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엄마가 한국에 습관 돼 하세요?”
“가정에 있기 싫어해요. 나가서 벌려고 하는데, 주변 중국교포여자들을 보면요, 다 식당서 일하기에 그렇게 힘든 일은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교포여자들 다방 많이 들어가는데, 우리 한국서는 다방, 술집에 들어간 여자들을 별로 안 좋게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돈맛을 알아놓으면 그냥 그 쪽으로만 돌려고 할 것이죠. 그래서 반대했더니, 본인이 집에서 견디기 힘들어해요. 비오는 날은 하는 수 없이 집에 있지만, 그 외는 자꾸 나가려고 해요.”
말하는 중에도 나는 아기가 선풍기 바람을 맞는 것이 속에 걸려 귀띔을 했다. 주인이 선풍기를 다른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 때 아기가 깨여나 도리반거렸다.
“예쁘다, 너 정말 예쁘다!”
나는 아기를 안아 일으켰다. 아기는 낯선 사람을 별로 가리지 않아서 더욱 예뻤다.
“엄마가 자꾸 나돌아다녀서 너도 따라다니느라고 고생 많이 했지?”
라고 하며 남자가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어디를 다녀요?”
“백화랑 다니죠. 아기를 업거나 유모차에 싣고 가죠. 그곳 선선하니까.”
얼마나 답답하면 그렇게 했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에 사는 여자로서는 그 고통이 보통 고통이 아닌 줄을 잘 알고 있다. 한 여자로서 어려서 보고 듣고 생각하며 자리잡았던 가치관을 전부 바꿔야 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경제문제가 아니더라도 여성이 직업을 가지는 것을 일종의 문화라고 보아야 한다. 모택동 시대부터 여성은 절반 하늘을 떠멨다고 긍정적인 시각에서 여성들의 해방을 주장했었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여권신장을 했기에 여성들의 체질에 맞지 않은 직종에까지 여성들을 동원하고, 남자들과 똑같은 체력노동을 하도록 강요하고 ‘강철여인’을 따라 배우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96년에 있은 세계여성대회에서 공포한 수자에 의하면 중국여성들의 권리는 세계적으로도 6위라고 한다. ‘3.8국제부녀절’이 중국의 명절이 될 만큼 중국은 탁아소, 유치원 등에서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고 월급 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다. 중국이 계획경제를 실시할 때는 다 같이 가난하게 살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직업이 있었고 따라서 여성들도 모두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등소평 노선이 실시되면서 계획경제가 상품경제로 넘어가고 개혁개방, 기구개혁이 실시되면서 사회주의적인 평균분배가 폐지되고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실업률이 현저하게 상승되었다. 남녀를 물론하고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이지만 여성들은 남편의 수입을 바라고 사는 것을 불안해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만큼 남자들도 아내들이 직장을 가질 수 있도록 협력해준다. 워낙 조선족에 비해 한족들은 전통적으로 아내를 더 끔찍히 생각해준다. 장을 보고 요리를 만들고 애를 키우는 것까지도 상당한 부분을 남자가 담당한다. 조선족은 원래 남자가 방에서 올방자를 틀고 아내의 대접을 받던 고루한 문화가 있었기에 한족들보다는 아내를 잘 해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내가 직장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면 식사준비를 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내가 일 때문에 탁아소거나 유치원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지 못할 경우에 아이를 데려오는 일도 도와주고 간혹 세탁이거나 설거지도 담당해준다.
경제력문제도 여성이 직장을 가져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중국의 월급수준으로 보면 맞벌이부부가 아이를 하나를 키울 수 있는 정도이다. 인구의 급속한 성장 때문에 중국정부에서는 한 쌍의 부부가 아이 하나를 낳을 것을 국책으로 제정하고, 위반의 경우 처벌조례가 엄한다. 조선족을 망라한 소수민족은 아이 둘까지 낳을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중국 경제상황이 어렵고 아이들의 교육비가 많이 들면서 거의 아이 하나만을 택한다. 결과 조선족인구 마이너스성장이 현재 심각한 상황이다. 조선족여성들은 경제력만 나아지면 아이를 둘까지 키우겠다고 하고, 실제상 경제력이 좋은 가정은 아이를 둘을 키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다른 문화환경과 교육환경에서 자란 조선족여성으로서는 한국의 문화에 적응해 현처양모의 사회각색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부분을 감안해주기를 바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거예요. 중국은 여자들이 고등학교를 나와서부터 직장을 가질 준비를 하죠. 직장 가지는 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요. 집에서 노는 거, 그런 건 상상도 못할걸요.”
“글쎄, 그런가 보더라구요. 가정 쪽으로 애 엄마를 돌려놓느라고 고생 많았어요. 일하는 여자들을 보면 막 질투하고, 신경질을 쓰고, 나가고 싶어 했어요. 중국처럼 아기를 하나만 낳는다고 하더라구요. 아기를 키워놓고 나가 일할 궁리를 했는가 봐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 아기 하나 더 낳을까, 자기 쪽에서 자꾸 물어 보는데요 뭐.”
김기석씨가 장한 아이를 말하듯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기에게 빠지면 나가라 해도 안나갈걸요.”
“사모님이 기어코 맞벌이부부를 하려고 하면 어떡하실 거예요? 사장님은 동의 하실까요?”
“기어코 나가려 하면 나가게 해 야죠. 그러나 전문으로 뭔가 배우고 나가든가 해야지, 그냥 식당, 다방, 술집, 그런 곳은 절대 안돼요. 자기에게 맞는 직업이 있으면 나가게 할거예요.”
