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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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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2)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50>

교회에 들어선지 잠깐이 되는 사이에 나는 같은 조선족들이지만 중국에 있었을 때의 그들의 표정, 한국에서의 표정, 다시 중국에 돌아가면 새롭게 가지게 될 표정들을 언뜻 언뜻 비교해 보았다. 어서 이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고 노동한 것만큼의 돈을 받아 가지고 중국에 돌아가 어깨에 힘을 주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때 윤 완선 목사를 향한 그들의 얼굴에는 가득 불안과 고통이 어려 있었다. 사기를 당했거나 체불을 당했거나 산재보험을 받지 못했을 것이 번연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윤완선 목사였다. 어떻게 번 돈인가! 분명 그들은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돈을 받아 내겠다는 집념이 그들의 표정을 더욱 굳어지게 하고 있었다.

사기사건, 체불사건, 산재사건이 한국의 집법 기관과 교회들, ‘동포신문’사에 많이 신고 되고 있었다. 성남과 구로 센타의 통계를 보면, 1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8개월 사이 중국 조선족의 피해 상담 사건이 979건이었다. 그중 체불이 49%, 산재가 12%, 사기가 8%였다. 대림동에 있는 서울조선족교회에서 내가 마주한 사건만도 1백여 건이다. 사기사건이 40건, 체불사건이 90건, 산재신고가 6건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중 해결된 사건들은 사기사건이 3건, 체불사건이 10건, 산재사건이 3건이었다. 내가 교회 2층 홀에서 서류들을 읽고 있을 때 한 쪽에서는 계속 상담이 진행 중이었다.

그중 일부 서류들을 여기에 옮긴다. 글을 쓸 때의 그들의 심정과 그들의 문화정도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틀린 철자, 문법을 그대로 옮긴다.

서류 1: (차용자 차희숙의 <<차용증>>과 그 여백에 쓴 피해자가 글이다.)

차용증

일금: 이천만원 정
위금액은 1997년 차용하였음.
정히 영수함.
차용인: 여정자(인지)
주민등록번호: 401228-*******
주소: 송파구 범이동 50-11호

차희숙 귀하:
1997.11.30.까지 완불.

참 괴로운 가슴, 답답한 가슴 달랠 길 없구나.
동일아, 엄마 생각 말고 꼭 돈 받으라. 꼭 받으라, 의자에서 동지섣달 자면서 1000원 한 장 안 쓰면서 옷 얻어 입고, 머리도 안하고 화장품도 안 사고 피나게 살아왔던 돈! 2천만원! 싹 싹 받으라. 그 동안 경비 돈도 많이 썼고, 천대도 많이 받았으나 일일이 말 못하고 가는 내 인생 처량타! 울면서 쓰는 편지, 돈을 꼭 받으라, 덤비지 말고 성격 내지 말고 받으라. 너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너는 받을 수 있어. 내 못 받은 돈 너는 꼭 꼭 꼭 받으라. 받아서 돈이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있으니 불쌍한 사람 도우면서 꼭 근검절약하면서 살으라. 부탁한다. 부탁한다....

가장 가장 원통한 것은 이자도 (채?)못 받고(이자 70만원을 한번 20만 원, 한번 50만원 받았고, 이 할 때 80만원, 합이 150만원을 받았고) 너무너무 억울하다. 동일아, 이 피눈물의 대가 하루에 밥 13솥이나 하면서 새벽 4시 50분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이 원한의 눈물 무엇으로 받을는지, 어떡하면 좋아, 이 피눈물의 대가 어떻게 하면 좋아, 너는 꼭 받아야 하느니라. 엄마의 부탁은 한마디 나쁘게 말하지 말고, 이 내 원한의 눈물만 가지고 꼭 (그 돈) 받아라.

내 가슴이 터지는 이 돈, 돈을 꼭 받아라. 돈 받으러 다니면서 갖은 천대 멸시 다 받았다. 어떤 때는 가라, 가라 하면서 밀어내기도 하고, 표독스럽게 야단도 하고,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너무도 천대받은 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가슴이 아파서 살아갈 수 없다. 돈 벌어주고 나처럼 천대받은 사람은 정말 없단 말이야.

살아가기 너무 고생스러워서 5푼 빚을 내여 와서 이렇게 좌절당하고 나니 너무도 괴롭다. 동일아, 천번만번 울어도 죽어도, 아아, 너무 막막하구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 아버지께서 중풍 걸려 오늘, 내일 하는 것도 모두 포기하고 내 정신인지 누구 정신인지 너무 분해서 죽을 것만 같아. 어디에다 하소연하랴. 하늘이 도와주겠는지, 경찰님이 도와주시겠는지, 대한민국 누가 도와주겠는지? 이 정신적 피해 어찌 돈으로 계산하랴.......절대 포기 안 해. 딸, 아들에게 물려 줘서라도 그 돈 받아 낼거야......

