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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들의 견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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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들의 견해(3)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62>조선족사회 문제점 및 ‘애인현상’에 대한 토론(3)

까다로운 연길 부부(40대):
7월 27일, 매일 평균 34도를 기록하는 무더운 서울의 목요일이었다. 삼면이 반원형으로 유리창에 둘러 싸여 있는 베란다, 내다보면 바로 한강이 보여 그 베란다에서 맥주라도 한잔 기울이고 싶은 집에서 까다로운 연길부부를 취재했다.

남자 나이는 나와 비슷했고, 여자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 어려 보였다. 남자는 수척한 모습에 조금은 대머리였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여자는 진보라빛이 섞인 루즈 칠이 진했다. 이목구비가 선명하여 지적인 인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첫눈부터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취재같은 건 별 흥미가 없다고 했다.

답답한 분위기였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는 서서히 진행되었다.

남자는 '합법'적인 3년 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워낙은 연변 모 법 기관의 기사였고, 후에는 자신의 차로 택시 업을 하였는데, 동생이 반달 내에 한국 수속을 해주겠다고 해서 자신의 차를 팔아 5만원(한화 7백만원)을 내고 입국했다.

"한국체류 조선족 중에 저의 경우는 3% 에 해당됩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월 1백만원을 받기에 자주는 아니지만 택시라도 탈 수 있고, 합법적인 체류이기 때문에 자기 통장이라도 가지고 있습니다. 집사람과는 이틀 차이로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는 그에게로 여자가 자꾸 눈치를 보이는 것 같았다. 여자는 나에 대해 선입견이 있는 상 싶었고, 흥미 없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친구였던 한국인 미스터 조에게로 모처럼 놀러 왔다가 나를 만난 것 때문에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는 상 싶어 미스터 조도 적이 불안해했다.

여자는 "교육을 받았다"라는 이야기로 보아 대학 정도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고, 그러나 중국 연길에서의 구체적인 자기 직업은 말하지 않았다.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는 모르지만 홍콩으로 해서 한국에 입국했다고 했다. 이 때는 불법체류를 하며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일한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다 나중에 나온 이야기였다.

그래도 남자는 그냥 앉아 있기가 답답한지, 아니면 내 처지가 딱해 보였던지 먼저 입을 열었다.

"한국인들이 연길에서 택시 기사들에 당한다는 보도가 나간 후,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한국인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거든요. 정상적으로 노동해 돈을 버는 조선족들이 정신피해를 받는 겁니다. 우리 경우 직장에 한국인들이 더 많은데, 그들이 모두 조선족들에 대해 안 좋은 눈길을 주면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이 때 여자가 반발하듯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걸 상관할 필요도, 나쁘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조선족이 이 나라에 왔으면, 일해 돈을 벌어 갈 수 있게 한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 해요. 이 나라는 작은 나라이고, 자원이 좋은 나라도 아니고, 개개인의 피난 노력으로 부강을 일으킨 나라거든요. 한국인도 힘들게 일해 돈을 버는데, 많은 사람들이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하면서 돈을 버는데, 우리라고 왜 자꾸 한국인과 똑 같이 잘 대해 달라, 힘들다, 고생스럽다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어요? 한국인도 일본, 미국에 가서 차별을 당하면서 힘들게 벌어다가 사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는 아무 원망도 없어요. 여기서 한국의 선진적인 것을 배워가고, 중국 가서 한국인들처럼 잘 살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저는 열심히 일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는 걸 두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해요. 일을 잘 해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선족들에게 고생을 겪을 준비가 안되었으면 한국에 나오지도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자기 리익 때문에 나와서 왜 자꾸 한국인을 욕하는 겁니까!"

참 좋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라고 하자 그녀는 끝내는 조금은 격동한 어조로 성급히 한마디를 내쏘았다. 아무래도 내가 알아듣게 해야겠다는 뜻이 다분했다.

"작가께서 한국체류 조선족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시는데, 한국인이 나쁘다식의 글을 쓰신다면 저는 안 좋게 생각하겠습니다. 조선족 자신이 열심히 일해 인정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썼으면 좋겠어요. 지금 어떤 사람(조선족)들은 자기는 안 보고 남(한국인)만 자꾸 나쁘다고 그런 글 쓰잖아요. 가진 자는 반드시 없는 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식의 그런 도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런 글 좋아 안 해요."

