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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결혼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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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결혼의 실패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21> 인간 대 인간을 위한 노력가(4)

***두 번째 결혼의 실패**

그렇게 혼자 집에서 울면서 반년이 지났어요. 바깥에 나갈 자신이 없어 집에만 틀어 박혀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인 선배분이 전화 와서 나오라고 하더라구요. 정신차리고 일해, 하더라구요. 저도 나갈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선배 분이 직장 소개해줘서 여행사에 취직했어요.

가구는 친구에게 줘버리고 전세를 빼서 이사했어요. 부모님이 잘 아는 집인데 방이 많았어요. 이혼 후 6개월 있는 동안 그 집 아드님이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제가 장춘공안학원을 졸업한 중국 조선족 친구를 소개해 결혼한 분이거든요. 그분의 친구가 저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장 선생(필자의 문인친구)도 잘 알아요. 집안은 괜찮은 편이지만 본인은 좀 무능해요. 노력하는 편이 아니고, 막내여서 그런지 받기만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대신 착해요. 부모와 형제들이 좋았어요. 시어머니, 시누이도 참 저를 잘 대해줬어요. 시누이남편은 한화그룹에 다녔고, 외삼촌도 한화의 사장이었어요.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은 상태기에 저를 도와주는 그 친구에게 호감이 생겼어요.

두 번째 결혼을 부모님은 반대했어요. 저도 자신이 없어 결혼에 관해서는 미루기로 했어요. 그 남자는 총각이기에 그의 인생에 책임지지 못할까봐 겁나기도 했어요. 그랬지만 당시 저는 누군가에게 몹시 기대고 싶은 상황이었기에 그의 인정과 그의 후한 가정 조건 때문에 승낙하고 말았어요.

1996년에 결혼을 할 때 집을 샀어요. 시댁에서 반을 내고 반은 은행대출을 해서 신랑과 함께 벌어서 갚았어요. 가구는 저의 돈으로 샀어요. 집은 신랑이름으로 등록했어요. 당시 운이 좋아서 제가 큰 단체 2백54명(1백90명, 64명 두 팀이었음)을 인솔해 천만원정도 벌었어요. 차도 한 대 사서 남편이름으로 등록했어요. 운전면허증도 따고 남편과 조용히 살았어요. 기분이 좋을 때에는 시댁식구들과 함께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고 놀기도 했어요. 1996년도에는 시누이와 함께 중국 연길에 가서 대우호텔에 들고 두만강 무역상담회에 참석했었죠.

신랑은 그의 고모부와 함께 공장을 했어요. 신랑은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우리의 생활에는 그 고모부와 친구가 나쁜 작용을 많이 했어요.

우리는 여유 있는 생활은 했지만 남은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5백만원을 빌려달라고 했어요. 남편은 그 친구는 어렸을 때 친구고 30년 친구니까 꼭 빌려줘야 된대요. 남편이 워낙 성품이 착하고 이미 대답한 상황이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한 달이면 된다고 했는데, 그 사람 깜쪽같이 없어진 거예요. 열 받아서 남편과 다투었어요. 그 돈 적은 돈 아니잖아요. 가정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된다고 했어요.

어느 날 고모부가 또 남편 꼬드긴 거예요. 우리 집을 담보로 하고 대출을 하려고 말이죠. 제가 출근을 하려고 하는데 남편 갑자기 인감을 받아 서류를 떼 오라고, 고모부 담보 서주라고 했어요. 저는 5백만원도 못 받았는데 안 된다고 했어요. 출근을 하면서 별로 신경을 안 썼어요. 그런데 퇴근해 돌아와 보니 남편이 도장을 가지고 가서 고모부대출담보를 섰더라구요. 당시 많이 놀랐어요. 집이 남편 이름으로 되기는 했지만 어찌 혼자 아내 동의도 없이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일이 터지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3개월 후 1998년 3,4월경에 우리 아파트가 압류 당했으니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죠. 고모부는 중국으로 도망해 천진에 가 있고, 우리는 집을 나가야 하는 거예요. 남편이 집까지 날렸으니 정말 실망했어요.

저의 성격으로 이런 일 못 참아요. 집안 좋고, 시어머니, 시누이가 다 좋은 이런 집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동안 참았어요. 옥신각신 했지요. 남편은 워낙 착해서 누구에게나 싫은 소리 안 하는 성미여서 답답하기만 했어요. 그 동안 남편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1년 반 정도 조용히 잘 살았어요. 그러나 너무 착해서 당하기만 하니 앞으로 재미있게 살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두 번 유산했어요. 아기를 가질 생각이 없었어요. 제가 유산하면 시어머니가 무척 속상해했어요.

