 미륵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져 갔습니다.
안성 지역에 남아 있는 미륵으로는 고려시대에 몽고군을 죽주산성에서 물리친 송문주(宋文胄)장군과 용인의 처인성(處仁城)에서 몽고군 살리타이(撒禮塔)장군을 활로 쏘아 죽인 김윤후(金允侯) 승군장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태평미륵(太平彌勒), 국사봉(國師峰) 쌍미륵사(雙彌勒寺)에 있는 머리에 갓을 쓴 쌍미륵(雙彌勒), 국사봉 중턱의 국사암에 있는 양쪽에서 호위를 받고 서 있는 궁예미륵, 머리에 중절모 모양의 갓이 씌워져 있는 대농리미륵, 마을사람들이 여미륵과 남미륵으로 부르고 있는 두 개의 아양동미륵 등으로 모두다 그 모양새가 엄숙하다기 보다는 정겨움과 친근함이 묻어나는 마을미륵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성에는 서운산의 남쪽 기슭에 청룡사(靑龍寺), 동북쪽 기슭에 석남사(石南寺), 칠현산 들머리에는 칠장사(七長寺), 비봉산 아래 당간지주와 오층석탑만 전해지고 있는 봉업사지(奉業寺址) 등 유서 깊은 사찰들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 나말려초(羅末麗初)의 시기에 지어진 것입니다.
칠장사는 칠현산에 기대고 있는 사찰로서 전설에 의하면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일곱 명의 도적을 제도하여 이들이 깨달음을 얻게 되어 일곱 명의 현자로 거듭났기 때문에 본래 아미산(峨嵋山)이었던 산 이름이 칠현산(七賢山)으로 바뀌고 절 이름도 칠장사(漆長寺)였던 것을 일곱 현자를 지칭하듯이 칠장사(七長寺)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 현종 때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곳에서 수행하고 입적한 혜소국사가 중창할 때까지 56동의 큰 가람이었다고 합니다.
칠장사는 고려 우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있던 <고려역조실록(高麗歷朝實錄)>을 이곳으로 옮겼을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광해군에 의해 폐비의 비운을 맞은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이곳으로 피신을 해 <인목대비 어필 칠언시>를 남겼으며 인조반정으로 왕후에 복위한 후, 억울하게 죽은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수하였고 이때 국보로 지정된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撑)>도 하사하였습니다.
어필(御筆) 중에 왕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많으나 왕후가 쓴 큰 글씨가 전하는 경우는 대한제국 시절 명성황후의 어필 말고는 <인목왕후 칠언시>가 유일한 것으로, 시의 내용은 '늙은 소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주인을 위해 농번기의 바쁜 일정을 마쳐 쉬고 싶은데 주인은 또 일을 시키려 한다'는 것으로 인목대비가 당쟁으로 인해 친정아버지와 아들인 영창대군을 잃는 등 불우한 자신의 생애를 늙은 소의 고단함에 비유해 읊은 것입니다.
그리고 칠장사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신라 47대 현안왕의 서자인 궁예가 10세까지 유년기를 이곳에서 보내며 말타기, 활쏘기 등 무술을 연마했으며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 스님으로 알려진 병해대사가 이곳에서 임꺽정을 만나 사제의 관계를 맺기도 하였습니다.
칠장사에 초입에 세워져 있는 철당간지주(鐵幢竿支柱)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청주 용두사지(龍頭寺址)와 공주 갑사에서만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며 진흙을 구워 만든 소조 사천왕상도 눈여겨 볼만한 조선시대 작품입니다.
▲칠장사 초입에 서있는 철당간지주 Ⓒ고을학교 |
서운산에 기대고 있는 청룡사(靑龍寺)는 고려 원종 때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사찰로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고 불렀으나 폐허가 된 이곳을 공민왕 때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절터로 잡아 크게 중창하여 청룡사로 고쳐 불렀으며 그 이름은 나옹화상이 절터를 찾아다닐 때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지붕 집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구불구불한 아름드리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나뭇결을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으며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내준 신표(信標)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하였고 청룡사 건너편 불당골에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 지금까지 남사당 마을로 남아 있습니다.
봉업사(奉業寺)란 말 그대로 나라를 창업하면서 받들던 절이란 뜻이며 고려 창업을 기념하기 위해 왕건의 진영을 봉안한 진전사찰(眞殿寺刹)로 폐사된 시기는 잘 알 수가 없고 지금은 황량한 빈터에 당간지주와 오층석탑만 남아 있고 석조불상은 칠장사로 옮겨져 있습니다.
진전사찰(眞殿寺刹)이란 왕실의 뜻에 따라 선대왕(先代王)의 진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사찰로서 조선시대의 원찰(願刹)과 같은 것으로 왕건의 진영을 모신 곳은 안성 봉업사, 개성(開城) 봉은사(奉恩寺), 태인(泰仁) 개태사(開泰寺) 등 여러 곳에 있었으며 진전사찰에서는 한해도 빠짐없이 선왕에 대한 예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눈모자를 쓰고 있는 기솔리 국사암의 궁예미륵 Ⓒ희유 |
고을학교 제4강은 새해 1월 11일(토요일) 열리며 오전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 오전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30)→중부고속도로→일죽IC→죽주산성(10:00)→태평미륵(10:30)→봉업사터(5층석탑·당간지주·3층석탑·석불입상, 11:00)→죽산향교(11:30)→칠현산 칠장사(철당간지주·봉업사터석불입상·혜소국사비, 13:00)→점심식사 겸 뒤풀이(<도토리>, 14:30)→기솔리 쌍미륵·궁예미륵(15:00)→안성향교(16:00)→안성객사(16:30)→바우덕이묘(17:00)→서운산 청룡사(대웅전·남사당패 마을, 18:00)→안성IC→경부고속도로→서울(19:30)의 순입니다.
▲고을학교 제4강 안성고을 답사로 ⓒ고을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방한 차림, 모자, 장갑, 스틱, 아이젠, 무릎보호대,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4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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