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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인 것이 자랑스러울 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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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인 것이 자랑스러울 때(2)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59>

이도율씨는 열심히 일하고, 정확히 일하는 것으로 사장과 직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이 때는 대림정관광 식당으로 옮겨온 지 금방 한 달이 됐다.

“아무 곳에 가든 조선족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면 자신이 열심히 하는 걸로 조선족의 이미지를 정확히 심어줘야 해요. 한국인들이 우리를 차별한다고 생각되면 우리는 더욱 열심히 일해 그 편견을 없애야 해요.”

이것이 이도율씨의 견해다.

전화가 울려 우리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제 한 시간이면 도율씨는 출근을 해야 한다.

“국제전화카드를 사러 조선족아줌마가 왔군요. 지하철입구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비밀번호가 적혀있는 이 국제전화카드는 대림동 서울조선족교회에서 판매권을 가지고 있었다. 국제전화카드이익금으로 교회건물을 사기 위해 한국 체류 조선족의 지리 특징을 잘 이용하고 있었다. 수만의 조선족들마다 한 달에 집에 전화하는 차수가 많은 것을 계산해 볼 때, 교회의 계산은 정확한 것이었다. 조선족에게도 경제적인 카드였다. 나도 이 카드를 이용해 보았다. 보통 전화카드는 1만원권이라도 간단한 문안전화를 중국에 두 번 정도, 아껴야 세 번을 칠 수 있지만, 이 카드로는 그 이상을 칠 수 있다. 평일에는 34분, 휴일에는 40여분을 칠 수 있어 경제적이었다. 교회는 교인들더러 전화카드판매에 적극 동참해 ‘자신의 교회건물’을 가지도록 하자고 호소했고, 조선족 교인들도 자칭 홍보원이 되는 사람이 많아 카드 사용률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이도율씨가 약속한 장소에 가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고 다시 사닥다리같이 경사도가 심한 작은 층계를 타고 지독한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지하 숙소를 나왔다.

그는 나를 지하철입구 슈퍼에 안내했다. 한쪽 구석에 하얀 테이블이 있어 그곳에 가서 앉았다. 그는 커피가 좋으냐, 쥬스가 좋으냐 라고 물었다. 나는 우유를 달라고 했다. 그는 딸기맛 산우유를 사놓고 약속한 아줌마와 만나러 부랴부랴 나갔다. 3분도 안 되어 곧 돌아왔다.

“언제부터 교를 믿으셨나요?”

나는 그가 서울조선족교회의 카드판매를 위해 뛰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질문했다.

“중국서부터 믿었어요. 교회에 다니기 전에는 저도 친구와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하는 등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것이 교회에 다니게 된 계기였어요.”

아버지와 삼촌들이 다 술을 좋아했다. 한번은 형제간에 싸움이 있었는데 바로 그날 아버지가 사망했다. 아버지의 사망 때문에 충격이 컸고 인생이 허무해졌다. 이 때 전도사가 와서 그더러 교회에 한 번만 가보라고 했다. 친구들과 같이 갔는데 첫날 목사님의 설교가 그의 가슴을 울리더라고 했다.

“하느님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보셨나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은 대상만물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어요. 모든 물건도 다 만든 이, 설계한 이가 있고, 만물도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주인이 있어요. 사람은 사람일뿐이지 원숭이가 진화한 것이 아니에요. 과학이 고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원숭이를 아무리 양성해봤자 인간으로 진화시킬 수는 없으니 원숭이진화론은 증명되지 않았잖아요. 만물을 창조한 이는 오직 하느님이세요.”