....도저히 살아 갈 수 없는 이 순간, 동일아, 꼭 받아내서 잘 살으라. 동일아, 동일아, 빌고 또 빈다. 일전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으라. 너무도 분하고 억울해서 살아 갈 수 없으니 너는 이 돈 꼭 받으라, 너는 받을 수 있을 거야. 돈 꼭 받으라. 믿는다, 동일아, 너 믿는다. 나는 그 어떤 고생도 돈을 위해 달게 했으나 지금은 너무 억울해서 하루도 살수가 없으니 이 글을 남긴다. 너는 용기를 내어 이 돈 꼭 받고 근검절약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베풀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거짓말과 낭비를 하지 말으라, 꼭 이 돈 받고 열심히 건강히 살으라, 꼭 열심히 일하고 남에게 거짓말, 피해 주는 일 하지 말아라...

서류 2 : 사실 진술서

김영윤씨가 중국 할빈 형수 집에 왔을 때 초대하여 참여(참석)하였을 때 하는 말이 한국에서 사업도 하고 생활도 괜찮다고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하였다. 그 때 우리도 곧 한국에 간다고 하니 (한국에 오면 자기를) 꼭 찾아 달라고 하였다. (우리가 한국에 간 후) 어느 날 시청(부근 셋집)에 있는데 (김영윤씨가)찾아와서 몇 일 후에 중국 할빈으로 들어가는데 부탁이 없느냐 하였다. 마침 미화(달러)를 가져다 달라고 하니, 많이는 안되고 2천 딸라 까지는 된다 하여 주었더니 명함에 2천 원 받았음, 라고 (쓴 것을) 나에게 주었다. 2주일 후에 집에 전화하니 돈을 못 받았다고 하여 김영윤에게 전화를 하니 일본에 갈 일이 있어 갔다가 중국에 가든지, 일본을 경유하여 직접 할빈에 가든지 할 테니까 근심 말라고 하였다. (내가) 귀국 할 때가 되어 김영윤씨 집에 전화로 연락하니 나를 찾아오겠다고 하더니 오지 않았다. (내가) 찾아가겠다고 하니 오늘, 내일 (나에게로) 온다고 하더니 , (그 후에는) 귀국하는 날에 부두로 나오겠다고 해서 믿었는데 나오지 않았다.

그 후 귀국하여 몇 번 전화를 하니 지금 형편이 곤난하여 기다리면 꼭 부쳐주겠다고 했다. 그 후에는 전화도 받지 않음. 1995년에 한국에 나와서 (김영윤씨를) 찾아가니 회사는 없고, 집 전화로 연락하니 그런 사람이 없다 한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돈 받으려고 하다가 붙잡히면 벌지도 못하고 더욱 손해 볼 것 같아 일만 하였다.
(교회에서) 수고해 주시면(돈을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순옥 씀.

서류 3: 진술서

전동식- 남, 62세, 중국조선족 임해수의 삼촌.
정혜성- 전동식과 한 회사의 동료, (저금)통장 비밀번호와 액수를 장악.
정해성- 정혜성의 소개로 전동식이 정태성 이름으로 주민등록증을 만듬.
성우성- 정태성이 통장분실신고를 하여 전 동식의 돈을 꺼냄(외환은행 카메라에 잠입)

저는 1993년 1월에 한국에 들어와 1998년 3월에 집으로 가면서 외삼촌인 전동식에게 돈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IMF로 외환송금과 환전이 안되니 2,700만원을 정태성의 이름으로 입금시키고 그 해 8월에 송금이 가능하면 송금으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암달러시장에서 바꾸어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정태성의 이름으로 입금시킨 것은(원인은 다음과 같다.) 98년 2월 설경에 외삼촌이 하는 말이(이런 말을 하였다.) 정 혜성(외삼촌 회사 동료)이 행방불명인 사람(정 태성)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으로 주민등록증을 하나 만들어 줄 것이니, 중국-한국을 넘나들면서 장사도 하고 다른 사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돈 300만원을 빌려 달라고 하여 빌려 주었다. 정태성의 이름으로 주민등록을 만들었고 정 태성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었다고 하기에 정 태성의 이름으로 2,700만원을 입금시키고 중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1998년 8월에 외삼촌 전동식이 (돈을) 가지고 들어오기로, 안되면 (만일 들어오지 못하면) 보내준다는 돈이 오지 않아 속을 태우면서도 속한 기일 내에 보내주겠다고 하기에 길림에 있는 집을 처분하고 북경에 가서 자그마한 식당이라도 하나 하면서 다른 사업을 할까 하였으나 돈이 오지 않아 (북경 모 식당) 예약금만 5천원(인민폐, 한화 60만원)을 뜯겼지요.

그제야 다른 사람을 통하여 그 돈이 잘못 된 줄 알고 한국에 있는 외삼촌에게 전화하니 6월 20일경에 통장을 분실 신고하여 돈을 다 사기 당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려고 해도 다 안되고 또 속이 갑갑해서 다시 한국으로 나올 결심을 하고 수속을 한 것이 그리 빨리 되지도 않고 하여 99년 9월 27일에야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그나마 인민페 5만원(한화 600만원)까지 쓰면서 말입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이 문제만 해결하면 다시 돌아가려고 한달 동안 동분서주하였으나 남부 지검에서는 범인이 잡혀야 문제가 해결된다고만 하기에 민사소송을 하여 자산압류라도 해 보려고 변호사를 찾고 법률 사무소도 찾았으나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 진전이 없습니다. 정혜성과 정태성은 지검에서 조사를 한 다음 죄를 성우성에게 미루어 모두(정 혜성과 정 태성) 놓아 보내고 성우성이 잡히기만 기다리던 중 99년 12월 24일에 성우성이 대구 지검에 잡혔다는 고지서가 2000년 1월 7일에 날아왔으나 3개월이 넘도록 아직 조사중이라고 할 뿐 피해자도 한번 부르지 않으니 어떻게 되는 것 인지요?

