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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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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1)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49>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

7월 21일, 대림동에 있는 서울조선족교회 인권센타 소장 윤완선 목사와의 취재 약속 시간 때문에 아침도 먹지 못하고 떠났다. 후암동 셋집에서 1번 마을버스를 타고 숙대입구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탔다. 총신대입구에서 내려 7호선을 갈아타려고 했는데 뜻밖에 아직 개통이 안됐다고 한다. 지하철노선도를 보니 7호선이 미개통 표시인 점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럴줄 알았다면 다른 선로를 택했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다시 85-1번 버스를 탔더니 종착역에 도착해서도 대체 어느 방향에 서울조선족 교회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림동에서는 서울조선족 교회를 물으면 아는 사람이 별반 없다. 구로중학교라고 해서야 그 바로 남쪽에 있는 서울조선족 교회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척에 서울조선족교회를 두고서도 택시를 타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헤매는 동안 나의 마음도 삼검불이었다. 한국체류 조선족의 피해사건들은 대체 어디에 의뢰해야 하며, 그들의 인권은 대체 누가 담보할 수 있는가? 중국정부에서 할 수도 한국정부에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국정부는 조선족이 중국공민이기 때문에 해외동포법으로 해결하기 곤란한 입장이다. 외국인법을 적용해야 하지만 조선족은 방글라데시나 다른 외국인들보다 특수한 위치에 있다. 한국사회에서 약한 군체인 조선족은 사회 악세력이 등쳐먹는 대상으로 노출되어 인권, 인신 보장이 문제로 되고 있는데다가, 정치, 문화, 경제 등 다방면의 갈등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 거기에 또 자본주의 배금주의 충격과 가치관의 분열을 겪어야 하는 입장이다. 사면초가의 충격 속에 우왕좌왕하는 조선족은 누가 보호해주어야 하는가?

내가 유일하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교회와 시민단체라는 점이 안타까웠고, 그러나 따스한 위안이 되는 것 또한 진실한 감정이다.

서울조선족교회에 들어섰을 때 윤완선 목사가 한창 임금체불, 산재보험신청, 사기 등 사건과 관련해 조선족들과 상담을 하고있었다.

나에게 동류의식을 느끼게 해주는 조선족들, 역시 익숙한 표정들이었다. 내가 익숙하다고 하는 것은 결코 중국 땅에서 조선족들에게서 보았던 표정들이 아니다. 중국에서 우리 동포들은 밝고, 의욕에 차있고, 그러나 경쟁에 민감하지 못한 그런 순수한 표정이었다. 한국에서 본 조선족들의 표정은 대체적으로 목소리가 낮고, 말투가 어색하고,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근심이 많고, 눈빛이 빠르고 허둥거리고, 순간 순간 반응이 아주 예민하다.

목소리가 낮은 것은 불법체류자 신분 때문에 주변의 주의를 끌기 싫어서이고, 말투가 어색한 것은 ‘조선족’말에 대한 열등감과 서울말에 자신이 없는 것과 관계된다. ‘화종구출’(禍從口出)이라고, 입을 벌리면 연변 말투 때문에 수시로 검문 당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경찰들의 눈길을 의식한 적이 없는 그들이 이 땅에서는 항상 경찰의 눈을 의식해야 한다. 이런 불안전감이 그들의 눈빛을 빠르게 한다.

중국에서는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천신만고로 한국에 입국하였기에 시간과 금전의 정비례 관계로 일상을 계산하는 강박관념이 그들을 시간의 노예로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안전 면에서 항상 여유 없이 쪼들려 살기 때문에 불안과 근심이 얼굴에서 떠날 사이가 없고 신경이 무수한 바늘과 같이 예리하다. 수시로 위협을 느끼며, 수시로 도망갈 준비를 하며 사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중국에서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을 보면 한국에 있었을 때보다 그 표정이 놀랍게 판이하다. 물론 거액을 상기 당했거나 체불 당했거나 산재보험을 못 받았거나 하는 사람들은 제외한다. 이들은 대체상 소기의 목적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피눈물로 번 돈이지만 결국 돈을 번 것 때문에 어깨에 힘이 있다. 옷이 전부 한제이고, 얼굴에 자신감이 배어 있다. 한국인들처럼, 돈을 아껴 쓰고, 음식을 아껴 먹고, 낭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손님에게 음식대접을 해도 중국식이 아닌 한국식으로 한다. 중국식은 요리를 쌍으로 적어도 네 가지, 여덟 가지씩 차리고, 십여 명인 경우에는 열두 가지씩 차린다. 물론 밑반찬이나 김치 같은 것은 요리로 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식은 먹을 만큼만 차린다. 불고기 등 단일한 요리거나 담백하게 참기름에 묻힌 나물이거나 싱싱한 야채, 찌개를 차려 올린다. 중국식은 과일을 사람 당 하나씩 통째로 깎아 올리지만, 한국식은 과일을 사람 당 쪽을 나누어 차린다. 중국식은 술을 많이 권하지만 한국식은 술을 권하지 않는다. 한국에 나가기 전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던 사골탕이거나 소꼬리곰탕을 열심히 해먹는다. 샤워를 자주 하고 머리를 자주 감는다. 항상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린다. 머릿속에는 늘 모택동과 세종대왕의 초상이 어른거린다. 인민폐로만 상품의 가치를 따지던 그들이 지금은 인민폐와 한화와 달러의 비교 가격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서울에서 월 당 1백20만원을 벌고 있는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마늘이며 고춧가루까지 사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의 마늘이 비싸고 고춧가루가 비싼 것 때문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 돈 1천원, 환율로 보면 중국돈 6,7원이지만 중국의 6,7원보다 한화의 천원에 더 많은 피눈물과 노동이 스며있다는 도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같이 잠깐씩 한국에 가는 사람들도 한국 체류 기간에 사우나를 자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한 달에 한번도 하지 않고 집에서 몸을 씻는다. 한국 사우나 값 3천5백원은 중국의 사우나 값 20원(월 표 10원 짜리도 있다. 시설이 나쁜 곳은 5원씩도 한다.)보다 5원 정도 더 비싸다. 그런데 중국 월급수준의 10배 정도의 수입이 있음에도 사우나 값을 아끼는 이들, 그들이야말로 서울 물을 진짜로 먹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계산법이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돈 1천원(한화, 중국 돈으로는 7원 20전)에 스며있는 자신들의 피땀을 계산하는 것이다. 중국의 월급 1천원(한화 12만원)은 그들이 한화 120만원에 투자한 정신적인 부담과 육체적인 소모의 1백분의 1도 안 된다. 이런 비례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1천원은 중국 돈 7원 20전보다 더 값이 가는 것이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같이 있는 조선족언니의 기름이나 고추장을 먹을 때마다, 그리고 그녀의 이불을 덮고 그릇들을 쓸 때마다 끊임없이 계산을 했다. 이것이 한국 돈으로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나도 그 계산가격에 따라 끊임없이 참외나 요구르트, 빵 등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을 사들여 상쇄를 시켰다. 그녀의 약을 먹었으면 또 내가 가지고 있던 약으로 상쇄했다. 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을 수 없는 계산이다. 그리고 같이 있는 언니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서울 계산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중국에서 돈 7원 20전을 쓰기보다 한국에서 1천원(중국돈 7원 20전)을 쓰기가 더 힘든지, 그 심리적인 차이의 미묘한 출처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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