그는 나름대로 아주 확신이 있게 말했다. 신앙자유인 데야 아무리 내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그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이도율씨는 흑룡강성 목단강 쪽의 한 시골에 살았다. 집에는 57세 되는 어머니, 31살 난 여동생과 28살 난 남동생이 있다. 중국에서 5푼이자 돈 7만원(한화 9백40만원 정도)을 꿔서 수속했다. 빚은 한국에서 1년 넘게 벌어서야 갚았다. 금융한파 때문에 한국 돈이 값이 떨어져 고생스럽게 벌어서 쓰지 않고 모았다. 다른 남자들은 건축현장에서만 일자리를 찾다보면 일자리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음식업에서 뛰다보니 일자리는 계속 유지하는 편이라고 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애티나 보인다고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세관 통관 시에 나이 때문에 고생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 분들도 나이가 안 맞는다는 거예요. 워낙 가짜 공무수속인데, 저를 불러 세워 속이 뜨끔했죠. 나이가 얼마냐, 라고 물어 보기에 31살이라고 대답했더니 머리를 갸웃거리는 거예요. 무슨 일로 오냐고 묻더라구요. 그 때 함께 동행한 사람이 있었어요. 브로커가 시켜준 대로 말했죠. 브로커는 동행한 사람이 사장이고, 제가 기술자라고 대답하며, 두부제품과 관련해 기술교류를 하러 온다고 대답하라고 가르쳤거든요.”

그의 한국돈벌이계획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첫해는 벌어서 빚을 갚았고, 두 번째 해에는 어머니와 동생의 병을 치료했다고 했다. 여동생은 정신과치료를 받았고, 어머니는 위, 간, 관절 치료에 맹장수술까지 했다고 했다.

“세 번째 해부터는 돈이 모여지는 거죠. 어머니 치료비로 중국 돈 2만원(한화 3백만원)을 보내 어머니명함으로 저금시켰어요. 나머지 돈은 제가 간직하고 있어요.”

그는 카메라에 취미가 있었다. 신체가 건강한 편이 못되기에 앞으로 중국에 돌아가면 사진관을 차리고 사진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교회행사가 있을 때면 그는 촬영하는 것으로 무료봉사를 했다.

“촬영봉사는 돈이 많이 들텐데요?”

“저는 봉사를 즐겨요. 복지원에 가서도 봉사했어요. 의지할 데 없는 한국노인들을 위해 봉사했죠. 장애인공동체에 가서도 봉사했어요. 장애인 공동체교회가 성남에 있는데, 그곳 가서 1년 봉사했어요. 한 달에 일요일이 네 번이라면 두 번 정도 봉사하고, 두 번 정도 예배를 다녀요. 복지원에는 많이 다니지 못했는데, 장애인공동체에는 많이 다녔죠. 주말이면 장애인들이 저를 기다려요. 기다리는 모습 때문에 더욱 열심히 다녔어요. 중국에서도 봉사는 다녔지만 노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못 해봤어요. 이곳(한국)에서는 했지요. 노인들이 너무 불쌍해요. 이 좋은 나라에서 상상외로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는 일이 많더라구요. 한 아줌마는 40세밖에 안되는데, 십년 전에 병에 걸리자 남편이 이혼하고, 자식도 남편도 전혀 면회를 오지 않더라구요. 정말 불쌍했어요.”

“한국서 돈을 벌려면 봉사하기가 힘들텐데요?”

“봉사하러 가면 말투를 딱 들어보고는 조선족이 봉사를 왔다고 한국인들 엄청 반가워해요. 그럴 때면 제가 조선족인 것이 자랑스러워요. 봉사하는 것이 즐거워요.”

나는 한국에 체류하는 우리 조선족들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냐고 물었다.

“우리 조선족들 중에 예절이 없고, 술, 담배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시고 피우는 것이 참 안타까워요. 한국의 예절을 잘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요. 학교 식당에 있을 때의 일인데요, 사장에게 한 조선족아저씨를 소개했어요. 그 아저씨는 사장님 앞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물어보는 말에 건방지게 대답해서 제가 창피했어요. 사장님이 저의 앞에서 그 아저씨가 예절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할말이 없었어요. 어느 날 그 아저씨를 조용히 불러서 예절에 관해 이야기해 드렸죠 뭐.”

조선족의 이미지가 좋아질 때만이 조선족인 것이 자랑스럽다. 한국에 나온 조선족들이 돈밖에 모르는 모습이 아닌, 당당하게 돈벌고 책임성이 있고 신용을 지키는 이미지를 만들기를 바란다고 이도율씨는 거듭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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