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결벽증언니의 열연(熱戀)의 고뇌(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결벽증언니의 열연(熱戀)의 고뇌(1)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34>

***결벽증언니의 열연(熱戀)의 고뇌**

셋집을 몇 번 옮기다보니 한약재냄새가 코를 진동하는 제기동에서 또 허영주라고 하는 조선족과 합숙하게 되었다. 혼자 있을 때 전화를 받으면 그녀를 옥녀라고 찾는 사람도 있고 애자라고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그녀 이름이 대체 어느 것인지, 성씨도 허씨인지 권씨인지 알 수 없다. 한국에 나오면 누구 일이든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가 없고 뭐든지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에서 조선족사회라는 것은 너무 작아서 아무리 낯 설은 사람이라도 인간관계를 통하면 곧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한국의 조선족들은 대방에게 많이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직업적인 관계로 나는 알고 싶은 일들이 많았지만 공식취재가 아닐 때에는 그런 내색을 내지 않았다. 조용할 때 귀동냥, 눈치동냥 했던 것들을 노트에 적어둘 뿐이다.

허 언니는 솔직하고 순진하고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결벽증이 있는 것이 결함이라면 결함이고 우점이라면 우점이었다. 곁 사람이 힘들 정도로 깨끗했다. 처음 나와 같이 있는 며칠은 나의 짐이 그녀 작은 방의 구석을 차지하는 것 때문에 신경을 썼다. 퇴근해 돌아와 둘러봐서 자기가 해놓았던 대로가 아니면 꼭 그것을 바로잡아 놓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합숙을 여러 번 하다보니 나도 눈치공부는 늘었다. 우선 합숙하는 사람의 성격과 취향에 나를 적응시켜야 했다. 나는 취재약속을 지키기 위해 책을 가득 널어놓은 상태로 문을 잠그는 경우도 많았지만 허 언니가 오기 전에는 꼭 모든 물건을 그녀의 습관대로 놓고 방을 깨끗이 청소하곤 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이 일하러 나갈 수 있도록 언니가 나가기 전에 침대를 다 정리하고, 치울 것은 다 치우곤 했다.

언니는 참치횟집에서 월 1백만원을 받으며 일했다. 그녀 깔끔한 성미 때문에 남들은 돈이 아까워 식당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그녀는 자기 집을 가지는 것을 원했다. 단칸짜리 셋집이나마 냉장고, 텔레비죤, 이불장, 옷장, 경대에 세탁기, 침대, 선풍기까지 다 갖춰놓고 살았다. 그러다 보면 한 달에 20만원이라는 집세와 아침 빵 값, 매일 마을버스비 6백원 등 남들보다 비용이 더 들었다. 매일 아침 9시에 나갔다가 밤 11시에 들어왔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날 입었던 옷을 속옷까지 다 빨아 널고 목욕을 하고서야 자리에 눕곤 했다.

허 언니는 금년에 50세이다. 70년대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하향지식청년으로 하향했을 때 한 집체호에 있던 남자와 연애를 했다. 남자가 술을 좋아해서 부모들은 그녀 혼사를 동의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곡절이 많던 그녀 혼사는 결혼해서까지 곡절이 많았다. 딸애의 생일날에 남편이 술을 마시고 사람을 때려 구속되다보니 딸애는 생일상도 받지 못했다. 참고 참다가 애가 8살일 때 이혼했다. 두 번째 남자는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애가 딸리지 않은 남자라는 조건 때문에 결혼했다. 결혼해서 둘째딸을 보았다.

"나는 남자복이 없는 여자야."

모든 이혼녀들처럼 그녀는 이렇게 한탄했다.

두 번째 결혼도 순조롭지 못했다. 두 번째 남자는 술만 마시면 무슨 일이나 꼬치꼬치 캐어묻고 쩍하면 큰 딸애에게 손찌검을 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집에 오는 날이면 그녀는 딸애들을 안고 숨이 한줌만 해서 창고에 가만히 숨어 있곤 했다. 한 번은 맞아서 발가락이 다 상했다. 하는 수없이 두 번째도 이혼으로 끝났다.

한국위장결혼은 1997년에 그녀 큰언니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그녀 언니와 형부는 이미 한국에 나와 있었다. 허씨의 한국인 위장결혼남편은 허씨보다 8살이 위였는데 허의 언니와 잘 아는 사이였다. 허씨는 한국에 나와 벌어서 3백만원을 갚기로 했다. 합의가 이루어지자 한국인 남자가 중국에 수속하러 갔다. 위장결혼수수료, 왕복 여비, 수속이 늦어져 두 달이 걸리는 동안의 체류비, 북경의 만리장성 등지를 다니며 관광한 비용(본인이 구경하고 싶다고 요구했음) 등이 중국 돈으로 10만원(당시 가격으로 한국 돈 1천만원정도)이 들었는데 전부 그녀가 지불했다. 돈이 없어 전부 5푼 고리대 돈을 꾸어서 댔다. 한국에 들어온 다음 남자는 원래 정한 값 3백만원에 2백만원을 더 얹어줘야 한국국적에 올려주겠다고 했다. 신고를 당할까봐 하는 수 없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위장결혼비용을 갚기 위해 그녀는 식당에 들어가 돈을 벌었다. 그녀는 워낙 일솜씨가 재고 깨끗하여 어느 음식점이나 한 번 쓰면 놓아주기 아쉬워했다. 월급은 1백20만원씩 받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위장결혼수수료부터 갚았다.

"남자가 같이 자자는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이처럼 통속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그만큼 서로 익숙해진 다음에 나눈 이야기였다. 그리고 위장결혼녀 거의가 한국인 위장결혼남편으로부터 그런 무리한 요구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진주 전라도 사람인데 돈을 벌기 위해 마누라와 약속하고 이혼했다오. 돈 5백만원을 받고 나를 국적에 올려주고 나서 다시 마누라와 회복했소. 마누라와 약속하고 계획적으로 한 일이기에 절대 그런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소. 그리고 언니와도 잘 아는 사이였고, 미리 그런 요구를 제기하면 안 된다고 약속이 되어있었거든."

1998년에 IMF때문에 한국 돈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그 빚을 달러로 상환하느라고 1999년까지 고생했다. 그렇게 갚은 돈이 중국 돈으로 15만원, 한화로는 2천만원이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