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상왕동 야산에서 한국전쟁 당시 집단 학살된 민간인의 유해 79구가 발굴됐다. 살구쟁이로 불리는 이 숲에서는 1950년 7월 9일경 군과 경찰에 의해 보도연맹원과 공주형무소 수감자 약 400명 이상이 사살됐다. 2009년 발굴한 317구를 합하면 이곳에서 수습한 유해는 모두 396구다. 4년 전 진실화해위(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시작된 발굴 작업은 예산 문제로 중단된 뒤 미뤄져오다 최근 충청남도의 지원으로 재개됐다. 발굴단은 10월 23일 61구, 24일 18구를 발굴하고 27일 활동을 종료했다. 현장 지휘는 충북대 박선주 교수가 맡았고, 유해는 충북대에 마련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에 안장됐다.
발굴지는 폭 3미터, 길이 12.5미터로 20도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깊이는 30센티미터에서 50센티미터로 매우 얕다.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고 사후에도 제대로 덮지 않았기 때문인데 유골의 보존 상태가 특히 나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굴지에서는 10대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가 발견돼 청소년이 학살됐다는 증언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주요 발굴물은 군과 경찰이 사용하던 M1과 카빈소총의 탄피 59점, 안경 1점과 금니 1점 등이다. 수감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색 단추와 민간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흰색 단추 28점도 출토됐다.
▲ 충남 공주시 상왕동 산 29-19번지에서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가 발견됐다. ⓒ프레시안(최형락) |
▲ 유해 61구가 드러나 있다. 지면에서 매우 얕게 묻혀 유골 상태가 몹시 나빴다. ⓒ프레시안(최형락) |
▲ 현장 지휘를 맡은 박선주 교수가 유골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 안경 등이 발견되면 유가족이 종종 옛날 사진을 들고와 유해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같은 안경이 많아 유해를 정확하게 찾은 적이 없다고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지난 달 23일 열린 현장설명회에는 희생자 유가족도 참석했다. 전남 순천에서 올라온 정중현(74) 씨도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끝에 현장을 찾았다. 그의 부친 정몽길(1910년생) 옹은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게 밥을 지어줬다는 이유로 3년형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 수감됐다. 1950년 10월 출소한다는 편지를 가족들이 받았으나 그해 6월 전쟁이 터졌다. 대구나 대전형무소로 이감됐을 것이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 이후 정 씨는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보도연맹원들과 수감자들에 대한 즉결처분이 전격적으로 이뤄진데다 당국이 피학살자의 명단도 작성하지 않았고 사살 시간과 장소도 공개하지 않은 탓에 희생자의 가족 대부분은 이렇듯 영문도 모르고 가족을 잃고 살아야 했다.
▲ 공주 금강변 학살지로 끌려가는 피학살자들의 사진 |
보도연맹 사건은 이승만 정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좌익과 좌우합작파의 반발 속에서 우파만의 지지로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경제난까지 겹쳐 국민의 신임을 크게 받지 못했다. 게다가 4.3사건 이후 여순 사건이 일어나고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일대에서 1950년 봄까지 이어진 좌익의 게릴라 활동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정권은 군대와 경찰, 서북청년회와 같은 극우단체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승만은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북진 통일이 제창했다.
1949년 6월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도 그런 목적 중 하나였다. '보도(保導)'는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뜻이다. 본래 전향한 좌익 인사들을 대상으로 사상교육을 시키는 목적이었으나 각 지역으로 내려가면서 좌익과는 상관 없는 사람들이 가입하는 일이 많아졌다. 많은 가입자 수는 더 많은 좌익을 색출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지역별로 모집 할당까지 내려가며 확대시키려 애썼다. 보리쌀과 비료를 받기 위해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입한 민간인이 상당수였다. 당시 보도연맹원의 규모는 대략 30만 명 전후로 추산된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총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은 210석 중 불과 30석을 얻는데 그쳐 다시 민심 이반을 확인한다.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은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했다. 군과 경찰은 철수 직전 형무소에 있던 정치범과 보도연맹원을 야산으로 끌고가 처형하기 시작했다. CIC라 불리던 육군특무대와 헌병, 교도소 경비대가 학살을 주도했고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민간조직이 예비검속과 사살에 가담했다. 보도연맹 사건이 국제사회에서 비난 받자 이승만은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뒤였다. 보도연맹 희생자수는 통계가 정확치 않고 지역별로 편차가 커 정확히 추산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몰락한 뒤 들어선 제2공화국은 양민 학살 사건 조사위를 만들어 진상규명에 착수했다. 그러나 1961년 터진 5.16군사쿠데타는 모든 것을 돌려놓았다. 군부는 쿠데타 하루만에 보도연맹 사건을 자체 조사하던 유가족회원들을 검거하고 자료를 압수했다. 군사정권에서 보도연맹원이었던 사람들은 '좌익 빨갱이'로 규정됐다. 유가족들은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감시받았다.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운 위령비를 파괴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같은 탄압과 연좌제 때문에 연맹원과 가족들은 조용히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다.
노무현 정부에서 발족된 진실화해위가 2007년 5월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에 관한 유해 발굴과 진상 조사에 나섰다. 진실화해위는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실을 여러 건 밝혀내기는 했지만 학살 지시 명령 체계까지는 규명하지 못하고 2009년 11월 활동을 종료했다. 당시의 문서들은 상당 부분 소각돼 증거를 찾기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 시신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프레시안(최형락) |
▲ 군경은 트럭에 싣고 야산에서 일렬로 세운 후 총을 쏴 즉결처분했다. 탄피가 시신 바로 옆에 있는 경우 여러 정황을 살펴 확인사살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살구쟁이에서도 확인사살의 흔적이 여럿 발견됐다. ⓒ프레시안(최형락) |
▲ M1 소총의 탄피. 이 소총은 당시 군인들이 쓰던 총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 치아와 턱뼈 ⓒ프레시안(최형락) |
▲ 이번 발굴은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발굴팀은 14일동안 79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 뼈 모양을 보면 성별과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곳에서는 10대 후반 청소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도 나왔다. ⓒ프레시안(최형락) |
▲ 학살이 자행된 살구쟁이 숲. 당시의 사건을 아는 주민들은 이 숲이 무서워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보도연맹 사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비극이 '반공'이라는 정치 기획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다고 해서, 혹은 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다고 해서 북한과 연계해 배척하고 탄압하려는 움직임은 비단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또 생각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문제까지도 정치적으로 몰아 탄압하는 과오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고한 양민이 생계 문제로 가입한 보도연맹 때문에 정치적 누명을 쓰고 학살당했듯, 복지나 교육 등 생활의 문제를 지적하고 요구하는 이들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지금의 사회가 그렇다.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쟁이라고 불리던 숲은 전쟁 이후 원수를 죽인다는 뜻의 살구(殺仇)쟁이가 됐다. 금강변의 음산한 숲에서 아주 오래된 뼈를 본다. 그 뼈에 붙어 있었을 얼굴을 생각한다. 그 얼굴과 마주봤을 총 든 군인도 떠올린다. 두 얼굴을 번갈아 본다. 오늘의 우리는 그 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만큼 성숙해졌을까? 그리고 우리 위에 군림하는 권력은 비극의 역사 속에서 얼만큼이나 깨달았을까? 유해를 수습한 뒤에도 살구쟁이 숲이 아직 스산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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