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신문사 동포언론인들**
7월 28일, 서울의 지하철에 익숙해질 정도로 한국 체류 조선족 취재가 한 달을 넘기고 있을 무렵, 이날 나에게는 힘을 느끼게 하는 취재가 있었다.
그 동안 한국 최하층에서 힘들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포들을 취재하며 나도 나름대로 곤혹을 겪었다. 한국 체류 조선족의 총체적인 모습은 대체로 아픔 그 자체였다.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결국은 중국보다 훨씬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 맨 주먹과 힘 하나로 부딪치는 처절한 모습이었다. 불법체류자의 호소할 길 없는 정신적인 아픔과 육체적인 아픔을 단지 돈벌어 잘 살자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의 혹사로 한화를 바꾸고 달러를 바꾸고 있는 이들의 불안한 인권상황에 대해 한국의 정직한 시민단체와 인권단체, 종교단체가 대변해 주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안타까울 때 우리 조선족들에게 동포신문사가 있고 동포언론인들이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양재역 1번 출구에서 백 미터쯤 직진하다가 수산협 오른쪽으로 돌아 까치약방 오른 편 5~6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중동포신문사’를 찾았다.
신문사는 긴장한 분위기에서 편집회의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조선족을 주체로 한 언론을 의논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경건한 의식같이 느껴졌다. 회의가 끝나자 한국 체류 조선족들인 ‘한중동포신문사’ 회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여기저기에서 임금체불에 관해, 사기피해, 산재피해, 그리고 검문 당한 친우 때문에, 국제결혼, 자식입국 등 문제와 관련해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 신문사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체불된 임금을 다문 얼마라도 받았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얼마라도가 아니라, 한 푼 남김없이 받아 내야죠. 힘드셨겠습니다!”
임금 체불을 당해 찾아온 회원동포에게 이한영 기획실장이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가슴속에서 뭉클 일어나는 감동을 느꼈다. 임금체불이라는 것을 내가 직접 느껴 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그 아픔은 이미 간접적이라는 것을 넘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아픔은 자주 여자인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곤 했다. 이한영 기획실장의 말이 어느 정도로 현실화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들으며 저도 몰래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이러할진대 당사자에게는 또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는가.
이어 권영호 주필을 만났다. 권주필은 한국에 나오기 전에 흑룡강신문사에서 근무하셨다고 했다. 나는 일 때문에 흑룡강신문사에도 여러 번 간 적이 있었으므로 초면의 권주필이었지만 금방 가까워졌다. 내가 취재중에 부딪쳐 온 문제에 권주필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었다. 내가 고민해오던 문제들에 권주필은 먼저 부딪쳤고 먼저 사고했고 먼저 답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함께 같은 문제에 부딪치고, 같은 문제를 사고하고, 같은 문제를 위해 뛰고 있었다.
권영호 주필에 대한 일문일답 식 취재기를 그대로 싣는다.
필자(이하 필): 권주필님은 재한 우리 동포들을 얼마로 추정하고 계십니까?
권영호 주필(이하 권): 출입국 관리소에서는 연인수가 16만이라고 했고, 민간단체들에서는 13만 8천이라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재한 조선족 동포가 16만이 넘는 걸로 통계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보고 있는 이 16만에는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유학생, 합자 기업의 공무인원, 친척방문자 등도 망라돼 있습니다. 그 중 위장결혼을 망라한 국제 결혼자가 4만, 불법 체류자가 5만 4천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중에는 인권이 무시당하고, 피해를 당하는 상황이 엄중합니다. 동포 여성들 중 한국 악덕자들에 의해 데이트를 강요당했다가 신고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동포들은 신고를 가장 겁나하기 때문에 이것이 약한 고리로 잡혀 더욱 피해를 당하곤 합니다.
필: 지금 재한 조선족들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권: 한국에는 인권보호단체가 많습니다. 종교단체도 많습니다. 그들 중 좋은 일을 하는 단체도 많지만, 조선족들의 돈을 받아먹고 일은 하지 않는 단체들도 많습니다. 체불임금을 받아주고는 10%를 받아먹거나 검문 당한 조선족들을 빼내주고는 보증금을 50만원씩 받습니다. 어떤 단체들에서는 3백만원까지도 받습니다. 어떤 단체들에서는 사기피해, 임금체불, 산재피해 등에 관해 조선족들을 위해 일을 한다고 하지만 법에 신고만 해주고, 돈은 조선족들 자신이 받으러 다니라고 합니다. 불법체류자들은 안전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일을 안 해주는 단체들이지요. 오갈 데 없는 우리 동포들은 믿기 싫어도 자기 보호를 위해 종교에 매달리는 겁니다.
