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사는 흑룡강 하얼빈 사람이다. 고향은 황해도이고 어머니는 7살부터 고향에서 교회에 다녔었다. 김집사는 7남매 4형제 중 셋째이다. 큰형은 북경에서 목회를 하고, 막내는 상해에서 조선족교회 목회를 하며, 서란에 있는 여동생은 산골동네에서 목회를 한다.
시골이었는데도 아버지는 향의 간부여서 ‘문화혁명’ 때에 ‘자본주의 집권파’, ‘계급의 기분자’로 몰려 고통을 당했다. 둘째 삼촌은 목단강 수돗물 공사 총경리(사장)였었는데 투쟁을 맞아 자결했다. 아버지와 계급계선을 나누지 않아 큰형도 아버지와 함께 82일간 갇혀있었다.
아버지가 투쟁을 맞을 때면 ‘아버지를 타도한다’는 구호를 따라 부르지 않아 김집사와 그의 형제들은 사람들에게 뒤통수가 터지도록 맞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구호를 부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이 투쟁을 맞는 날이면 형제들과 친척들이 다 동원되어 가족의 일치된 모습으로 아버지와 형이 그 어려운 시간들을 이기게 하곤 했다. 어린 김집사는 아버지 투쟁 대회 때마다 대회장에 앉아 “아버지가 맞아서 넘어지면 내가 먼저 달려가 일으켜 세워야지.”라고 마음을 도사려 먹곤 했다.
그 때 상황을 본 사람들은 다 알지만 집 식구라도 투쟁을 당하는 사람은 이미 ‘계급의 적’으로 획분되었기에 그를 일으키는 사람도 함께 투쟁을 맞거나 호된 매를 맞거나 욕설을 듣게 된다. 이런 상황을 이기지 못해 어떤 가족들은 투쟁을 당하는 가족과 정치계선을 나누는 글을 발표하거나, 아예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부르며 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김집사는 누가 아버지와 형을 때리는가를 살펴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어머니는 식구들과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쌀을 팔아 닭을 고고 맥주를 사서 갇힌 아버지와 형에게 영양보신을 해 드리곤 했다. 그들 가족의 이런 모습에 투쟁을 하던 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며 손을 들었다고 한다.
1990년도 말에 그의 1차 도한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한창 TV방송에 중국약이 가짜라는 보도가 나가고, 적십자에서 11월 10일까지를 기한으로 중국동포들의 약을 대량 반입하는 때였다. 그러나 김집사네는 그보다 4일 늦은 11월 14일에 김포에 들어서다 보니 약을 전부 빼앗겼다. 손바닥 속에 웅담 하나를 쥐고 있어 겨우 그것으로 본전을 찾았다. 초청장을 만들어 가지고 91년도 말에 제2차 도한을 했다. 이번에는 일하러 왔다. 그런데 마누라가 약질이어서 얼마 안돼서 앓기 시작했다. 김집사가 산골에서 살 때 아버지가 장기환자로 있어 아버지의 주사를 놓은 경험이 있었다. 약방에 가서 약을 사다가 아내에게 링겔주사를 놓았다. 혈관을 찾지 못해 아무 곳이나 찔러서 혈관이 다 터졌다고 했다. 겨우 아내의 병을 눌러 놓고 일을 시작했다. 한 달을 일하니 병 치료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4개월이 되자 아내가 또 앓아누웠다. 김집사는 대단한 애처가였다. 아내를 혼자 보낼 수 없어 짐을 싸 가지고 같이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부터는 한국행이 어려워졌다. 1996년에 김집사는 제3차 도한을 했다. 흑룡강성 위원회(한국의 도청에 상당함)에 아는 사람이 있어 한국대표팀이 들어오자 통역을 부탁해왔다. 그렇게 안 한국인에게 초청을 부탁했다. 그들의 식사비를 담당하여 2만원(한화 3백만원)이 들었고, 초청장, 여권, 등을 전부 돈을 내고 했다. 흑룡강경제건설위원회 부과급 간부라는 이름을 빌어 공무명분을 세우는데도 돈이 들었다. 수속을 하는 동안 그는 고리대 3만원(한화 4백50만원)을 꾸었다.
