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사랑이 별거더냐(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사랑이 별거더냐(1)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23>

***사랑이 별거더냐**

역시 나에게는 오용씨의 은혜가 컸다. 오용씨는 커피와 쥬스를 사줬고, 장편이야기를 선물했고, 조선족여자와 결혼한 한국남자를 취재대상으로 소개해줬다.

용산역 다방에서 취재가 끝나자 나는 오용씨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결혼에 성공했거나 실패한 조선족여자들을 소개해주세요.”

“아, 바로 여기 가까운 곳에 있어, 가자.”

“정말이세요? 그러나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반신반의했다. 취재 전에 오용씨는 나더러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었다. 그것을 경계해 나는 이렇게 찍어 말했다.

조선족이라는 이름 하나가 한국에서는 몇 곱절 더 친밀감을 주었다. 곧 아주 잘 아는 사이처럼 이야기들을 나누고 농을 주고받았지만 필경은 금방 만난 사람이다. 중국에서 만났다면 이처럼 많은 친밀감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를 왜 무서워하네! 건빵집이라, 건빵!”

오용이 서운해했다. 나는 집은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따라갔다.

용산역 다방 북쪽 길을 에돌아 동쪽으로 수백 미터를 가니 공중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지나 남으로 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돌아서니 가게들이 가득 나타났다. 그중 한 가게의 문을 밀었는데 문은 잠겨져있었다.

“아이구, 없네! 내가 다닐 때에는 주인이 매일 있었는데? 나와 친하다구, 친해!”

“금집인데 왜 건빵집이라고 했어요?”

나는 ‘금보당’이라는 간판을 쳐다보며 물었다.

“건빵, 건빵이라구! 누가 건빵이라고 했어?”

오용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가 구분해서 말한 ‘건빵’이 똑 같은 ‘건빵’이였다. 그가 경상도발음으로 ‘금방’을 ‘건빵’이라고 발음한 것을 알고는 고소를 금 할 수 없었다. 나는 우유와 치즈 향이 가득 찬 빵집으로 생각하고 있은 것이다. 옥신각신하고 있는 중에 30대의 한 남자가 와서 오용의 어깨를 툭 쳤다. 오용이 반색했다. 바로 그 ‘건빵’ 주인이었다.
조선족처녀와 결혼한 김기석이라는 한국인이었다. 금 액세서리 가게를 꾸리고 있는 김기석, 첫눈에 한국식 미남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너부죽한 얼굴, 눈썹이 짙고 얼굴바탕이 희고 깨끗했고, 웃을 때면 하얀 이빨이 가쭌하게 드러났다. 사람을 볼 때의 큰 눈이 정직해 보였다. 키는 중등 키, 그러나 체소하지 않고 다부졌다. 결혼한 조선족여자도 틀림없이 미인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바램이었는지 모른다.

매대 안에는 예쁘고 정교한 액세서리들이 진열돼 있었다.

“곡절이 많았지요. 책 한 권을 써도 다 못써요. 우리 사이의 일을 조금 써보기도 했어요. 이다음 아이에게 부모의 일을 알려주려고요.”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타입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의도를 밝히자 곧 지극히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그러세요. 그러잖아도 이런 얘기 참 하고싶었어요.”

일단 마음이 놓이고 기뻤다.

“금방 여기 있다가 갔어요.”

나와 오용은 그의 눈길을 따라 액세서리 매대 건너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금방 갔다는 그의 아내 조선족 여자를 그려보았다.

“내일은 취재약속이 되었으니깐요, 모레 전화 드려 시간을 약속하면 어떨까요?”

시간이 바쁘다는 말이 나올까봐 근심돼서 얼굴 가득 웃음을 떠올리고 상냥하게 말했다.

“예쁘다, 예쁘다....”

오용이 나를 빈정댔다. 자기는 경계하고, 금보당 주인에게는 상냥하다고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재미있었다.

“그러죠 뭐, 그냥 여기 있으니깐요.”

