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결혼녀**
7월 8일, 이날도 서울의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웠다. 오후 1시경에 서울 동대문부근에 있는 B에게로 떠났다. B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녀가 자기 이름을 말하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셋집 언니가 소개해서 만나게 되었다.
동대문 부근에 마중 나온 B를 따라 우불꾸불한 골목들을 지나 컴퓨터 방이 있는 층집 앞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이 층집이 전부 할아버지 것이라고, 조금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지금 간호하고 있는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녀와 할아버지는 3층에서 살았다. 1,2,4층은 전부 세를 주었다고 했다.
그녀는 나온 지 5년이 됐지만 왜 그렇게도 연변 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머리모양과 옷차림, 웃는 모습과 표정, 모든 것이 한국의 세월에 길들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한국에 와 있은 5년 동안 거의 다 이 집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돌보는 가정부로 있었다고 한다.
집안은 15평정도 되었는데, 침실 두 개, 주방과 이어진 객실이 하나 있었고 화장실이 있었다. 안노인은 이미 사망했고, 올해 90세 되는 바깥노인이 방에 누워있었다. 풍을 맞아 누워서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었지만, 깨끗하고 정갈한 모습은 가정부의 정성을 보여주었다. 옛날 주인의 빛났던 인생의 횡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듯 젊었을 때 기업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노인의 사진들이 가득 걸려있었다.
"한국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입을 막고 웃었다.
그녀는 올해에 48세였다. 연변 모 기관에 근무하던 남편이 1993년도에 사망했다. 젊은 남편을 잃은 고통 때문에 거의 허탈상태에서 보냈다. 혼자의 월급으로 당시 초중(한국의 중학교)을 다니고 있는 딸애를 대학공부까지 시키자면 불가능했다. 직장에서 내부퇴직을 하게 되자 그녀는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날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남편과 함께 있는 기억들을 다 털어 버리고 훌훌이 떠나 새로운 열정으로 새로운 삶에 정신을 몰붓고 싶었다.
1995년, 남편이 사망한지 2년 만에 소개인에게 돈 2만원(당시 한화 가격으로 2백만원)을 주고 한국위장결혼을 부탁했다. 초청이 성사되면 만원(당시 한화가격 1백만원)을 더 주기도 했고, 한국에 발을 붙이고 돈을 벌면 결혼해준 남자에게는 별도로 80만원을 더 얹어 주기로 했다. 시골남자여서인지 위장결혼요금이 적은 편이었다. 총 3백80만원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되어 한 한국남자와의 '결혼'이 이루어져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소개인은 돈을 다 받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의 경우에 위장결혼이 드러나더라도 절대 나를 신고하지 마세요. 붙잡혀가도 내 이름으로 빼어 내올 수 있으니까요."
소개인과의 약속 때문에 그녀는 나에게도 그 소개인의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국에 입국해서까지도 그녀는 자기와 법적 결혼을 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지 못했다. 도착하자 바로 일자리를 찾아 식당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강원도 시골에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검사를 고려해 음식점을 옮길 때마다 연락번호를 그 남자에게 알려주었다. 이 때부터는 위장결혼에 대비한 경찰의 감시도 엄해졌다. 경찰의 전화가 그녀 음식점으로 여러 번 왔다. 결혼은 했지만 집이 없어 집값을 마련하기 위해 일한다고 둘러 대곤 했다.
돈을 벌자 시골 남자 집으로 갔다. 남자에게 약속한대로 위장결혼 수고비 80만원을 주었더니 남자가 적다고 투덜거렸다. 이 때 그 남자의 형님이 남자를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그러지 말라고 설복했다. 마을사람들이 그들이 동거하고 있다는 증명을 서야 했는데 모두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의 매부, 형수, 친척들이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런 일들이 끝나자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우리는 언제 같이 살아요?"
그 때 그녀는 그 남자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보았다. 위장결혼인 것을 알면서 그런 물음을 할 수도 있냐싶었다. 남들은 위장결혼을 하면 국적을 조건으로 돈을 더 갈취한다든가, 잠자리를 같이 하자든가, 여러 가지 수단으로 공갈치거나 위협한다고 해서 많이 근심했었는데, 이 사람은 그런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착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한 사람 같았다.
