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고기 그물에 걸린 새우들**
바닷가에 살지 않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TV에서 큰 고기를 잡은 그물에 작은 고기들도 걸려 허덕이는 모양을 본 적이 있다. 곁불에 잡힌 것이다. 남북한 간첩전에 걸린 불법체류자들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인천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하루 앞두고 투표를 하며 법석이고 있는 4월의 중순, 인천 모 회사에서 일하던 불법체류자 4명이 채소 사러 갔다. 그 회사에는 중국, 러시아 등 외국에서 온 노동자 10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매일 채소 당번이 있었다.
채소를 사고 회사 문 앞에 이르자 택시 기사는 요금 3천8백원을 내라고 했는데, 한국에 입국한지 얼마 안 되는 중국 조선족이 3만8천원을 주었다. 차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경찰들이 닥쳤다. 기사가 돈 계산을 모르는 그들을 ‘북한간첩’으로 신고한 것이다. 경찰들은 헛수고는 하지 않았다. 상어를 잡지 못했지만 새우는 잡았기 때문이다. 불법체류자들 역시 체포할만한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 10명은 전부 경찰서를 통해 출입국 관리소에 넘겨졌다. 그 속에는 나의 후배친구의 매부 김일룡씨도 들어있었다. 그는 채소를 사러 갔던 사람들을 추적해오는 통에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밤 8시 20분경에 후배친구는 외사촌 누님으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얘, 매부가 잡혔으니, 빨리 여권을 가지고 가봐라!”
용정사람인 김일룡씨는 인민폐 7만5천원(한화 1천만여원)을 브로커에게 주고 한국에 나온 지 9개월 밖에 안되었다. 전기용접기술이 좋은 그였지만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옮겨다니다 보니 집에는 한화 2백만원(인민폐 1만4천여원)밖에는 보내지 못했다. 아직도 빚이 엄청 많은 상태에서 인천중부 경찰서에 잡혔다. 다행이 비자 기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후배친구는 그 밤으로 매부 형님의 하숙집에 전화해 여권을 가지고 밤 11시 반에 인천중부 경찰서로 찾아 갔다. 가면서도 걱정되어 전화를 했더니 여권만 있으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후배친구는 매부를 자기가 직접 데려 내오지 않고는 시름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출입국 관리소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에 비자 기간이 지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중부 경찰서에는 매부가 없었다. 이미 출입국 관리소에 넘겨졌던 것이다. 급급히 출입국 관리소로 찾아갔다. 안경을 낀 직원이 접대했다.
“김일룡씨 보호자 되는 사람인데요, 만날 수 없을까요?”
직원이 김의 여권을 보자고 해서 내놓았더니 여권을 받고는 돌아가라고 했다.
“왜 만나지 못합니까?”
이에 직원은 이튿날은 선거일이고, 휴식 일이어서 그 다음 날에 오라고 했다. 후배친구가 더 사정하자 한국인인줄로 알고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면 대면시키겠다고 했다. 후배친구가 외국인 등록증을 내놓자 다짜고짜 너도 불법체류자구나, 라고 하면서 기색이 변했다. 그 뒷 페이지를 더 보라고 해서야 연장수속을 한 부분을 보고 오해는 풀렸지만, 그러나 여전히 냉담한 태도로 돌아가라고 했다. 후배친구는 무시당한 것 같아 따지고 들었다.
“왜 무시하십니까? 한국인이었다면 이렇게 안 하는 거 아닙니까?”
이 때 곁에 있던 중국에서 시집 온 아줌마가 말려 나섰다. 후배친구도 매부에게 불리할 까봐 그만 두었다.
후배친구는 그 다음 날에 매부를 면회했다. 출입국 관리소에서는 그의 매부는 비자 기간이 채 안 찼기 때문에 풀릴 가망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들은 다 출국을 당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매부에 대해서는 일단 시름을 놓았지만 착한 매부는 자기 일행들도 방법을 대여 구해보라고 했다. 역시 정이 많은 후배친구는 매부와 함께 구속된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새로운 방안을 작성하고 즉시 활동했다.
