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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문제, 키 없는 자물쇠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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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문제, 키 없는 자물쇠인가?(2)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71> 마지막회

***서경석:**
우리 민족 서로 돕기 운동 집행위원장, 한국시민단체 협의회 사무총장. 서울 조선족 교회 담임목사

7월 18일, 오후 3시, 30도 이상의 무더운 날씨, 서울 종로구 경운동 88 수운 회관 1111호 사무실에서 취재.

필자(이하 ‘필’): 한국 체류 중국동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경석(이하 ‘서’): 집안이 조선 황해에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망명해 중국 상해로 떠났기에 가족이 다 중국 상해에서 살았습니다. 중경, 청도를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귀국 전까지 쭉 상해에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산동 반도로부터 인천으로 귀국했습니다. 어머니는 남경여자대학 출신, 아버지는 상해 동제대학 출신이고,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불리 우는 김염은 어머니 오촌 숙이며, 숙모이고 중국인인 진의도 5~6년 전에 집에 다녀갔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어려서 중국에 가다보니 한국말을 거의 못했고, 귀국해서야 한국말을 배웠습니다. 중국에서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이 중국 국민이 됐고, 귀국한 사람들은 한국 국민이 됐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저도 조선족이고, 부모님도 조선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4년 한국시민단체 사무총장 시절에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중국 연변에 갔었습니다. 그 때 한 조선족 처녀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통일을 성취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사람들이 연변 사람들을 손톱의 때만도 여기지 않는데 어찌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북한 동포들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이 쇼크 돼 우리 민족 서로 돕기 단체를 만들어 중국 조선족, 구소련 고려인, 북한동포 돕기를 했습니다. 1996년에 조선족 사기피해 문제 해결에 착수, 사기피해자 천명을 한국에 데려가 일하게 해달라고 제기해 논란이 컸는데, 작년부터 천명 거의 다 들어왔습니다. 지금 다시 천명 요청중입니다.

조선족들을 위해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1999년 6월 6일에 서울 조선족 교회를 세웠습니다. 등록된 교인이 1천6백명, 매주 목회 참석자는 3백명가량 됩니다.

필: 어떻게 해야 불법체류 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 한마디로 말하면 불법체류 현실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중국 동포들이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합법적으로 되면 체불노임, 사기피해, 산재피해, 검문신고 때문에 전전할 필요가 없고, 성희롱 때문에 근심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차별 등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이 좀 더 향상될 수 있습니다.

불법체류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에 오려는 사람이 많고, 올 수 있는 명액은 제한돼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봅니다. 7백~8백만원의 돈을 내고 한국에 입국하기 때문에 그 빚을 갚기 위해 불법체류 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돈을 내는 경로를 없애고, 그런 경로가 생기는 제도를 없애야 합니다.

필: 어떻게 하면 그 경로와 그 경로가 생기는 제도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서: 첫째, 한국어시험제도의 도입입니다. 높은 점수를 딴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둘째, 사기 피해자의 경우 가산점 10%를 더 주어 그들부터 들어오게 함으로써 악순환을 막을 수 있습니다. 셋째, 한국에 이미 들어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도적인 추방을 해야 합니다. 체류 기간을 3년으로 연장해 주어 빚을 갚고 어느 정도 돈을 벌어 가도록 하여 고맙게 귀국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이 문제에 관해 정부측과 교섭중입니다.

필: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서: 시험제도가 도입될 것 같습니다. 우선 빚이 없이 들어올 수 있고, 3년쯤이라면 중국에 있는 가정도 깨지지 않고 돈을 벌어 생활이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해성:**
외국인 노동자의 집/중국 동포의 집 소장, 성남기독교 교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9월 24일 오후 4시,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 7288-11 서울 외국인 노동자의 집/중국 동포의 집에서 전화 취재.