그제야 나는 나에 대한 그녀의 쌀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일방적으로 조선족은 당한다, 한국인은 나쁘다, 라는 글을 쓰려고 하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이런 오해는 한국인들에게서도 받았었다. 예를 들면 미스터 조도, 대림동 교회의 일부 직원들도, 그리고 내가 다른 관계로 만났던 다른 한국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스스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내가 일방적으로 조선족을 감싸는 말만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취재의 취지를 설명하고서야 그녀 기색은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열을 내어 나의 취재를 받아주었다.

여: 우리 부부는 아이 공부 때문에 나왔어요. 그렇지만 저는 중국서 콩나물 장수를 해서 가정을 유지하고, 아이를 공부시키는 농촌 아줌마들을 보면 아이를 떼어놓고 나온 자신이 아주 못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중국에서도 자그마한 장사를 벌이면 어지간히는 살 수 있는데, 왜 아이 떼어놓고, 남편 떼 놓고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이런 걸 생각하면 저를 포함해 한국에 나오는 여자들이 자기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남: 중국서 택시를 하면 한 달에 6천, 7천 원은 벌잖아요. 그거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나왔잖습니까. 저는 차까지 다 팔고 온 사람이니까, 할 수 없이 본자는 벌어야겠습니다.

여: 식당서 힘 다 빼고 돈 못 받는 사람은 적어요. 열심히 일하면 받을 수 있어요. 일 잘하면 월급 더 주면서도 갈까봐 애원하는 정도죠. 중국서도 마찬가지지만, 능력만 있으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중국서도 가만히 있으면 누가 돈을 주나요? 조선족들이 자기 능력을 보지 않고 자꾸 한국인만 탓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한번은 중국 조선족이 전화하는 걸 본적이 있어요. 두 달 월급을 못 받았다고 해서 불쌍한 생각이 들어 위안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앞의 말도 변변히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한국인들은 자기들끼리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업신(차별시) 보는 거예요. 한국에 나온 조선족들 중 70%는 중하 차원의 사람들입니다.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러니 당하기 마련이죠.

그들도 한국체류 조선족 사회 '애인현상'에 민감한 태도를 보였다.

남: 조선족들 중에 한국식대로 '애인', '자기'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 (짜증스러운 표정으로)백퍼센트예요. 한국에 나올 때부터 남자나 여자나 다 가정을 버릴 생각이 다 되고 있는 듯 싶어요.

필자: (개인적인 상황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며)그럴 수가 있겠어요. 나올 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남: (그럴 수밖에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백퍼센트는 아니지만, 거의 석 달을 지나지 않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시골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애인 없으면 병신처럼 생각하더라구요. 만날 때는 다 자기 조선족끼리 만나죠. 30세 이하는 홀도 보며 내번지고(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사람 많아요. 단시일 내에 돈 벌고 돌아가겠다는 조급한 심리가 있는 거죠. 이렇게 벌어도 남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경멸하는 표정으로)애인 있는 사람들 돈 못 벌어요. 서로 쓰거든요.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각기 직업을 다른 곳으로 바꾸고 숙식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며 헤어지거든요.

남: 서로 재미가 없더라구요. 애인이 있는 사람은 자기 가정은 유지해도 남편이나 아내의 각색 때문에 갈등이 생겨 재미없고, 가정을 버리고 이혼한 사람도 애인과는 한국이라는 이 특정된 환경에서 일시적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때문에 이루어진 임시적인 파트너이기 때문에 결국 서로 얼마 살지 못하고 갈라지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여: (남편을 흘겨보며)남자들 치고 자기는 무책임하게 바람피우고, 여자(아내)나 자식은 깨끗하기를 바라지 않는 남자는 없잖아요.

까다로운 연길부부의 언쟁을 들으며 문뜩 조선족사회 '애인현상'에 대한 토론에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이 너무 많이 구체적으로 개입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느낌은 적중했다. 그들도 '애인'문화의 갈등을 심하게 겪었고 부부감정이 심하게 흔들렸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한동안의 풍파를 겪고 나서 그들은 다시 서로를 확인하며 화기애애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는 상 싶었다. 개인적인 은사 부분이어서 이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적지 않기로 한다.

