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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한국 남편과 애인들(1)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29>

***그녀의 한국 남편과 애인들**

"괜찮아, 쓰겠으면 쓰라구!"

그녀는 성미가 통쾌한 여자였다. 다른 때에는 통쾌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그 통쾌함이 고마웠다. 어떤 때에는 감추어야 할 부분의 이야기도 들어 내놓고 말하곤 해서 민망한 때도 있었었다. 나에게만 하는 줄로 알았던 이야기들을 나와 같이 있던 셋집언니에게도 했다. 친구에게 전화로 소리치며 이야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자리를 같이 했던 일 등이다.

그녀와는 서울에 있는 동안 사정에 의해 며칠 간 합숙했다. 화룡 여자였는데 남편은 수 년 전부터 식물인이 되었다. 남편을 치료해보려고 애를 썼다가 이제는 포기했다. 남편은 아들이 간호하고 있다. 아무리 본인이 자기 사실을 그대로 쓰라고는 했지만, 차마 이름은 공개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A라고 부르기로 한다.

A는 장사를 잘 하는 타입의 여자였다. 한국국적을 따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한국남자와 결혼한 딸애더러 초청서를 해 보내라고 했다. 1992년 7월에 불법체류검문을 당해 강제귀국을 당한 역사가 있어 공항에서 입국거절을 당할 각오를 하고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녀는 38살짜리 연길 남자에게 무료로 한국가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남편대신 법정에 나서 이혼연극을 하게 했다. 이런 일들은 법치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중국은 1978년부터 시작해 모택동 시대 극단적인 정치통수, 계획경제시기의 기성의 가치관이 허물어지고 등소평의 개혁개방의 노선이 실시되었다. 따라서 모택동의 사상을 종교처럼 받들던 시대, 일원화사상에 의해 통치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국영경제의 비중이 점점 적어지고 개인경제 비중이 점점 더 늘어나고, 상품경제가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의 의식 활동도 훨씬 활성화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사상에 의해 공포적인 정치로 질서가 유지되던 나라가 지금은 법에 의한 질서유지의 부분의 분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가치관의 교차시기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중국은 매일 수백조목의 법이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법의 허점이 아직도 수없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 허점이 아직 법치수준이 낮은 중국에서는 인간에게 여러 가지 극적인 사건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한국초청에 온갖 비정상적인 루트가 동원되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남편대리로 법정에 내세워 이혼을 했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중국은 지금 나를 낳아준 엄마 외에는 다 가짜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돌고 있다.

부모초청이었기에 김포공항에서는 그녀 딸과 사위에게 전화로 엄마, 아버지 이름을 확인하고 신원이 확실하자 곧 입국허가를 했다. 한국 땅에 들어선 날이 1993년 5월 10일이었다.

그녀는 결혼해줄 남자를 찾기 위해 돈을 벌었다. 중국에서 가지고 온 파란 가위의 이혼증을 가지고 대사관에 가서 인증서를 뗐다. 그것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3개월이란 체류시간을 이틀 앞두었는데도 마땅한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서울에서의 위장결혼의 주가는 7백만 원이었는데 그녀 손에는 돈이 1백만원밖에 없었다. 하는 수없이 시골에 가서 불법체류 할 준비를 했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가 한국에서 페인트칠을 할 때 알았던 박상준이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전화를 하여 위장 결혼할 상대를 찾아달라고 했더니 금방 전화가 왔다. 친구인 66세 나는 이안주라는 사람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이씨에게 전화해 위장결혼주가에 대해 흥정했다. 결국 그는 기어코 7백만원을 받겠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그녀는 한국에 와서 살고 싶고 정식 살 남자가 필요한데 지금은 백만원밖에 없으니 나머지는 나중에 벌어서 갚겠다고 했다. 이안주는 3천만원에 달하는 옷을 만들어 가지고 중국 워이해에 장사를 갔다가 밑지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박이 그녀를 소개할 때 장사를 뛰어나게 잘하는 여자라고, 함께 있으면 돈을 벌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씨는 그 말에 솔깃해서 그녀와의 위장결혼에 대답을 했다. 위장결혼은 그 한 게임에서 이미 7백만원을 벌었고, 다시 그녀를 중국비지니스의 파트너로까지 만들 수 있다면 그에게는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 때는 비즈니스였다.

그녀는 이안주와 이튿날에 혼인신고를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전화가 걸려왔다.

"밤 11인데요?"

이안주가 한밤중에 만나자는 전화에 그녀는 무척 놀랐다. 하지만 거절할 계제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 한국 합법체류시간은 하루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비즈니스 결혼인 만큼 그녀는 역시 비즈니스를 하는 기분으로 그의 집으로 갔을 것이다. 상상했던 대로 이안주는 그녀더니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러나 남자가 병이 있어 밤은 그냥 조용히 지나갔다.

"그냥 그렇게 만난 남자인데 육체관계를 가지는 것 거부감이 없었어요?"

내가 바보 같은 물음을 제기했다.

"국적 따기 위해서는 참아야지. 나라구 왜 싫지 않겠어? 눈을 딱 감았지."

그녀의 가치관으로는 당연한 걸 왜 모르느냐 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어처구니없어졌다.

그녀에게 있어 이튿날은 한국체류 마지막 날이었다. 불법체류를 하다가 잡히면 중국으로 강제귀국을 당하는데 그렇게 되면 힘들게 한 한국행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에 여러 가지 중요한 계획이 있기 마련인데 그녀에게는 한국체류가 중요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무슨 방법으로든 이 문제를 풀어야 했다.

아침 9시에 그녀는 이안주와 함께 대서소(代書所)에 갔다. 법관을 지냈었다는 사람이 대서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돈이 없어 절에서 결혼했다"는 증언을 써주었다. 용산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신청했다. 아가씨 직원이 이틀 후에 오라고 했다. 그녀는 이틀이 지나면 '불법체류자'로 찍히기에 안 된다고 했다. 그 직원에게 동인당 우황청심환을 주면서 꼭 접수해달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접수하고 나서 두 주일 후에 오라고 했다. 그렇게 되어 일단 한국에서의 합법체류시간은 좀 번 셈이다.

그녀는 그 직원에게 수속을 좀 더 빨리 진척시켜달라고 부탁했더니 한 주일 후에 오라고 했다. 한 주일 후에 용산구청에서 준 서류를 가지고 이씨가 사는 대림사무소에 가서 서류에 그녀 열 손가락으로 지장을 찍었다. 사진과 서류를 가지고 통장에게로 가라고 했다. 오후였는데 통장이 없었다. 그녀는 통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통장은 집에도 없었다. 통장의 딸에게 먹을 것을 사주면서 엄마를 찾아오라고 했다. 애가 밖으로 뛰어 나가더니 한참 후 통장이 왔다. 두 주일 후에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지금은 결혼후 2년이란 시간의 고험을 겪어야 주민등록증이 나온다고 한다. 그 때는 아직 90년대 초반이어서 한국도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과의 결혼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아내지 못한 상황이라 그렇게 위장결혼이 쉽게 이루어질수 있는 법적인 허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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