필자(이하 ‘필’): 새로 개정한 한국의 ‘재외 동포 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해성(이하 ‘김’): ‘재외 동포 법’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에 나간 사람은 재외동포이고, 그 외는 아니다, 라고 규정했기에 재중동포와 재(구)소련 동포가 제외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5백50만 동포에서 3백만 동포가 제외되었습니다. 부자 집에서 시집 간 딸은 딸이고, 가난한 집 딸은 딸도 아니라는 말이 되죠. ‘재외 동포법’인 것이 아니라 ‘제외 동포법’이고, ‘차별 동포법’이죠. 지금 ‘동포법’개정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동포면 같은 동포지, 잘 사는 동포만 혜택 받고, 가난한 동포는 혜택을 못 받게 하는 것은 차별입니다. 1948년 전에 나간 동포들은 일제 착취수탈을 못 견디고, 강제 징병, 정신대를 피해간 사람들이며 일부는 독립운동을 하러 갔고, 동포들은 독립군을 지원, 협력해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동포들은 동포가 아니고, 공부하러 간 사람만 동포라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필: 어찌 하여 ‘중국 동포의 집’을 만들게 되셨습니까?
김: 우리가 단순히 중국 동포의 사기 폭행 피해, 임금체불 등만 해결해 주는 것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가 동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 동포사회의 위기가 심각한 것 때문입니다.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식을 친척집에 맡겨놓고 한국에 나옵니다. 한국에 나온 중국 동포의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는 자식이 없고, 불량 청소년이 많고, 학교를 그만 둔 아이들이 많습니다. 한국에 나왔던 사람들은 부부가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의심하고, 이혼율이 급증합니다. 돈을 벌어 간 사람들은 농사하던 땅을 내놓고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술집을 차리고, 음식점, 노래방, 오락실에 투자하기에 생산적이기 보다 소비적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식으로 룸쌀롱을 차리고, 조선족 아가씨를 고용하고, 한국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돈맛 알고 여성들은 한국 결혼을 하고, 동포남성은 남아돌고, 학교 팔아 무도장 만들고, 이 상황에서 사기는 또 엄청 당하고, 한국사회를 통해 중국 동포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동포들이 자기를 바라 볼 줄 알게 하고, 이웃과 역사를 바라 볼 줄 아는 안목을 길러 주는 의식화, 즉 깨달음을 키워, 돈만 돈이라고 하지 말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회와 가정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가치관을 변화시켜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습니다. 지금 ‘중국 동포의 집’은 회원이 5천명입니다.

필: 어떻게 중국 동포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습니까?

김: 1980년도 광주민주항쟁에서 친구가 민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저는 그 때 수개월 친구 골방에 숨어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비겁함이 있었습니다. 친구는 죽고, 나는 살았다는 아쉬움 때문에 1980년도 말 성남시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1986년에는 노동상담소 희망의 전화를 개설하고 한국인 노동자를 돕는 일을 했습니다. 1990년부터 외국인, 중국 동포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노동현장에서 팔을 잘리고 죽은 사고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외국인 문제지만 인권 전문가 직에 있기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4월부터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중국 동포의 집을 설립했는데, 너무 많이 찾아와 감당할 수 없어 2000년 1월 1일 영시부터 서울 외국인 노동자, 중국 동포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성남쉼터에는 매일 평균 중국 동포, 외국인 노동자 80~90명이 무료 숙식을 하며, 어떤 날에는 2백명까지 숙식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다가 구속된 적도 있습니다. 1996년에는 불법체류자를 잡아가는 5백명 경찰에 맞서다가 구속되었었습니다. 중국 동포 및 외국인 노동자 법 제정문제를 추진하여 1994년에 불법체류자 산업재해 보상법 적용을 이루고, 1995년에 연수생 최저임금제, 의료보험, 산재보상 적용을 이루었고, 중국에서 한국인의 사기피해 사건이 났을 때에는 사기사건 조사 사건에 착수했었습니다. 작년부터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및 그 자녀 국적 취득 문제, ‘재외 동포 법’ 개선 문제를 위해 뛰었는데, 4월 29일에 대통령은 외국인, 중국 동포 인권유린 안된다, 법을 제정하라, 하여 민주당과 정부가 법 만들기를 합의하여 국회에 올렸습니다. 중국 동포 및 외국인 납골당을 설치하고, 한 주일에 2~3건의 장례를 치르며, 이 때까지 7백~8백구 장례를 치렀습니다. 오늘도 한 구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제가 하는 일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의 한국인 지명인사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한국체류 조선족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엿볼 수 있어 기뻤다.