미스터 박(50대):
성이 박씨인 조선족은 상기 조선족들보다는 또 다른 입장에서 자신의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미스터 박은 흑룡강성 사람이고 한국에 나온 지 벌써 십 년이 되었다. 그동안 중국에 네 번 정도 다녀갔다. 이 때는 체질적으로 한국에 적응되어 중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당분간 전혀 없는 상 싶었다. 아내도 같이 서울에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조선족 김 선생을 통해 소개를 받아 용산 역 다방에서 만났다. 체크무늬의 짧은 적삼에 붉은 색 러닝을 입었는데, 아무리 한국에 오래 살았다고 해도 첫눈에 한족 지구에 오래 산 조선족 차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경상도 말투에 가끔은 중국말을 섞어서 썼다.

내가 연변에서 왔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흘러간 사랑에 대한 애수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나를 찬찬히 보더니 자기 애인과 비슷하다고 했다. 남자들은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곧잘 상대방에 대한 터무니없는 착각으로 달래곤 한다. 남자주체의 사회에 많이 있은 나였기에 헤어진 애인에 대한 그의 그리움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혹 좋은 이야기를 취재할 수도 있겠다는 것에 요행을 걸고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없냐, 라고 청을 들었다. 그냥 청을 든 것에 불과한데 뜻밖에 그의 깊은 곳에 묻혀있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박의 은사에 속하는 이 이야기는 비록 그 한 개인의 경험이지만, 애인이 있었거나 지금 애인을 가지고 있는 한 부류 조선족들의 경험을 대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족 '애인현상'에 대한 토론에 참여한 독자들이 이 이야기에 나름대로의 판단을 해보기 바란다.

미세스 손은 바로 여기 (용산 역 다방 밖을 가리키며) 전화 옆에서 만났어요. 내가 한창 전화를 하고 있는데, 등 뒤로 쫓아와 연변말로 "아저씨, 말 좀 물읍시다"라고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돌아보니 서른 살이 될랑 말랑하고 애티 나고 호리호리 했어요. 조선족 아니냐고 물었더니 반색을 했어요. 한동안 난 일자리가 떨어져서 이 다방에 하루에 다섯 번도 더 넘게 드나들곤 했어요. 그녀는 이 부근에서 일하는 모양 그 동안 내가 이 전화박스에 서서 가끔 흑룡강 친척들에게 전화하는 모습을 눈여겨 본 모양이었어요.

표정을 보니 불안해 보여서 다방에 가자고 했어요. 연변 화룡에서 한국에 나온 여자였어요. 나온 지 몇 달 됐냐 물었더니 넉 달 째 된다고 했어요. 워낙 문화단체에서 편안하게 월급을 받아 살아가던 여자인데, 일 할 줄을 잘 모르는데다가 한국 주인들이 색을 탐내 너무 달려드는 통에 돈도 못 받고 직장에서 나오는 때가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그 동안 번 돈이 1백만원 밖에는 안 된다고 했어요. 여자는 울면서 한국 나올 때 빚을 지고 나왔는데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난 여자가 착해 보이니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한참동안 위안하다가 함께 있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어요. 나도 아내가 없이 혼자 한국 나와 돈을 벌다보니 무척 외롭고 힘들었어요. 내 말을 듣고 눈물을 줄줄 흘리던 여자가 금방 일어나 졸졸 따라오더라고요. 여자는 내가 무척 미더워 보이더라고 했어요.

내가 방세를 내고, 네가 보증금 내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그 때는 50만원 보증금에 월세를 10만원씩 낼 때었어요. 체질을 보니 힘든 일은 해 낼 것 같지 않고, 또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 다방이 알맞을 것 같아 소개했어요. 남자들이 지껄이면 찻잔을 제꺽 걷어 가지고 금방금방 가버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한다 하더라구요.

둘이 서로 도우면서 참 재미있게 지냈어요. 그 때는 한국이 한창 잘 나갈 때라 거리에 TV며 가구들이 나뒹굴었어요. 창피한대로 둘이 한밤중에 그런 것들을 걷어 들여 차려놓고, 주인이 도배해준 방에서 살림을 했어요. 힘들 때 서로에게 힘이 되었어요. 그녀가 감기에 걸려 앓게 되면 살뜰하게 간호해주었어요. 그녀는 내가 있으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 씩씩하게 일하러 다니곤 했어요. 그녀는 나를 끔찍이 사랑해줬고, 나도 그녀를 많이 사랑해 줬어요. 지금도 그녀를 잊을 수 없어요.