일부 종교단체들은 데모, 농성을 하도록 동포들을 부추깁니다. 동포들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한국정부를 건드리기만 합니다. 한국 돈 벌고, 한국 법 위반하고, 한국 욕하고, 한국 정부와 민간인들의 반감을 사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이것이 바로 한국 체류 조선족의 이미지로 되고 있습니다.
조선족들을 한국에서 자기 권익을 수호하고, 한국 법을 잘 지키고, 열심히 일하고, 받은 것만큼 은혜도 알고, 갚을 줄도 아는 우수한 동포로 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언론으로 조선족들을 위해 대변하고, 조선족사회 및 한국의 법치화, 도덕화를 감독해야 합니다. 한편 정직한 한국인 민간단체들과 한국 정부와의 소통도 잘 하여 조선족들에게 한국을, 한국에 조선족을 이해시키는 작업을 하여 정확한 조선족 관이 수립되도록 할 것입니다.
필: 그렇게 되자면 우리 재한 조선족들부터 자신을 잘 지켜야 되지 않겠어요?
권: 물론이죠. 지금 재한 조선족을 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조선족 사회 엘리트들입니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인정을 받는 계층입니다. 둘째 부류는 불법체류자들이지만 공무원, 교사출신, 교육받은 사람들이어서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부류는 불법체류자들이지만 남한에 친척이 있어 뒷심도 있고, 여러 가지로 한국 상황에 익숙하기에 말썽이 적습니다. 넷째 부류는 불법체류자들로서 이삼년 벌어서 한국수수료 등 빚을 다 갚고, 어느새 간이 커져 한국식으로 돈을 쓰고 돈도 모으지 못하고 크게 법도 위반하지 않으면서 시간만 질질 끌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섯째 부류는 돈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격을 팔아먹는 사람들입니다. 여섯째 부류는 중국으로부터 이주해온 범죄자들로서 같은 조선족을 대상으로 협박하고, 돈을 강탈합니다. 가리봉, 구로동, 성남, 안산에 동포들이 집중됐는데, 이런 곳들에 조선족 범죄가 많이 발생합니다.
필: 동포신문사가 책임 크네요.
권: 어떤 조선족들은 자기가 잘못하고도 출입국 관리소, 외국인 보호소를 과장해 공소하죠. 일부 한국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의 동정심을 이용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조선족 편에 서다가는 자칫 사실을 왜곡해 보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잘 조사하고 사실 진상을 밝혀서 조선족들을 각성시키고, 조선족과 한국 정부 사이를 소통하는 역할을 합니다.
필: 중요한 일들을 하셔서 정말로 고맙고 기쁩니다. 신문사에서는 사기 당하고, 임금체불 당하고, 산재피해를 당한 조선족들의 제보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권: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는 아무 수수료도 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해결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모르고, 한국 법을 몰라서 돈을 뜯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한 동포는 검문을 피하느라고 한국인 신분증에 자기 사진을 바꾸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그 한국인의 구좌에 돈을 넣은 것은 큰 차실 입니다. 그 한국인에게 사건이 생겨 은행구좌가 중지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3년을 피땀으로 벌어 1천1백만원을 저금했는데 다 압류 당하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변호사를 찾으면 혹시 해결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돈을 찾자면 법적 재판장에 나서야 하기에 불법체류자로서는 그렇게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강제출국을 당하게 되니까요. 그 본인은 귀국을 각오했다가 우리 협회를 찾아왔어요. 그 사람에게 법적 교육을 했죠. 그러고 나서 사장이 7월 10일에 비행기를 타고 광주출입국 관리소를 찾아가 사정했습니다. 경찰들이 수사중이었고 곧 잡아들이려고 했는데 신문사가 담보를 서서 체포중지로 되었습니다. 농협중앙 위원장을 찾아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그 은행에 가서 하나하나 조사하여 밤 두시까지 끝내 은행구좌해제를 하고 13일 아침에 현금을 찾았습니다. 이런 일은 한국 역사에도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필: 한국 해당 부문에서도 참 너그럽게 잘 해주었네요.
권: 그럼요. 우리 신문사가 나서면 협조를 잘 해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동포의 돈을 떼먹은 오야지가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려서 찾기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핸드폰전화 주소 때문에 동사무소 등을 다 찾아 서류를 찾고, 그 사람이 이사간 곳을 찾아 근거를 딱 들이댑니다. 신문사이기 때문에 떼를 쓰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통비도 다 자기 돈으로 내고, 점심 한끼도 자기 돈을 내서 먹으면서 돈을 찾아서는 일전 한푼 경비를 떼지 않고 본인의 통장에 넣어줍니다. 한 동포는 2백만원을 체불 당한지 4~5년이 됐어요. 체불한 자를 찾아 요행 문제를 풀고 사정에 의해 두 달에 나누어 백만 원씩 가불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참 한심한 동포들도 있거든요.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왜 1백만원만 넣어줘요? 라고 전화로 소리치는데, 그런 때는 정말 정 떨어지죠.