3년 동안 여러 번 체불 당하면서도 틈틈이 벌어 김집사는 8만원(한화 1천1백여만원)을 집에 보냈다. 그런데 이자 돈이다 보니 아직도 5만원이 빚으로 남아있다. 돈이 집에 도착하면 즉시 돈을 꾸어준 다섯 집에서 달려들어 조금씩 나눠간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본자만 보낼 작정입니다. 나머지는 안 보내겠어요. 한국 수속 때문에 처음에 꾼 본자 3만원은 그대로 있고 이자 돈만 줄곧 물어온 셈이거든요. 빚꾼들이 돈을 안 보낸다고 마누라를 때려 엎기야 하겠어요? 그렇지만 데이콤이 오면 속이 덜컥해요. 마누라가 또 속상해 쨍쨍거릴 일이 걱정이거든요.”
잘 생긴 김집사의 얼굴에 깊은 구김살이 갔다.
“어제 토요일이 어머니 81세 생일이었어요. 제일 속에 걸리는 것은 마누라, 아들, 형제, 친척들은 다 만날 기회가 있는데 어머니만은....장담을 못하겠습니다. 빚을 갚으면 일년만 벌어서 집으로 가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어 주지 않습니다. 지금은 빚도 못 갚고, 언제는 화장터에 가서 어머니 골회를 마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입니다. 교회창립 1주년 기념식 때에 발언고를 준비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해 몇 마디 썼는데, 발언하러 마이크 앞에 서니 갑자기 글이 안 보이는 겁니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흘러내려 말을 하지 못 했습니다. 평생의 한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왜 이렇게 한국 ‘문이 열려’ 이런 고생을 겪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정에 금이 가고, 부모와 이별하고, 자식은 머리가 좋은 집안인데 대학에 못 갔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잃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들애가 스무 살이 넘었어요. 부모로서 할 짓은 아니지만 그놈 데려오려 해요. 애가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버는 줄로 알고 쩍하면 돈 내라 해서 나쁜 버릇 자랐어요. 더 잘못 될까봐 곁에 두고 키우겠습니다. 무조건 저의 말을 들었고 저의 말대로 했습니다. 저도 부모에게 그렇게 복종하며 자랐어요. 곁에 두면 꼼짝 못할 겁니다. ‘월급봉투 만지지 마’라고 해서 그 돈 모아두고, 그렇게 3년 고생시키면 돈이 어떻게 오는걸 알게 될 겁니다.”
“어떤 루트를 통해 데려오는가요?”
“그놈 도착하면 한국수속비 3백만원을 브로커한테 줘야 해요.”
“지금 돈이 없잖아요? 못 주면 어떡해요?”
“무조건 줘야죠. 공무수속인데 못 주면 아마 불법체류자로 신고 당할 걸요. 비용 3백만원을 사장에게 부탁은 했는데......”
그는 내가 밀입국으로 의심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묻지 않는 해석을 했다.
“우리 애 경우는 공무수속입니다만, 밀입국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한국에 도착한 후 브로커한테 돈을 안주고 벌어서 준다고 하면 아주 처참하게 되더라구요. 한 사람을 봤는데요, 밀입국으로 도착하면 보증인이 돈을 내야 하는데 돈을 내지 못했어요. 사흘만 지나면 막 때리기 시작하는데, 죽는 경우도 있다더라구요. 여하튼 그 사람 후에 실종이 됐어요. 중국서는 떠나고 여기서는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97년도 3월에 30여명이 흑룡강 상지에서 떠났는데, 전부 몸에 돈을 3만원(브로커에게 줄 돈, 한화 4백25만원 정도)씩 지녔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전부 실종이 되었답니다. 그 돈 누가 가졌겠어요? 배에 오른 몸이고 보면 그 몸이 자기 것이 될 수 있겠나요? 황차 신외지물(身外之物) 돈인 데야 더 말할게 있겠어요?”
“사장은 돈을 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어떻게 하나 그 돈이야 받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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