남편은 이혼을 안 해줬어요. 죽어도 안 한대요. 매일 싸워도 안 할 거라고 했어요. 저는 삼촌에게로 찾아가 도저히 참고 살수 없다고, 죄송하지만 도와주세요, 혼자 살고 싶어요, 라고 했어요. 삼촌은, 너희들은 하나는 한국에서 하나는 중국에서 살아온 환경이 틀리기에 많이 힘들 거라고, 이해한다고 했어요. 삼촌은 남편에게 전화했어요. 박 서방, 애가 너무 기가 세니까, 고생도 시켜줘야 알 거다, 이혼하면 판결서가 2부 나오는데, 3개월 내에 신고하면 이혼해제를 해주고, 3개월 지나면 무효 돼서 이혼이 성립된다, 3개월 고생시켜보면 고생 겁나 돌아 올 테니까, 한 번 그렇게 해 보라, 고 했어요. 남편 착해서 그렇게 해줬어요. 제가 돌아오려니 생각한 거예요. 남편은 삼촌에게 약속을 지킬 수 있냐고 세 번 물어 보더래요. 법원에서는 우리에게 30분 생각할 시간을 줬어요. 저의 이름으로 이혼신고를 했으므로 법에서는 남편에게 이혼하겠느냐고 물었어요. 남편은 대답을 안 했어요. 합의이혼은 두 사람이 다 동의해야 하므로 제가 남편더러 대답을 하라고 했더니, 남편은 마지못해 예, 라고 대답하더라구요. 판결서가 2부 나왔는데 남편은 그걸 다 자기가 가지려고 했어요. 전 한 장을 빼앗다시피 하여 가졌어요.

그 때는 이미 저 혼자 여행사사무실을 차린 때였어요. 차는 저의 돈으로 샀으니 이혼하더라고 가지고 싶었어요. 차를 몰고 청주에 있는 삼촌 집에 갔어요. 그날을 삼촌 집에서 잤는데 숙모는 저더러 이혼을 포기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어요. 저는 입을 옷은 가져와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집으로 갔어요. 삼촌은 제가 신랑에게 맞기라도 할까봐 중국서 한국에 시집 온 선배언니와 함께 가라고 했어요. 시어머니가 와있었어요. 예쁘게 장식한 집을 보니 정말 떠나기 아쉬웠어요. 27평인데 침실 세 개에 객실 하나가 딸린 집이에요. 그러나 가구 하나 안 만졌어요. 남편은 차도 두고 가라고 했어요. 저는 중국식으로 생각했어요. 저의 돈으로 샀으니 제가 가져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제가 그냥 떠나버리자 도난신고를 해버렸어요. 저의 핸드폰으로 저에게 알려주더라구요. 저는 진짜 놀랐어요. 2년 부부 했고, 차는 저의 돈으로 샀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냐고 말했어요. 그런 말 필요 없다, 경찰서에서 만나자, 라고 하더라구요. 나중의 이야기로는 저를 만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고, 설득해서 집에 돌아오게 하려고 그랬다고 하는데, 저의 사고방식으로는 이런 걸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옷과 정구채, 책들을 월셋집에 부려놓고 차를 가지고 집으로 갔어요. 저는 남편에게 키를 줄 테니 집 밖으로 내려오라고 했어요. 남편은 너를 찾을 수 없고 만나고 싶어 그런 방식을 취했으니 이해하라고 했어요. 저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런 처사 치사하고, 1천30만원 주고 산 차를 가지고 잘 살라고 했어요.

중국대사관의 한 선배님이 저의 서류작성을 도와주고 저랑 같이 돈을 벌었어요. 남편은 그 선배와 같이 한 일을 신고하겠다고 핸드폰으로 협박했어요. 저는 신고 할 테면 하라고, 위법한 일이 없으니 좋을 대로 하라고 했어요. 남편은 얼리고 닥쳐도 안되니 삼촌에게 전화해서 저를 돌아오게 해달라고 했어요. 삼촌은 제가 그 사람을 싫어하니 그 사람에게 전화해 저에게 시간을 주라고 했어요. 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면 왜 서로 의논해 일을 처리할 것이지, 이렇게 감정이 상할 때까지 있었느냐, 그런 식으로 말했대요. 그 사람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1년 정도 서로 지내보자고 하더래요. 착한 남자니까. 1년 동안 너의 가구 누구도 못 다치게 하겠으니 그 때 돌아오기 바란다고까지 했어요. 그러나 저는 이미 그 사람과의 생활을 생각하기 싫었어요. 처음에는 무능하다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치사하다는 생각에 지겨웠어요. 저도 못한 부분이 많으니까, 저를 잊으라고 했어요. 그래도 계속 전화를 해오길래 전화를 바꿔버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고모부나 그의 친구만 아니었어도 그럭저럭 평범하게 지금까지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정의 파열의 계기는 그 사람들이 만들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참고 살더라고, 그 사람은 아무런 발전이 없었을 거예요. 제가 이렇게 나왔기에 그 개인은 오히려 더 충격을 받고 나아졌을 수도 있어요. 좌절을 당하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의 경험이 바로 그거예요.

작년에 저는 여행업이 잘 돼서 중고차도 하나 사고 돈도 꽤 벌었어요. 당당하게 자존심을 회복해 잘 살고 있어요. 저는 중국조선족여자들의 한국결혼생활이 힘들어지는 원인은 문화적인 갈등과 한국 사회 주변의 편견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대부분의 이혼은 막부득이 한 이혼이에요. 저의 노력으로 조선족에 대한 한국 사회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앞으로도 저는 역시 한국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한국인이 되어 살거예요.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로 이해심이 깊고, 사업에 노력하는 남자를 찾고 싶어요. 시간을 가지고 서로의 문화적인 갈등을 이길 수 있는 인내를 가진 남자가 필요해요. 스스로 그동안 많이 성숙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두 번 결혼의 실패는 어찌 보면 두 사람의 나이가 너무 젊고 세상물정을 너무 모른 것이 가정을 보호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었을 거라고,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더 기회가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주관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해요. 한국 주변의 이해와 너그러움이 필요해요. 사회편견이 한 가정을 파괴로 이끌어가기는 아주 쉬운 일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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