필: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많나요?
권: 작가선생이 연변사람이지만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연변사람들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말 한마디를 해도 톡톡 튀면서(?) 인정머리가 없거든요. 흑룡강 사람들은 후더워요.
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선생님이 흑룡강 사람이셔서 그런 느낌이 든 것 아니세요?
권: 전 사실대로 이야기합니다. 심양 사람들은 친절하고, 남에게 피해를 안주고 자기 이속 잘 차리는 상술(商術)이 있죠. 단수가 높아요. 흑룡강 사람들은 후더워서 한국에서도 인정을 받아요. 연변 사람들은 이미지가 나빠요. 자기들끼리 모여도 연변식 중국말을 절반 섞어 고함을 지르고, 서로 피해를 주고 서로 신고하죠. 외국인 출입국 관리소 조사자료를 보았는데, 몸 팔고 잡힌 여자들 대부분이 연변 사람입니다. 유부남과 붙어 가정 파괴죄로 신고 당하고, 다방에서 몸 팔아 신고 당하죠. 40대도 몸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들여 돈 벌 생각을 안하고 빨리 편하게 벌려고 합니다.
필: 조선족끼리도 지역감정이 심하나보죠?
권: 구로동에 가보면 저녁밥도 다 끼리 끼리 먹어요. 연변 사람은 연변사람끼리, 흑룡강도 할빈, 목단강 사람들이 다 따로 어울리더라구요.
필: 동포신문사는 조선족 회원을 얼마 두고 있습니까?
권: 지금까지(2000년 7월 28일까지) 천 삼백 명 가량 됩니다.
필: 회원에 가입하는데 무슨 조건부가 있나요?
권: 밀입국자는 받지 않습니다. 관광 왔다가 도망한 사람은 중한전역 관광협의 체결일인 6월 27일 전의 사람은 받지만 그 후의 사람은 받지 않습니다. 교회거나 다른 단체에 가입했던 사람은 그 단체에서 퇴출성명을 해야 합니다. 다른 원인이 아니라 조선족들을 도와주는 이런 단체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회원들은 다 법을 잘 지키고 인격을 잘 지키는 당당한 조선족들입니다.
필: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조선족들을 취재하고 싶은데요, 어떻게 보시나요?
권: 한국에서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 신분 때문에 다 한국인의 이름을 빌어서 하고 있어 법적으로 위태합니다. 여성들 중에 음식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국인과 결혼했거나 위장결혼을 한 여성들입니다.
이어 조선족사회 문제점 등에 대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 내용 분류상 이 부분은 다른 부분에 넣기로 한다.
권 주필은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어느새 친숙한 사이로 되어 권주필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권 주필은 1939년 12월 경상북도 예청군 감청면, 대맥동에서 출생했다. 큰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들어갔다. 김책(조선 중앙 정부의 중요한 요인으로 있었음, 행정구역 김책시도 있음.), 주보중(조선족이 많이 참가했던 중국 동북항일련군의 유명한 장령임. 중국 운남 지구 소수민족인 바이족임.)도 큰아버지의 친구였다. 독립운동 가정이었던 관계로 일본사람들의 감시가 심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뜨자 1938년에 아버지는 일본사람들의 감시를 피해 중국 아성으로 들어갔다. 1940년 권주필이 태어나서 1백일만에 가족은 아버지가 농사하여 부쳐온 돈을 여비로 하여 중국에 입주했다. 광복 나는 해에 고향에 돌아올 준비를 하였는데 그만 차비를 도적 맞혔다. 한해 농사를 더 지어 차비를 마련하려 했는데 길이 차단되었다. 한국 ‘세계일보’사 편집국장인 성백진은 권주필의 고향인 예청군 사람인데, 광복 나던 해에 심양으로부터 귀국했으니 한국인이 되고, 권 주필은 귀국하지 못해 중국인이 되었다. 지금도 예청에는 권 주필의 생가가 있고 아버지가 심은 60년 생 밤나무가 울창하게 가지를 뻗고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그 밤나무가 어찌 권 주필이 60년 후에 한국인이 아닌 중국 조선족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줄을 알았으며, 자기가 권 주필에게 ‘남의 나라 것’으로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이것이 역사인줄을 또한 어찌 알았으랴!
귀국을 며칠 앞두고 외국인 보호소 취재에 관한 도움(유감스럽게 성사되지는 못했지만)을 받으려고 동포신문사에 갔을 때 이한영 기획실장과 권영호 주필은 한창 한국체류 조선족 동포 축구경기 조직 때문에 바삐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 권영호 선생과 같은 조선족 언론인들이 더 많아지면 우리 조선족 문제가 훨씬 더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조선족 스스로에게 경제력이 있고, 주체력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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