우선 이 일의 관건인물로 주목되는 모 과장을 찾아갔다.
“과장님, 저는 김일룡씨 보호자인데, 다른 사람들도 좀 봐 주세요. 그 분들도 돈 많이 쓰고 한국 나온 사람들이예요.”
라고 사정했다. 그랬더니 그 과장은 무시하는 투의 반말로 거절했다.
“안 된다, 임마!”
이 때 곁에 있던 한 조선족이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돈을 받고 풀어주는 경우도 많다고 하면서 그 방법을 써보라고 했다. 강제출국을 당하면 중국에 도착해서 벌금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꾸어온 빚에 눌려 망하게 될 것이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사람을 빼내와야 한다고 했다.
후배친구는 매부를 제외한 다른 9명 불법체류자들의 이름으로 1백만원이 든 봉투를 가지고 과장의 꼬리를 쫓아다녔다. 식사를 하러 갈 때도 따라 갔으나 기회를 찾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화장실로 쫓아갔다. 다른 사람이 없었으므로 과장이 한창 일을 치르는 중에 봉투를 찔러 주었더니 움찔 놀라 거절하며 말했다.
“후에 보자!”
과장은 화장실을 나가서 얼마 안되어 곧 후배친구를 불렀다. 그는 후배친구에게 정한 날짜에 그들이 중국으로 나가도록 담보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후배친구는 은근히 기뻐서 과장에게 커피도 따라 주고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해주었다. 이렇게 일이 ‘잘 나가고’ 있는데 그 중의 한 오십대의 사람이 호출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 사람은 아마 한국 국제결혼을 한 ‘딸’의 가짜 부모로 한국에 ‘초청’되어 나온 모양이었다. 과장이 그에게 몇 년 생이고, 딸이 몇 살이며 어디에 사느냐 등을 물었는데 그는 꺽꺽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중국 사람들 말이 아니구나. 거짓 말 하면 안되지. 김일룡이고 뭐고 다 때려 쳐!”
과장이 이렇게 말하자 후배친구는 등골이 오싹했다. 매부가 불쌍했지만 누님 또한 불쌍했다. 누님이 일년을 더 벌어야 매부의 빚까지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 김씨는 워낙 사람이 솔직하고 성품이 좋은데다가 아직 비자기간이 얼마간 남아있어 출입국 관리소에 구속된 사람들 중에서 반장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방글라데시 등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도 가득했으므로 김은 그들의 요구를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에게 전하기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신청하는 사람들에게 화장실 문을 열어주는 등 일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전화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도 김일룡씨가 착하고 기술이 있어 보내기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김은 어렸을 때 고생했던 일들을 과장에게 적어 보냈다. 그러나 과장은
“가망이 없습니다. 이다음 한국에 한번 놀러 오세요.”
라고 짧게 말할 뿐이었다.
일은 절망적인 방향으로 발전했지만 후배친구는 끈질긴 데가 있었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매일 출입국 관리소로 근무하다시피 하면서 직원들에게 사정을 했다고 했다. 김일룡씨는 잡힌 지 28일만에 요행 풀려 나왔다. 알고 보니 김의 친척이 서울조선족 교회에 알려 목사가 교섭해 김이 풀렸다고 한다. 후배친구는 너무 기뻐 매부와 함께 목사에게 감사를 드리러 대림동으로 갔다. 그러나 목사는 김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다만 여권체류기간이 아직 남아있는 김을 구속에서 풀어냄으로써 조선족 한 사람이라도 위험한 운명의 고비에서 풀어내고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김은 자기가 번 돈 50만원을 교회에 감사금으로 냈다고 한다.
김씨는 행운아였지만 그 외 9명은 다 강제출국을 당하는 운명을 면하지 못했다. 그들과 그들 가족의 운명은 틀림없이 가장 위태한 방향으로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후배친구는 이 일을 계기로 갑자기 열정적인 교인으로 변신했다. 그의 매부도 마찬가지였다.
불법체류자라는 딱지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조선족들에게는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운명을 확실하게 기탁할 곳이 필요했다. 그것을 종교가 대신 해주고 있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은 조선족들을 종교의 대열에 가담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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