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납골당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납골당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67>

전 회로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선족들을 그린 4부 ‘우산을 들면 비를 원망하지 않는다’마치고, 조선족의 불법체류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조명한 5부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불법체류자’를 시작한다. 편집자

***취재수첩 5**

불법체류자, 이는 어느 차원의 문제인가?

서기 2000년 10월 8일, 연변 도문 정암촌의 33명 농민들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으로 집체방문을 떠났다. 산도 강도, 가옥도, 다리도 변하지 않은 고향 모습이 그들을 맞이했다. 62년 전에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와 체류시간이 넘었다고 하면 그들이 스스로 자신이 불법체류자라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조선족들이 감정적으로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바로 이 불법체류자라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라는 것에 거부하는 이유는 하나, 조선족이 소중하게 가지고 있는 고향의식에 대한 박탈감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중국공민이면서도 조선족은 한국에서 자신들이 외국인취급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일수밖에 없다. 불법체류자는 불법체류자인 수밖에 없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조선족은 중국에서는 공민이요, 한국에서는 외국인이다. 중국에서는 체류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한국을 망라한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체류기간은 정해져 있다. 그것을 어기면 곧 불법체류자가 된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조선족의 현실이다.

그러나 조선족의 불법체류 문제는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 또한 신기하다. 이것은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대인이 산꼭대기로부터 벌판으로 내려와 정착하듯이 현대인은 저임금지대에서 고임금지대로 이동하기 마련이다. 작디작은 한국에 43만의 외국인노동자가 이동해 와있다는 것이 이 점을 설명해 준다. 이 43만 명중에 조선족이 있다. 이런 지극히 합리적인 논리에 의한 이동이었음에도 조선족은 감정적인 요소 하나를 더 가지고 끼여들었기에 한국체류 조선족문제가 한결 복잡하게 되었다. 한국은 조선족의 고국이고, 강렬한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일본에 돈벌러 간 사람들은 일본인에게 검문 당해 강제귀국을 당해도 일본을 원망하지 않을뿐더러 일본의 선진적인 면을 찬양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강제출국을 당한 사람들은 한국을 원망한다. 한국은 내 것이라는 것, 그것을 박탈당했다는 밑바탕의 의식 때문이다.

불법체류자라는 것 때문에 생기는 감정의 분열, 중국이 저임금에서 고 임금에로 향상할 때까지 계속될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조선족이 스스로 고국을 이해하는 입장이 돼보면 어떨까?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국타향에서 싸웠지만 그것은 할아버지 세대의 공로이다. 내가 고국을 위해 한 일은 무엇인가, 이 작은 나라가 전쟁의 폐허 위에 지금의 한국을 일으켜 세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것은 전부 한국인 자신의 피땀과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 이런 고국에 와 돈을 벌어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중국에 가서 쓰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필요하다. 일방적으로 혜택만 바라는 입장이 아니라면 원망은 줄어들고 감사의 마음이 더 생길 것이다.

불법체류자라는 것 때문에 한국 체류 조선족 문제가 비극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 역시 안타깝다. 한국에서 조선족은 인권이 제대로 보장을 받지 못하고, 법적인 제어장치가 되어있지 않기에 악덕주들의 먹이가 되어 있다. 병들어 죽어도 묻힐 곳이 없고, 임금체불을 당하고도 신고할 곳이 없고, 검문 당하면 빚더미를 진 채 강제축출을 당하고, 차별을 당해도 감내하기만 해야 하기에 상처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해결의 방법, 조화의 방법은 없는가?

이것 역시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한국정부에서 지혜롭게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를 바란다.

한국의 여러 민간단체들에서 이 문제를 풀어 나가고자 하는 노력이 고맙다.

***납골당**

한국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고 취재하고 싶었던 곳이 세 곳 있었다. 역시 조선족 불법체류자 수만 명이 가장 두려워하는 세 곳일 것이다.

그 세 곳은 당신들은 조선족입니다, 당신들은 중국인입니다, 당신들은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벌금하고, 강제 추방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불법체류자들은 꿈속에서도 이 세 곳으로부터 조여오는 위협에 가위 눌려 소스라쳐 깨곤 한다.
그 세 곳은 외국인 보호소, 출입국 관리소, 성남 교회에 있는 납골당이다.

나는 그중 한곳- 납골당밖에 취재하지 못했다. 휘경동 외국인 보호소는 ‘한중 동포신문사’ 권영호 주필을 통해 취재를 부탁했으나 사절을 당했고, 출입국 관리소는 ‘조선족뉴스’ 발행인 최황규 선생을 통해 소개를 받았으나 까다로운 수속절차를 내놓아 취재를 포기했다.

납골당만은 사절도 거절도 없었다.

합법적 체류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 시간이 바쁜 와중에 지나친 피로 때문에 갑자기 병에 걸려 드러누웠다. 한창 정부와의 갈등 때문에 병원마다 문을 닫고 의사들이 데모하는 때였으므로 나는 백병원 등에서 거절을 받고 치료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건강이 악화되고 있어 어떤 사람들은 납골당에 대한 취재를 포기하라고 권고해왔다. 납골당에 골회함으로 놓인 영혼들이 나의 취재를 기다릴거라는 생각이 들어 취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중국으로 떠나오기 전 마지막 날인 9월 24일에 성남교회에 있는 납골당으로 떠났다. 작가 김승옥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성남시 태평2동에 있는 성남교회를 찾았을 때는 오후 세시 경이었다. 추모의 생화라도 살 생각을 했지만 성남교회를 찾아 가는 길에서 너무 많이 헤매고 보니 꽃가게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 생화 대신 이 책을, 나의 마음을 진정하고 싶었다.

