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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박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20> 인간 대 인간을 위한 노력가(3)

***외박**

아기가 달이 찰 때 본가편의 엄마가 서울에 와서 도와줬다. 금화는 아기가 5개월일 때에 친정에 다녀왔다. 한 달을 있다가 왔는데 신랑이 조금 이상한 기미가 있었다. 남편은 잘 생겼고 영어를 잘하고 세계 각지를 많이 다녀 식견도 넓고 구변도 좋았다. 금화는 남편이 여자들에게 인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심양 호텔에서 전화를 했는데, 분명히 집에 있어야 할 밤 12시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공항에 마중오라고 알려 주고 싶었었다. 이튿날 집에 도착하니 이불을 세탁한 흔적이 있었다. 집일은 워낙 전혀 손을 안 대는 타입인데 더구나 이불을 씻었다는 것은 어딘가 반상적인데가 있었다. 그래도 그냥 흘려버렸다.

금화는 집에 오자마자 대청소를 했다. 그런데 침대 밑에 긴 머리칼이 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생겼어요. 워낙 끼가 좀 있는 거는 아니까요.”

설마 했다. 금화네는 삼층에 살았는데 옆집과 친하게 지냈다. 금화가 돌아온 것을 보고 옆집 언니가 놀러왔다.

“동완이 아빠 여동생 있어요?”

금화는 누나가 왔을 리는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되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여동생이 왔다갔어요.”

금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랑이 퇴근하고 와서 금화가 와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신랑은 분위기를 잘 잡는 사람이어서 평소에도 맥주 한 병을 놓고 기분 좋은 말을 곧잘 했다. 금화는 맥주를 사왔다.

“왜 사왔어?”

“한번 분위기 잡아 보려구요, 갈라져 있은 지 한달 걸렸으니까요.”

금화는 맥주를 마시며 물어보았다.

“어제 누가 왔다갔어요?”

“아니!”

“몇 시쯤 퇴근해왔어요?”

“아홉시에.”

“한국시간 12시에 전화했는데? 집에서 뭘 했어요?”

금화는 남편이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에 전화했지 않나 생각 중이었다.

“아무것도 안 했다.”
라는 신랑의 말이 떨어지자 금화는 화가 울컥 치밀었다. 둘은 큰 소리로 옥신각신 따졌다. 싸우고 나서 3-4일 밥도 해주지 않았다. 남편은 일주일정도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금화는 아기를 업고 아침에 남편 직장으로 찾아갔다.

창피하기에 빌딩 아래층에서 기다리는데, 남편이 출근하다가 놀라 커피숍으로 잡아끈다. 남편은 다시 오지 말라고 하였다.

“만나서 이야기해요, 일단 집으로 가요. 애도 있으니까 생활비는 대야잖아요.”
라고 했는데 남편은 집에 오자 바로 이혼하자고 한다. 금화는 그가 갑자기 외박하고, 관계가 급작스레 악화되니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금화는 아직 젊었으므로 일단 이혼에 동의한다고 하고, 그러나 애는 키워야 하니까 생활비는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여전히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동안 혼자 있으면서 금방 여섯 달이 된 아기를 생각하니 불안해서 이혼할 수 없었다. 시댁에 통화하고, 둘째 동서에게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다. 시부모에게 아빠가 여자가 생겨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시모는 아들을 버릇을 가르치겠다고 금화네 집으로 왔다. 금화는 시모에게 한가닥의 희망을 걸었다.

남편은 시모에게 전화로 “어머니, 돌아가세요, 상관 마세요.”라고 하면서 금화가 자기를 오해하고있다고, 밥도 안해주는 여자라고 했다. 도와주려고 왔던 시모는 금화에게 화를 내며 왜 밥을 안해줬냐, 이년, 저년, 라고 하며 욕했다. 시모는 아들이 이혼하려는 것을 더는 말리지 않고 반달동안 기다려 이혼하는 것을 보고 손자를 안고 돌아갔다.

“저에게는 이 남자가 첫 남자니까, 용서해주겠다는 말도 했어요. 그러나 시모가 와 있은 것이 이혼을 더 빨리 만들었어요. 오히려 부채질을 하는 거예요. 한국은 맏이가 집안의 권위예요. 그런데 맏이는 형수가 난산으로 죽다보니, 후처를 두고 딸 하나를 키우고 있고, 둘째가 부모를 모시면서 맏이의 아이까지 키웠으니까, 둘째 네가 이 집의 권위로 됐거든요. 그런 둘째 형네도 전혀 말리지 않았어요. 부모나 형제가 한 번쯤 막아줬어도 이혼은 안하는 거예요.”