사건 번호는 대구 지검 형제 2000-기호, 담당자 김후균 검사.

2000년 4월 11일 진술인 임해수

서류 4: 진술서

1998년 7월 말 경에 서울 삼성동 우드피아 주상림 사장님의 회사에서 일하는 강 실장의 소개로 최 관호(조선족)을 통해 남편 리 종수씨(당시 가명 김태만)는 경기도 랑(광?)주군 만선리에 있는 신용식 우으피아 회사 상무님의 산에서 통나무집 짓는 공사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5일 반을 일하셨는데 우기여서 자재공급이 딸려 서울 영등포구 신정동에 가서 통나무 집 짓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때는 이미 강 실장이 일을 그만 두었기에 일당 5만 5천 원에 관한 월급에 대해 주 상림 사장님이 불평을 토로했었습니다. 그 때 회사의 사무실에서 아내인 제가 직접 가서 가불 15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때 남편과 함께 일하신 박 목수, 두 최씨가 함께 있었고, 다 가불을 받았습니다. 그 때 남편은 이미 신정동에서 일하고 있었고, 밤에는 경비도 서고 있었기에 아내가 대신 회사에 갔었습니다.

일하신 날짜는 만선리 5.5일, 목동 9일, 가불 15만원을 받고 나머지는 못 받았습니다.
오셔서 남편은 한달 100만원, 아내 최 순옥(가명 박 경자)은 한 달에 80만원으로 결정을 짓고 만선리 산 통나무 집 짓는 현장에 거주했는데, 신용식 상무님이 쌀을 전 담당하고 아내가 화식 때문에 서울을 오르내렸습니다. 숙소는 낡은 콘테나 박스였는데 난방 설비도 없고 금방 끌어올린 지하수로 목욕을 했습니다. 산이 몽땅 상무 신용식씨의 산이었는데, 묘목 밭과 과수원도 있었는데, 어린 묘목 가꾸기, 비료 주기, 풀베기 일도 시간 나는 대로 하셨고, 주 상림 사장 대신 농장 (버섯농장)의 일도 하셨고, 버섯 하우스의 공사 일도 도우셨습니다. 과수밭 한 뙈기에 야채농사도 신용식 상무님의 제기로 하셨는데, 야채 농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9월 22일에 제가 만선리에 올라갔다가 남편께서 풍습성 관절염이 와서 아주 고생하시기에 신용식 상무님께 여쭈고 서울로 내려오게 되었으며 (상무님이) 이 차용증을 써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비를 하라고 10만 5천원을 털어서 주셨습니다.
그 후 전화번호를 바꾸어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아내 최순옥

(차용증 생략)

세 권으로 된 ‘임금체불서류’, ‘사기피해서류’, ‘산재보험신청서류’를 다 열독 하고 나니 오후 다섯시, 아침은 대림동교회를 갈 시간을 맞추느라고 미처 먹지 못했고, 점심은 교회의 퇴근시간 전에 서류를 다 보느라고 먹지 못했다. 앞이 캄캄해서 막 쓰러질 것 같았다. 배가 고픈 원인도 있겠지만 하나 하나 너무 피맺힌 사연이어서 더욱 기운이 빠졌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은 그들에게 내가 한국의 우수한 점, 한국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좋은 점을 상기시키고, 결코 한국 대다수 사람들이 조선족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여 그들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겠는가? 당사자가 나라면 과연 이런 말이 나오겠는가? 라는 생각에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점차 냉정해면서 조선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떠올랐다.

우선 우리는, 그들도 나도, 그리고 모든 조선족들이 다 냉정하게 현실을 정시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중국식, 사회주의 식으로 한국이란 사회를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이 고리를 풀어나간다면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좀더 힘 있게 한국이란 사회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인이 중국에 와서 당한 것은 중국이란 나라를 모르기 때문이고, 조선족이 한국에서 당하는 것은 한국이란 나라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알기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십 년 전부터 시작된 공부지만, 아직도 답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답이 나올 것이다.

중국에 돌아온 후 나는 ‘연변일보’에 칼럼을 써서 해당 부분에서 한국에 입국하는 조선족들에 대한 법제교육을 하나의 과제를 삼고 할 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특히 중국과는 다른 체제문화, 법에 대한 지식을 자기보호의 차원에서 잘 전수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한국에 입국하려는 조선족들은 우선 가치관을 바로 하고, 사기꾼들이 노리는 일확천금의 위험한 심리를 정리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벌고 한푼 두푼 아껴 써서 돈을 모으는 근면한 민족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자신의 행동이 조선족의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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