"주민등록증이 나오면 살겠어요."
그녀도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
주민등록증 때문에 그 남자를 세 번 만났다. 번마다 언제 같이 사냐고 물었다. 그녀는 번마다 주민등록증이 나오면 살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남자가 "이다음 80만원을 돌려주겠어요"라고 했다. 이다음이라는 것이 '같이 살' 때를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무슨 생각인가 하더니 차비를 하라면서 10만원을 주었다. 그녀는 이 부족한 남자를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돈을 받아 넣었다.
동서울 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어느 날 그녀에게로 경찰서에서 호출이 왔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속이 떨렸다. 그래도 도망은 치지 못하고 경찰서로 갔다. 한 사무실에 들어서보니 그 위장결혼 남자도 와있었다. 30대의 경찰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위장결혼이 아니냐고 물었다. 여자는 너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워낙 순수하고 고지식한 그녀는 경찰이 꼬치꼬치 캐묻자 하는 수 없이 위장결혼과정을 전부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그녀는 몹시 두려웠다.
조금 부족한 것으로 보았던 남자가 그 때는 바른 말 한 마디를 해서 그녀를 구해 주었다.
"위장결혼이든 뭐든 우리 둘이 살면 되잖아요?"
그 말에 정신이 든 그녀도 그렇게 말했다.
"위장결혼이라고 하면 나는 저 사람과 같이 살겠어요."
경찰이 물었다.
"저 사람과 같이 살수 있나요?"
"예. 저의 아이도 키워주겠다고 하는데, 같이 살겠어요."
"저 사람 자기 아이도 못 키우는데 아줌마아이를 키울 수 있겠어요?"
경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녀는 결사적으로 저 남자와 살겠다고 말했다. 남자도 같이 살겠다고 표시했다. 일이 이쯤 되자 경찰은 더는 묻지 않았다. 경찰은 남자는 있으라고 하고 그녀더러 문밖에 나가 자기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밖에서 기다렸다.
"내가 얼마나 바보였어? 그 마당에 밖에서 경찰을 기다렸다니까. 하도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그렇지....." 이 부분을 이야기 할 때에 그녀는 무척 감동한 표정으로, 그러나 자조하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한참 후 경찰이 차를 몰고 와 올라타라고 했소.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타라고 하니까 탔소. 난 이렇게 고지식했다니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르고 차에 올라탔지."
경찰은 저능이고 무능력한 그 남자와 살면 불행해질까봐 그녀를 빼어 돌린 것이다. 남자가 이 기회에 궁지에 빠진 그녀를 위협해 집으로 데려가면 또 하나의 비극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녀는 고맙기 그지없었다. 때는 이미 점심때가 지나고 있었다. 경찰은 그녀를 셋집 부근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녀는 뭐라고 감사의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경찰은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를 찾으라고 했다.
그녀는 그 경찰에게 누가 미칠까봐 나에게 그 경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나도 적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사무에 충직하면 오히려 좋은 사람을 다칠 때가 있다. 경찰은 사무에는 충직하지 못했지만 인간적인 사랑으로 그녀를 한차례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그 후 그녀는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동사무소로 갔는데 등록이 '말살' 되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 남자가 같이 살아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말살시킨 모양이요."
이것이 그녀 해석이었다.
그녀는 '말소'라는 것을 '말살'이라고 잘못 발음했고, 그 때까지도 이 낯설은 낱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다. '말소'라는 것이 국적이 취소됐다는 뜻인지, 자신은 지금 '불법체류자'인지, 한국인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말소'라는 단어는 나도 생소하였다. 이 때 곁에 가정부로 있는 그녀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도 그 뜻을 모른다고 했다. 모르는 세 사람이 서로를 빤히 쳐다만 보았다.
후에 한국인들에게 물어봐서 안 사실이지만 '말소'라는 것은 한국에서의 거주증명이 지워졌다는 뜻이라고 했다. '말소'가 됐다 해서 국적이 취소된 것은 아니며 벌금을 내고 다시 등록할 수 있다고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