“또 어떤 갈등들이 있었어요?”
“언어가요, 보통 말은 이해하는데, 깊은 말은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말에 괜히 화를 내고 그래요. 하는 수없이 한자로 적어주기도 해요. 옥신각신할 때에는 아예 말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아요. 오해가 적게 생기니까요. 나이도 아기엄마보다는 12살이 이상이니까, 많이 참아야죠.”
“그럼요, 선배분이 참으셔야죠.”
내가 농을 했다. 마치 여자 친정이기나 한 듯이 그의 말이 만족스러웠다.
“한국예절은 전혀 모르거든요. 하나하나 배워 야죠. 시골에 부모들이 계셔서, 자주 못 만나니까, 예절 다 챙기지 못해도 괜찮아요. 다 이해해주거든요.”
“부모님들이 조선족며느리를 예뻐하세요?”
“처음에는 텔레비죤에서 조선족여자들이 가출한다 보도를 듣고, 부모님이 근심스러워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말했죠, 이 여자를 내가 더 잘 아니까, 믿어주세요. 지금은 시골부모님들 아이엄마 좋아해요. 자꾸 놀러왔으면 해요.”
“음식은 잘 만들어요? 중국서는 볶음요리를 많이 먹을 텐데, 여기서는 담백하게 먹고, 많이 데치고 무쳐서 먹잖아요.”
“음식은 못 만들어요. 내가 많이 하지요. 늦게 장가가다보니까, 자취를 많이 했었거든요. 아기엄마 임신할 때에 입덧이 심해서 그쪽(중국) 음식을 누가 가져온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난 못 먹겠더라구요. 여기 음식 아기엄마 잘 먹고, 가리지 않아 일단 음식 탈은 없어요.”
“중국에서는 거의 전부가 맞벌이부부다 보니까요, 남자가 여자를 많이 생각해주거든요. 가무도 거들어주고.”
“저도 집에 가면 가무를 많이 해요. 중국남자만큼 해요.” 그리고는 씽긋 웃는다. 나도 웃었다. “아기가 금방 태어났을 때에는 한밤중에 빽- 울면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고, 그러다 보면 잠을 못 자요. 아기엄마는 한 번 잠들면 그냥 곯아떨어져요.”
기석씨가 아내의 변화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준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싶었다. 한국인과 중국조선족의 문화의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반세기의 문화환경과 교육환경에 의한 남녀지위에 대한 인식은 판이하다. 이런 판이한 점을 상호 감안하지 않는다면 갈등에로 치달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여자들에게 할 이야기들이 없으세요?”
“한국남자로서는 여자가 너무 중국생각만 하는 게 힘들어요. 이제부터는 한국인이다, 라는 점은 잊고 그냥 중국인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정신이 그쪽에 가있죠. 아기엄마는 그렇지 않지만, 다른 중국여자들은 자꾸 집에 돈을 빼돌려 남자가 신경 쓰게 한대요. 그러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죠. 서로 의논하고, 합의해서 뭐든 해야죠.”
김기석씨는 1억 2천만원을 주고 집 하나를 샀다고 했다. 가계는 세를 냈지만 이미 20여 년을 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일단 집 있고, 직장 있으면 괜찮은 편이지요?”
“그럼요. 그러나 사람이 어디 만족이 있어야죠.”
김기석씨는 아기에게 오줌을 누이고 우유를 먹였다. 나는 아기엄마가 불쑥 나타나면 부부사이에 불화라도 생길까봐 겁이 났다. 김기석씨는 나의 눈치를 채고 웃으며 아기엄마가 시부모 생일이어서 백화점에 옷 사러갔다고 했다. 모레 시골을 함께 가기로 했다고 했다.
“두 분은 그러니까 자유연애를 해서 결혼했네요.”
“그런 셈이지요. 중국에서 만난 남자나 여자는 그냥 사진 하나로 결혼하면 성공의 확률이 낮아요. 여기에 얼굴모양이 쏘련계 같이 생긴 교포아줌마가 있어요. 그냥 하루 선보고 결혼해오고 보니까, 남자가 고스톱만 치고 술만 퍼마시더래요. 너무 부인을 때리길래 곁에서 모두 그 아줌마더러 떠나라고 했어요. 그래도 여자가 참고 살더니, 후에는 하는 수 없이 가출해 지금 호프집에 있더라구요. 착한 여자예요.”
‘금보당’을 나오며 나는 문뜩 유행가에 나오는 가사를 생각했다.
“사랑이 별거더냐.....”
김기석씨가 담담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 갈등을 구체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에 두 사람은 그 얼마나 많은 나날들을 힘들게 보냈을까? 형제들을 두고 중국을 떠나온 여자는 또 그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고통 했을까? 그렇게 섬세하게 부딪히는 과정이 부동한 나라의 두 가지 문화를 하나로 길들여 넣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사랑이 별거더냐, 서로의 이질적인 부분을 인정하거나 동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정이라는 것에 하나로 만드는 것, 이것이 아닐까? 사랑을 아끼고 키우는 남자가 바로 김기석씨와 같은 분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아량 깊은 남자들이 있으면 멀리 중국에서 온 여자들이 훨씬 더 빨리 이 나라에 적응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그리고 이번 취재를 성공하게 해준 오빠같이 너그러운 오용씨에게 또 한번 감사하며, 한낮의 기세대로 여전히 뜨겁게 쪼이는 석양을 마주해 용산역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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