길에서 세 시간을 허비했으므로 항상 시간에 쪼들리는 김선생님에게 미안했다. 혼자라면 아마 길에서 헤매다가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성남교회 마당에는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외국인들과 중국에서 온 한족, 조선족들이 가득했다. 층계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좁은 복도를 따라 독서실, 침실, 사무실이 있었고, 사무실 맞은편에 납골당이 있었다. 독서실에는 사람들이 가득 앉아 무슨 책들인가 열심히 보고 낮은 소리로 토론하고 있었고, 침실에는 조선족을 망라한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수십 명 있었는데 한켠에서는 의사가 병을 보아주고 있었다.

이상린 교육이사가 나를 만나 상황을 소개해주었다. 외국인 인권문제 해결에 일생을 바쳐온 김해성 목사는 전화취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법체류자들은 외국인이어서 죽어도 한국에 묻힐 수 없다. 김목사는 불법체류자들의 장례를 한 주일에 평균 2~3건씩 치르며, 이날도 한 구를 치렀다고 했다. 외국인노동자의 집, 중국 동포의 집을 세워 이 때까지 이 곳을 거쳐간 사람들이 10만명, 사망해 장례를 치른 차수는 7백~8백회 된다고 했다. 지금 이 곳에 기거하는 조선족을 망라한, 동남아시아인, 동유럽, 남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가 무려 백여 명이나 된다.

드디어 납골당의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이상한 내음이 진동했다. 나는 이것이 영혼들이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먹 글씨로 이름이 적힌 하얀 색깔의 보자기, 일찍부터 자신의 추도식을 위해 찍어둔 양 한결 같이 짙은 색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골회함에 붙어있는 사진들, 그러나 그것은 천당같이 믿었던 한국으로 떠날 때에 여권용으로 찍은 사진임을 나는 안다.

육체가 재로 되고 영혼이 구름 같이 떠있는 자신을 유일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이 한 장의 사진에는 여전히 떠나올 때 가지고 왔던 꿈이 실려 있었다. 사진은 그 순간에 대한 영원이다. 죽은 자에게는 영원에 대한 영원이다. 플래시가 번쩍 하는 촬영기 앞에 앉았을 때 ‘코레안드림’을 가득 촬영한 사진, 이 사진이 한국 땅에서 골회함에 붙여질 것을 그 자신이 어찌 알았으랴! 그리고 죽어 묻힐 곳이 이 땅에 없음을 어찌 알았으며, 바다 건너 집으로 가지 못하고 객지를 떠도는 유령이 될 줄을 또한 어찌 알았으랴.

문득 연변작가협회의 회원이셨던 소설가 박은 선생님이 떠올랐다. 한국에 가서 번 돈으로 꼭 창작집을 묶을 것이라고 했던 그가 골회함으로 돌아와 그의 유고집이 아들과 문인들의 모금에 의해 출판되었다. 돼지고기국 생각이 절절하지만 돈이 아까워 먹지 않는다고 썼던 피눈물 겨운 그의 한국체류 기간의 일기들이 떠올랐다.

박은 선생님도 이 납골당을 거치셨을까?

그 사진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는 나에게 그들은 말이 없다. 빚을 내어 촉도의 길과 같이 험한 한국입국을 하고, 생사를 걸고 돈을 벌었던 그것의 무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인가? 생시에도 꿈에도 운명의 덫 같은 휘경동 외국인 보호소를 탈출했던 노력이 결국 납골당에 와 종료된 것에 대한 체념인가? 그 한을 말로써 할 수 있었으면 내가 왜 죽음으로 대답하랴, 라는 대답을 하고 싶은 것인가?

정관욱, 조영희(2000년 3월 5일), 김인숙, 이병선, 최석린, 강진순, 김일봉, 박원철, 손옥련, 김기옥, 이운연(2000년 5월 10일), 도재봉(2000년 8월 26일), 최종만(2000년 8월 17일).........

이제 그들은 출입국 관리소, 외국인 보호소, 납골당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됐다. 불법체류자, 검문 등도 두렵지 않게 됐다. 그들은 코레안 드림에서의 영원한 탈출을 실현했다.

하지만 그들의 골회도 불법체류를 하고 있었다. 외국인이어서 묻힐 땅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우리 할아버지들의 꿈을 생각했다. 고향길이 막혔을 때 죽어서나 고향으로 가겠다고 유언을 남겨서 많은 집들에서는 청명이나 9월 9일 무탈의 날이면 두만강 합수목에 가서 고인의 고향 행을 만들곤 했었다. 골회함을 두만강에 띄워 고향으로 보내는 것이다. 나의 친구 윤정삼씨는 북경 노신 문학원에 가서 공부할 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중국에서는 유명한 한족작가 쟈핑오가 감동하며 그 이야기를 소설화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간 영혼들도 입국을 못할 고향 행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이미 머무를 땅이 없으니 말이다.

줄줄이 놓인 골회함들 곁에는 이루지 못한 코레안 드림을 상징이나 하듯이 시들은 생화가 놓여 있었다. 그 옆방에는 아직도 도망중인, 조선족을 망라한 백여 명의 외국인들이 코레안 드림에 지친 심신을 치유하려고 머물러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납골당을 나오면서 나는 골회로 남은 영혼들에게 말했다. 언젠가는 조선족들에게도 코레안드림이 흘러간 역사로 남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