조선족은 중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조선족문제는 한국의 정부 차원에서 풀어나가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국민이라는 것 때문에 조선족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조선족은 한국에서 외국인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조선족에게 있어 ‘조선족’은 역사가 선택한 것일 뿐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조선이주민으로부터 조선족이 된 것은 그 하나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이는 미국이나 일본이나 기타 나라에 거주하는 동포들과는 다른 상황이다. 역사의 선택은 조선족 자신의 운명일 뿐이다.

하지만 한국은 인권환경에 대한 개선을 해야 하고 법적인 제어장치를 하여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조선족을 재외동포법에서는 제외했지만 외국인 차원에서라도 절실하게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조선족들을 취재하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 불법체류자 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가능한 한국의 입장과 조선족의 입장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보려고 애를 썼다. 불법체류자 문제는 조선족에게 있어서도, 한국정부에 있어서도 복잡한 문제이다. 복잡한 문제는 현실적으로 풀어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한국입국에 있어 브로커가 존속할 수 있는 법적인 허점을 제거함으로써 조선족의 한국입국 부담을 줄여 불법체류의 가능성을 줄여주는 것, 불법체류를 조장하는 한국의 인력시장의 부족점을 활성화하여 불법체류의 형식이 아닌 합법적인 체류의 형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조선족을 불법체류자로 전락시킬 수 있는 공간을 제거하는 것이다.

‘코레안드림’을 마치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선족 자체의 힘을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코레안드림에서 아무리 돈을 벌었다고 해도 가치관이 추락하고 정신력을 잃기만 하면 그것은 조선족사회의 황폐를 조장하는 하나의 요인으로밖에 될 수 없으며, 그 결과는 조선족을 고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부담스럽고 혐오스러운 군체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 흔들리고 있는 가치관을 바로잡고 조선족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불러일으켜야만 코레안드림이 조선족의 발전에 밑거름이 될 수 있으며, 한국에는 우수한 해외 동포로, 중국에서는 우수한 조선족으로 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 글이 한국체류 조선족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의 관심을 널리 불러일으켜 문제 해결의 보다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후기**

이 글은 사실글의 진실성으로 공감대를 형성해 한국사회 및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급급히 쓴 취재 보고서인 셈이다.

한국 서울의 삼복 철에 후암동 셋집 옆 건축장의 소음을 들으며 이 글을 시작해, 지금 내 집이 있는 중국 연길에서 이 글을 마친다. 또 한번 자신의 한계와 아쉬움을 느껴본다.

글을 읽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내 민족의 통합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주제넘은 소망이 조금이나마 이루어 질 수 있다면, 서울에서 보냈던 지하철의 삼복과 후암동의 비좁은 셋집이 즐거운 추억이 되리라.

서울 친구에게서 ‘가을입니다’라는 메일이 왔을 때 나는 중국 연길에서 ‘겨울입니다.’라는 메일을 보냈다. 중국보다는 한 시간 앞당긴 서울, 연변보다는 한철 늦은 서울, 이 글을 쓰면서 더욱 애정을 느낀다. 건강한 마음이 세상을 그대로 보는 시선을 만들고 사랑을 만든다. 내가 병들지 않은 마음으로 한국을 바라보고, 조선족을 바라보고, 한민족을 바라보도록 여러모로 애써 주신 한국의 여러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글의 성공을 위해 바쁜 와중에 만나주신 조선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오로지 민족의 통합에 유익한 일이 되게 하고자 출판의 계기를 만들어주신 요녕 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에게 또 한 차례 인생 공부를 하게 해준 그 동안의 시간에 감사를 드린다.

2000년 11월 25일 중국 연길에서 완고.
2001년 5월 16일 중국 연길에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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