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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사나이, 열심히 사는 사나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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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사나이, 열심히 사는 사나이(1)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51>

***재수 없는 사나이, 열심히 사는 사나이**

7월 16일은 일요일, 서울 대림동에 있는 서울조선족교회의 예배일이다. 예배가 끝나자 하얼빈 사람 김진성씨를 만났다. 지금 서울 조선족교회 집사를 맡고 있었다. 40대의 김진성 집사는 키가 180센티미터 되는 상 싶었고 말이 조리 있고 시원시원했고 얼굴 또한 남자답게 잘 생긴 편이였다. 핑크빛 와이셔츠를 입은 멋쟁이 남자에게서 한국인 악덕 주에 의해 세 번이나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정말 상상 밖이었다. 한국에서 그의 운수는 무척 사나운 편이었다.

나는 열성적인 후원자 배문석씨가 동석한 자리에서 김진성 집사를 취재했다. 이야기는 대림동교회 부근의 한 지하다방에서 있었다.

“한국에서 당한 일 여러 번이었어요. 일일이 호소하기도 낯 깎이고, 호소해도 해결 받지 못할 바에는 말하지 않는 겁니다. 숨기고 사는 상황이지요.”

내가 뜻밖이라고 했더니 그는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겉모양을 보면 아주 잘 나가는 것 같지요?”

1998년 3월 22일부터 4월 28일까지 강릉현장에 있었는데 날짜로는 20일 정도 일했다. 28일 밤, 오야지는 갑자기 그들더러 여기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잠시 다른 현장에 가서 일하기로 됐다고 했다. 사람들은 상황을 모르는데다가 별다른 경계심이 없었기에 그가 끌고 온 차에 올랐다. 서울에는 새벽 두시 경에 도착했다. 오야지는 여관을 잡아주면서 먼저 하루 밤을 자고 이튿날에 보자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야지를 찾으니 온데간데없었다. 핸드폰으로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당장 몸에 일전 한 푼 없고 일자리를 찾자 해도 차비도 없었다. 모두들 불길한 생각이 들어 강릉현장으로 찾아갔다. 그제야 그들은 회사가 부도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야지는 자취를 감추었고 회사에서는 오야지를 찾으면 임금을 준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끝이었다. 이것이 첫 번째였다.

김집사는 ‘한번 당하기는 했지만 돈을 벌자면 참아야지’라고 생각하고 김포의 어느 골짜기에 있는 공장에 들어갔다. 회사에서는 처음에는 80만원을 주고 다음달부터는 10만원씩 올려주겠다고 했다. 김집사는 시원스레 사장님이 알아서 주세요, 라고 말했다. 일을 열심히 했다. 첫 달에는 1백만원을 탔고, 두 번째 달에는 1백10만원을 탔다. 세 번째 달에는 월급날이 지났는데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사장은 물품이 이미 나갔지만 수금이 안됐으니 기다리라고, 저금한 셈 치고 모아서 가지는 게 좋지 않느냐 라고 했다. 그렇게 체불상태로 두 달이 지났다. 어느 날 저녁 숙소에 있는데 사장의 핸드폰이 들어왔다.

“경찰이 왔는데 김기사 찾아온 것 같습니다. 빨리 피하세요.”

내다보니 정말 경찰이 세 명 와있었다.

사장이 알려줬고 경찰도 분명히 왔으므로 하는 수 없이 야반도주했다. 사흘 후에 김은 회사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찾아가 보니 이미 이사를 가고 없었다. 이것이 두 번째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사장님이 선생을 불법체류자로 신고했지 않았을까요?”

“저도 그렇게 추측하고있습니다.”

그 후 또 다른 회사로 가서 일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1백20만원을 체불 당했다. 이번에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봉천동의 주먹꾼들을 데리고 가서 위협해 겨우 받아냈다. 그러나 그렇게 받은 돈은 그 날 그 사람들을 초대해 다 때려먹으니 남는 것은 없었다.

“지금의 회사에서는 여섯 달 7백만원의 월급을 못 받은 상황입니다. 사장이 애를 많이 쓰고있는 것 같아서 계속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이나 당한 경험이 있기에 몹시 불안합니다.”

작년에 문래동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두 사람이 앉아 기계제작에 관해 골치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기계는 다 제작되었는데 진동이 크고 소음이 많다는 것이었다. 귀 너르게 들어보니 그 부분을 자기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 하얼빈 모 회사에서 10여 년 동안 기술원으로 있으면서 기계설계를 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기계를 만져보지 못해 손이 근질거렸었다. 그는 사장에게로 다가가 그 기계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사장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함께 자기 회사로 가보자고 했다. 김집사는 기계 도면을 그려 원인을 찾고, 진동하지 않고 잘 될 수 있는 방식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며칠 후 그 사장은 전화를 걸어와, 그대로 해보았더니 진동이 적고 소음이 적어졌다면서 자기 회사에서 일해 달라고 했다.

이 기계는 새로 개발한 음식물쓰레기 처리기계였다. 그는 두 달간 월급을 1백10만씩 받으며 일했다. 1차적으로 출품했는데 사흘만에 기계가 고장 나서 돌아왔다. 공장에 돈이 들어오지 못해 4개월 간 고장 난 물품을 수리하는 일을 했다. 이 때에야 사장은 비로소 그에게 제품개발은 자기가 했지만 비용은 다른 사람이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출품이 어려워지자 기술을 가진 사장과 비용을 지불한 사람은 갈등이 생겨 헤어지기로 했다. 당시 직원이 한국인 1명과 김집사가 있었다. 그 한국인은 임금 1천만원이 체불됐고 김집사는 4백50만원이 체불됐다. 두 사람은 그들을 따라 헤어지었는데, 비용을 지불한 사람에게 1천만원 체불 당한 한국인이 딸리고, 사장에게 김집사가 딸리었다. 차용증은 각각 다 받았다.

사장은 그더러 기계를 성공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체불임금 2백만원을 먼저 주면서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월급은 한 달에 1백10만원으로 정했다. 원래의 기계에 음식물처리, 건조 과정까지 해 넣으라고 해서 건조기를 제작하여 1차 적으로 성공했고 건조기 특허까지 얻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6개월 간 임금을 못 받은 상태다. 얼마 전에 동생이 중국에서 오자 사장에게서 1백만원을 먼저 받았다. 지금까지 물려있는 돈이 7백만원이다.

지금 회사는 직원들을 다 내보내고 사장과 그 둘만이 남았다. 사장과는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조선족들의 사기피해사건에 대한 취재를 많이 했기에 최악의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체불이 많은 상태라서 선생이 당한 두 번째의 경우처럼 혹시 불법체류자라고 신고당할 위험은 없을까요?”

“아직까지 저는 사장에 대해 믿고 있습니다.”

“한국은 믿음 때문에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드시 법적으로 분명한 증거를 남겨야 하죠.”

“믿음이란 것을 배제한다면 피차에 다 겁나하는 일면이 있어요. 저는 불법체류자라고 신고 당할까봐 겁나구요, 사장은 사장대로 회사가 문이 닫힐까봐 겁나합니다. 저는 체불 당한 임금을 못 받을까봐 겁나고, 사장은 제가 잡혀 갈까봐 겁나지 않겠어요? 설계도는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글쎄요.”

나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만일 회사가 경제난에 쪼들려 문을 닫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의 호신부로 되고 있는 기계설계도는 사장에게도 휴지로 돼버릴 것이다. 그 때면 사장의 인격문제를 떠나서 그는 또 세 번째로 운명의 희롱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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