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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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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1)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25>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7월 7일 저녁, 여름의 해는 길었다. 저녁 7시가 지났는데도 아직 날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아득히 빠진 포장도로를 따라 석양이 쭉 붉게 비추었다. 서울에 온지 10일밖에 안됐으므로 워낙 방향감각이 엉망인 나는 내가 아는 한 작가 분에게 안내를 부탁해 송파구 아파트 가에 이르렀다.

초록빛의 꽃무늬가 있는 철바자 속에 줄을 지어 선 아파트단지가 이상하게 눈익은 풍경이었다. 잠시 후에야 나는 느낌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아파트구조나 모양이 연변의 직장가족 사택들과 비슷했다.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는 연변의 사택들은 보통 6,7층인데, 이 동네 아파트들의 층수도 6층밖에 안되었다. 복도를 사이 두고 양쪽에 갈라져있는 집들, 층계와 창문구조들도 비슷했다. 내가 있었던 구의동 셋집동네는 전부 붉은 색 단독층집이었다. 102호 아파트의 첫 문으로 들어가 4층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연변 말을 하는 여자가 문을 열어주었으므로 나는 마치도 연변으로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집은 20평정도, 침실이 따로 있고 방이 다공능 베란다와 이어져있었다. 방 서쪽에는 책장과 책상, 텔레비죤이 나란히 놓여있고 동쪽에는 컴퓨터가 놓여있었다. 정주와 주방이 이어져있었고 주방 서쪽에 화장실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선생님의 조카였으므로 내 조카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나이는 27세, 키가 큰 임신부였다. 얼굴에 화장기가 없었지만 커다란 검은 눈망울이 예뻤다. 임신이 여러 달인 모양인데, 금방 한 돌이 된 아들애가 자꾸 칭칭 감겨들어 피곤한 모습이었다. 벽에는 부부결혼사진과 시모의 초상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걸려있었다.

취재를 왔다고 하니 이해되지 않는 기색이었다.

“남들처럼 희한하게 갖추어놓고 살지도 못하는데....”
라고 하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한국에 시집왔으면 당연히 잘 살아야 한다는 정신적인 부담을 갖고 있는 듯 싶었다. 한국에 시집갔다면 당연히 중국에서보다는 더 잘 살겠지, 라는 것이 중국 조선족들의 생각이어서 그녀는 자신이 그런 생각에 맞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는 것이다.

그녀는 커다란 바나나 덩어리를 들여왔고 또 수박을 큰 쟁반 가득 베여 들여왔다. 나는 이거야말로 중국식이구나 싶어서 웃었다. 중국에서는 한국에 다녀온 여성들만이 과일을 조각조각 예쁘게 작은 접시에 담아 손님을 접대한다. 한족들은 물론 조선족들도 중국에서는 손님을 접대할 때 과일을 큰 쟁반 가득 들여오는 것이 통례다. 그녀는 내가 중국 연변사람이니 아마도 연변에 살았을 때의 습관을 그대로 살려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연길에 본가 집이 있었다. 다른 형제는 없고 혼자 외동딸로 곱게 자랐다.

“부모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다 크도록 그분들이 베푸는 사랑을 향수만 해왔습니다.”

나오기 전에는 연길 모 백화 직원으로 있었다. 1994년에 한국에 올 기회가 생겼다. ××교육진흥원의 초청으로 나오다보니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다. 엄마는 아직 연애도 하지 않은 딸이 한국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할까봐 한국행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 결혼했습니까?”
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그냥 한국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한국으로 간다고 하면 무작정 부러웠습니다. 내 민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온 다음에는 또 한국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저렇게 우리와 말도, 습관도, 음식도 같은 나라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진정으로 한국에 시집와 살고 싶은 여자들은 사실 한민족만이 사는 모국의 다정한 분위기에서 중국보다는 나은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수 있기를 바란다. 56개 민족이 사는 나라 중국 조선족으로는 단일한 한민족끼리만 산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그녀는 1995년에 회사에 취직해 일하는 동안 컴퓨터학원에 다녔다. 학원강사를 하는 한국인오빠와 사귀었다. 1년 간 사귀었는데 갈등이 심해 갈라졌다.

그 때 집에서는 결혼나이도 되었는데 어서 중국에 돌아와 결혼하고 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에서 살고 싶었다. 장사하여 돈벌고 싶어서도 아니고 다만 한국이 마음에 들어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녀는 한국에 시집을 온 친구 집에 자주 다녔는데 친구 아랫집 총각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다. 친구신랑이 중매를 섰다.

“처음에는 아빠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내보니까 점점 좋아집디다. 자상하게 생각해주고 성을 안내는 타입입니다. 성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남자는 각 호텔과 음식점에 야채납품을 하는데 마음이 직하고 부지런하고 착했다. 그녀는 집에서 외동딸이다 보니 부모에게는 금이야 옥이야 하는 사랑이었다. 결혼을 하자 바로 태기가 있어 아기가 태어났고 한국식을 따라 아기가 금방 한 돌인데 또 임신을 했다.

한국은 연년생이 많은 것이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풍경이다. 중국은 주체민족인 한족은 아이를 하나밖에 못 낳고, 그 외 55개 소수민족들은 아이를 둘씩 낳을 수 있다고 말한바 있다. 조선족의 경우에는 아이 둘을 낳을 수 있는데 교육비 등 경제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아이 하나를 낳는 경우가 많다. 둘을 낳더라도 한국처럼 연년생은 낳을 수 없다. 꼭 3년 이상 터울을 놓아야 하며 가두 산아제한 위원회로부터 생육을 허락한다는 ‘準生證’을 타야 임신할 수 있다. 아이 둘을 가지는 집들을 보면 아이가 12살쯤 다 커서 아기가 그리워질 때 낳는 경우가 많다. 아이 하나만 키우려다가 아이가 장래 너무 외로울 것을 고려해 다시 계획하다보면 늦어지는 것이다. 여하튼 임신한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풍경은 우리에게 신기한 것을 떠나 무척 힘들어 보이고 내 몸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안쓰럽다.

아기엄마는 아기를 채 키우지 못했는데 또 임신해 힘들고 외로웠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남편이 많이 구슬리고 양보를 했다. 다투었다 하더라도 남편이 직장에서 먼저 전화를 해온다고 했다.

“중국조선족남자들보다 한국남자들이 더 성격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이었다.

남자는 둘째였고 시골에 부모가 있었다. 시형은 서울에 있고 도련님은 부산에 있었는데 시부모는 시내가 답답하다고 시골에서 살았다. 해산 후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니가 와서 때를 하고 그녀 몸조리를 해주었다. 맏이네가 맨 딸 둘인데 그녀가 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했다. 이번에도 아들일 것 같다고 그녀는 서운해 했다. 두 번째는 딸을 보고 싶었다. 시어머니가 성격이 좋아서 그녀가 짜증을 내도 얼리고 닥치고 맞추어주었다. 부모를 떠나 오직 외로웠으면 성질 쓰랴, 라는 심정이었다.

그녀가 한창 시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예, 먹었어요....예, 잘 먹고있어요.....”

그녀가 나에게 눈을 찡긋해왔다.

조조를 말하면 조조가 온다는 중국속담이 있다. 시모말을 하고 있는 중인데 시모가 전화 왔다. 고부간에 한참 다정한 문안이 오고갔다. 그녀가 외로워한다고 시모가 시골에서 매일이다 시피 전화를 걸어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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