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성대하게 열린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 행사 자체는 무난하게 끝났지만, 수상 결과를 두고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졌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뛰어난 성적을 거둔 외국인 선수들이 수상에 '물을 먹은' 탓이다. 지난해는 넥센의 브랜든 나이트가 평균자책점(2.20) 1위, 다승(16승) 2위는 물론 최다이닝(208.2이닝), 최다 퀄리티스타트(27회)를 거두고도 수상에 실패했다. 수상자인 삼성 장원삼(17승)과 나이트의 승차는 1승에 불과했고, 평균자책점의 격차는 매우 컸다(장원삼 3.55로 16위).
유독 뛰어난 외국인 투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올해는 여러 명이 단체로 고배를 들이켰다. 평균자책점 1위 찰리 쉬렉(NC)을 비롯해 평다승 1위-평균자책 2위의 크리스 세든(SK), 여기에 최다이닝과 탈삼진 1위를 차지한 레다메스 리즈(LG)까지 세 선수가 황금장갑에 도전했지만 수상에 실패했다. 황금장갑의 영예는 투표인단 323명중 97명의 표를 받은 세이브 1위(46세이브) 넥센 손승락에 돌아갔다.
이번 후보자들의 개인성적이 대체로 엇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됐던 부분. 하지만 다승 공동 1위(14승) 외에는 평범한 성적을 거둔 삼성 배영수가 80표를 받으며 투수부문 2위에 오른 점은 좀처럼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승수는 14승으로 배영수와 똑같지만 평균자책점은 월등히 뛰어났던 세든(평균자책 2.98로 3위, 배영수 4.71로 21위)은 79표를 받아 3위로 밀렸다. 또 찰리는 41표로 4위에 오르는데 그쳤고 진보적인 통계 분석의 관점에서 올해 프로야구 최고 투수였던 리즈는 15표밖에 받지 못했다. 외국인 선수가 각종 시상식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에서 외국인 선수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지 않나. 사진은 2013시즌 다승 공동1위,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하고도 골든글러브 투표에서 3위에 그친 SK와이번스의 크리스 세든. ⓒ연합뉴스 |
이는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프로야구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처음 도입된 건 1998년. 지난해까지 245명이나 되는 외국인 선수가 프로야구를 거쳐갔지만,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겨우 1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2009년 KIA 투수 로페즈를 마지막으로, 최근 4년간은 외국인 수상자의 맥이 끊긴 상태다. 1998년 홈런왕과 시즌 MVP였던 타이론 우즈(전 두산)가 정작 골든글러브 1루수 투표에서는 '국민타자' 이승엽에 밀려 수상을 받지 못했던 건 외국인 도입 첫해라서 그랬다고 치자. 그러나 16년이나 지난 지금도 전혀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여전히 외국인 선수는 리그를 초토화하는 수준의 성적을 내지 않는 한, 골든글러브 투표에서는 군소후보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처럼 외국인 선수들이 매년 이맘때마다 물을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력과 성적보다는 '인지도'와 친밀도 중심으로 이뤄지는 투표 행태가 문제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는 MVP와 사이영상 등을 선정할 때 선수의 실제 가치와 성적을 최우선 순위로 여긴다. 최고 수비수를 뽑는 골드글러브 선정도 올해부터는 각종 진보적 야구 통계 자료를 함께 제공해서 보다 객관적인 투표가 가능하게 했다. 이따금 지역지 기자들이 자신의 담당팀 선수에 '묻지마 투표'를 하는 경우가 나오기도 하지만, 투표 결과를 모아 놓고 보면 크게 납득 못할 결과는 나오지 않는 편이다. 각종 통계 자료가 풍부하다보니 누가 수상할지를 갖고 공론의 장에서 생산적인 토론이 이뤄지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반면 프로야구의 각종 시상은 초창기인 1980년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골든글러브의 경우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투표인단에게 '선수의 공격과 수비, 인지도에 동일한 비중을 둘 것'을 권하고 있다. 국내야구의 여건상 공격과 수비를 제대로 평가할 만큼 충분한 자료가 투표인단에 주어지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 인기투표에나 쓰일법한 '인지도'라는 기준을 포함했다는 게 문제다. 후보자들의 표면상 성적이 엇비슷할 때는 선수의 유명세나 투표자의 주관적인 인상, 개인적인 친분에 의존한 투표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국내 무대에서 활동한 기간이 짧고, 언론과 야구 관계들로 이뤄진 투표인단과의 사적 교류가 제한적인 외국인 선수에 절대 불리한 조건이다.
외국인 선수를 한국야구의 일부분이 아닌 '용병'으로 보는 인식도 여전하다. 한 기자는 "외국인 선수는 성적을 위해 데려온 용병이다. 국내선수들이 골든글러브 받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300명이 넘는 투표인단 중에는 전문성과 소신을 갖고 투표하는 이도 많지만, '기왕이면 국내 선수에게 상을 주자'는 식으로 표를 던지는 경우도 적잖다. 그러면서도 LA 다저스의 '용병' 류현진의 신인왕 수상 가능성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대감을 표한다. 만약 류현진이 20승이나 200탈삼진 등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도 신인왕 투표 4위에 그쳤다면, 과연 국내에서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가 궁금해진다.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지 내년이면 17년째가 된다. 이제 외국인 선수는 동료 선수와 팬들 사이에서는 프로야구를 구성하는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국내 선수들은 외인 선수들과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고 경기장 밖에서도 친분을 나눈다. 외국인 선수 중 국내 스타 못지않게 팬들의 사랑을 받는 예도 드물지 않다. 내년이면 한국에서 6번째 시즌을 맞는 넥센 나이트, 4번째 시즌을 기다리는 LG 리즈처럼 이제는 국내 선수나 마찬가지인 선수들도 여럿이다. 하지만 연말 시상식 때가 되면, 외국인 선수는 한국야구의 구성원에서 '이방인'의 자리로 밀려난다.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외국인 선수의 수상을 가로막고, 그들의 공헌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류현진을 비롯해 매년 일본과 미국에 많은 '외국인 선수'를 내보내는 한국야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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