한번은 그녀가 전화를 하는 걸 들었는데, 그녀 엄마가 고향에 가서 형제들을 찾으라고 하는 모양이었어요. 알고 보니 나처럼 경상도였어요. 여자는 못 찾겠다고 하며 전화를 놓으려고 했어요. 나는 그녀에게 고향 주소를 상세히 물어보라고 했어요. 고향주소를 알게 된 후 우리 둘은 여행 삼아 경상북도 안동으로 떠났어요.

면에 가서 우리가 찾고자하는 손씨 ××호적을 들추어보니 '이사를 했다'는 글이 적혀있었어요. 돈 쓰고 헛방 쳤다고 도달거리는 그녀를 달래 점심을 먹고 다시 면사무소에 가서 이곳 경로원이 어데 있냐고 물었어요. 경로원에 찾아가서 노인네들에게 물었어요. 그중 팔순이 되는 노인이 반색을 하더니 손씨 ××가 어렸을 때 짜개바지 친구고, 이십리 밖의 아무 동네로 이사를 갔다고 알려주었어요. 너무 기뻐 인사를 잘 드리고 그 곳으로 찾아 떠났어요.

산골이라 그 곳에도 중국처럼 손잡이 뜨락또르(경운기)가 있더라구요. 그 차에 앉아 잠간 사이에 그 동네에 이르렀어요. 미세스 손의 아버지의 사촌에서 팔촌까지 다 있었어요. 서울에는 삼촌이 있고 이모도 있었어요. 좌상인 듯한 팔순 되는 어르신님에게 절을 올렸더니 미세스 손의 남편이냐고 물었어요. 어물어물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부부방을 꾸며주더군요. 그래서 미세스 손의 남편역을 하면서 이틀간 대접을 잘 받았어요.

돌아와서 그녀 삼촌을 찾으니 청량리에 작은 음식점을 꾸리고 있었어요. 그녀 삼촌은 조카를 보고 반가워하며 곁집에 방을 꾸며줬어요. 그 곳에서 한 달 정도 살았어요. 난 방법을 대어 그녀 부모를 한국에 초청했어요. 어머니는 왔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기에 다른 사람을 아버지 대신으로 청해 초청비 4백만원을 그녀에게 벌어주었어요. 그녀 어머니에게는 90만원짜리 가정부 자리를 찾아 드렸어요.

그녀 어머니는 그동안 그녀를 잘 보살펴줬다고 고맙다고 했어요. 일요일이면 우리가 사는 집으로 오곤 했어요. 그녀 동생들도 와서 시끌벅적 했어요. 그녀 어머니와 동생들이 일자리가 없어지면 내가 나서서 당 날이거나 이삼일 사이에 찾아 주곤 했어요. 그녀 한국 이모도 혀를 내둘렀어요. 그녀 어머니가 일자리가 없어져 전화를 해오면 "가짜 사위, 일이 또 끊어졌어. 아이유, 머리 아파!"라고 했던 이모였거든요. 그녀 동생들도 나를 아저씨(함경도말로는 형부를 아저씨라고 함.)라고 불렀어요.

그러는 중에 아내가 한국에 들어왔어요. 아내와 미세스 손과 함께 보름을 지냈는데 둘이 서로 맞을 리가 없지요. 미세스 손이 견딜 수 없어서 나갔어요. 아내는 중국에 있을 때 내가 한국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서 병에 걸릴 가봐 여자 한명과 지내는 것까지는 허락한다고 했었거든요. 나도 아내에게는 미세스 손과의 관계를 속이지 않고 이야기했어요.

그녀가 돌아간 후 한번은 너무 보고 싶어서 중국 집으로 가는 길에 화룡 그녀 직장에 들렸었어요. 나를 보더니 "오빠-!"라고 소리 쳤어요. 이틀을 참 꿀같이 지냈어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미스터 박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 뿜었다.

"그녀에게도 가정이 있었어요?"
라고 바보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불안해 보여서 다시 찾아 안 갔어."

"후에도 다른 사랑을 했어요?"

"십 년을 있었으니까."

그 말에는 마치도 객지 생활과 외로움이 사랑을 만든다, 라는 답이 들어 있는 상 싶었다.

"그녀와 재미있게 진실로 사랑했어."
라는 것이 그 중 한 가지 확실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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