그러나 모레가 되는 7월 7일에는 아침부터 된서리를 맞았다. 가장 기쁘게 취재하고 싶었던 ‘금보당’의 취재를 거절당한 것이다.

“김기석씨 있어요?”
라고 물었더니 어느덧 나의 연변억양을 알아들은 조선족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니쓰쑤이야? (你是誰呀?)”

처음에는 그 중국말이 어떤 은밀한 암호나 맞아떨어진 듯이 반가웠다. 그러나 그것은 곧 취재거절의 전주곡이었다.

“우린 그런 거 안 해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취재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왜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해석도 안하고 말했다.

“어제 아빠랑 와서 말하더라구요. 그런데 그런 거 안 하기로 합의했어요.”

설명을 거듭하다보니 더 할말이 없어졌다. 다시 전화하겠으니 생각해보라는 말로 억지하회를 만들고는 전화를 끊었다.

문인협회 성춘복 회장님과 만나면서도 나는 줄곧 거절된 그 취재에 대해 생각했다. 5일날 김기석씨 만났을 때 취재를 했어야 했다는 것이 나를 후회막급하게 했다. 소뿔은 단김에 빼라, 이것이 이번 취재의 경험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도 마음이 변해 취재를 취소하곤 했다. 한국에 온 사람들은 불법체류자든, 시집온 조선족 여자든 한국에서의 힘든 모습을 나타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점심에 성회장님이 사준 서울냉면을 맛있게 먹고 나서 나는 고집스레 용산으로 향했다. 약속이 취소되었으니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말아야 했지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금보당의 문을 두드렸다.

뜻밖이라는 듯 김기석씨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집사람이 이미 말했지 않느냐, 라는 뜻이었다. 예쁜 여자아기가 전날 내가 앉았던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사모님으로부터 얘기 다 들었거든요. 부담스러우신가본데요, 그렇지만......”
라고 하면서 청하지도 않은 자리로 슬금슬금 다가가 아기 곁에 앉았다.

“글쎄 지가 뭐, 싫다고 하니까.....”

김기석씨는 전날에 한 대답이 있는지라 조금은 무안한 듯이 말했다. 그러나 곧 너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멀리 중국서 이렇게 오셨는데, 물을 거 있으시면 물으세요, 지(아내를 말함.)야 뭐 내가 말했는지 안했는지 안다구요?”
라고 해서 나는 하마터면 활짝 웃을 뻔 했다. 놓쳤다고 안타까웠던 취재를 할 수 있어 기뻤다. 그리고 그 말도 재미있었다.

“집사람은 한국에 나온 지 9년이 됐어요. 한국에 있는 중국 면세점에 직원으로 있었어요. 저의 가게를 많이 다녔어요. 그래서 알게 됐는데요, 처음에는 일본교포인줄로 알았어요. 한국말이 너무 서툴기는 한데 사투리는 없더라구요. 알고 보니 중국 장춘에 사는 교포였어요. 너무 중국말만 해서 한국말이 서툰 줄을 알게 됐어요.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는 다 집에 보내더라구요. 엄마가 그 돈으로 음식점을 하는 중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엄마가 갑작스레 사망했어요. 식당을 다 처분했는데도 빚을 져서 본인은 엄마 때문에, 그리고 식당 때문에 많이 고통스러웠죠.”

“사모님이 예쁘시겠네요?”

“제가 보기에는 물론 예쁘죠. 저는 교를 믿는 사람이거든요. 여자가 예쁘고 착해서 결혼을 작정했는데, 그러나 교를 믿는 것을 전제로 했어요. 저를 알면서 여자도 교를 믿기 시작했어요.”

“가장 큰 갈등은 무엇이었나요?”

“교포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여자가 나에게 아기엄마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많이 해서 갈등 많이 겪었었어요. 작년 12월경에 서류가 다 됐어요. 그 전에 한국에서는 혼인신고를 했어요. 그 때 아기엄마는 장춘으로 돌아갔거든요. 내가 다시 초청을 안 할까봐 근심돼서 전화 왔더라구. 임신했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하더라구요. 지금 아기 6개월이 됐어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