중국은 부부쌍방이 직장을 가지고 있기에 우선 엄마에게 아이소유권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여자가 경제력이 없기에 아이소유권이 우선 아빠에게 있다. 금화는 젖도 떨어지지 않은 아기를 차마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위자료도 내지 않겠다고 했다. 하는 수없이 아기는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금화네는 평소에 남자의 이름으로 적금했다. 금화는 그 돈은 사실 자기가 번 돈이라고 했다. 천만원정도 되는데 그 남자의 이름, 그 남자 도장이 찍혀있어 그 사람의 것으로 되어버렸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전셋집을 압류했다. 전셋값은 본가편 엄마의 것이므로 빼서 돌려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이혼은 1994년 12월, 혼인신고 2년 만에 결정됐다.

가구는 금화의 돈으로 산 것이어서 그냥 전셋집에 눌러있었다. 금화는 고통스럽고 창피했고 주변의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이혼에 대해 보수적으로 생각한 편이었어요. 애가 보고 싶어 죽겠더라구요. 혼자 울고, 술에 취해 겨우 잠들기도 했어요. 친정 친척들과도 이야기 안했어요. 이혼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분들이었기에 오히려 저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실 거예요. 네가 남편 맞춰줬어야 한다 등 한국식으로 말하곤 했어요. 평소에 친정 사촌올케는 갈비며, 김치를 만들어주면서, 이렇게 신랑 해줘라, 라고 했어요. 저도 많이 배우고 노력했어요. 그래도 그들은 다는 이해를 못해요. 한국인이니까.”

“금화씨도 중국식으로 처리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에 대해 마음에 안 든 부분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를 할머니가 안아갔으니까 많이 가슴이 아팠겠네요.”

“그 때 저는 직장도 없고 아기가 금방 여섯 달이어서 출근할 수도 없었어요. 그 집에서 위자료는 절대 내지 않겠다고 하니 그 사람이 가지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사실 저는 아이를 그 집에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집안이 좋은 집에 보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했어요. 큰형수는 아들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어요. 딸 네 명에 아들 하나를 두고 떠나갔는데 그 딸 네 명을 다 스웨덴에 입양아로 보냈거든요. 이런 집안이어서 아이를 내놓는 게 정말 싫었어요.”

“한번쯤 남자와 타협해 봤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법원에 이혼 서명을 하러 가기 전이었어요. 아기를 보더라도 한 번쯤 참자, 아기가 불쌍해, 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은 집안이 다 아는 일인데, 다 이혼하라고 하는데, 퇴로가 없어, 라고 말하더라구요. 지금 같으면 저도 성숙했으니 방법을 대 이혼을 피했을 거예요.”

금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을 때와 같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 후 전혀 만나지 않았어요?”

“아니요. 커피숍에서 만난 적 있죠. 이혼이 전혀 실감나지 않은 상태였어요. 아빠가 먼저 전화 왔었거든요. 아기 물건을 찾아달라는 구실이었지만 그 사람도 이혼을 실감 있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저도 이혼을 원한 상태였다면, 모른다고, 올케를 보내라, 이런 식으로 만나주지 않았을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어떤 희망을 가지고 갔어요. “아기가 보고 싶을 때 만날 수 있겠어요?” 라고 물었더니 “부모 살아생전에는.....”라고 하며 안 된다는 거였어요. “당신 아기인데 부모가 무슨 상관이에요?”라고 말했더니 “너 아직도 반성 없네.”라고 하더라구요. 나는 화가 나서 내가 무슨 반성이냐, 하는 식으로 대어들었고, 그렇게 옥신각신 다투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반성의 뜻을 조금이라도 보냈어도 그의 마음이 돌아섰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하는 금화의 기색에서 그 때의 사랑에 대한 아픔이 엿보였다.

“그 남자 평소에는 잘 해줬어요?”

“잘 해줬죠. 우리는 연애를 참 뜨겁게 했었어요. 저도 옷 센스가 있는 편인데 그 사람과는 비하지도 못했죠. 백화점에 가서 저의 옷을 골라서 사 주곤 했어요. 저녁에는 재미로 오이 팩도 해주고, 맛사지도 해줬어요. 월 셋방에서 살 때에는 정말 따뜻하게 지냈어요. 제왕절개술을 할 때에는 밥도 다 한술한술 떠 먹여줬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쉽사리 이혼이 됐을가요?”

“지금도 그 남자 생각이 가끔 나요. 지금쯤이면 용서했을 것 같아요. 곁에서 도와줬어도 갈라지지 않았을 수 있었어요. 중국조선족여자라는 자존심과 열등감, 스스로도 중국조선족여자였기에 그들이 잘 안 해줬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구요, 그 사람도 한국여자면 자기를 더 잘 해줬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나봐요. 저는 한국 습성도 잘 몰랐으니까, 저에 대해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있었겠죠.”

“이데올로기 적인 갈등은 없었어요?”

“있었죠. 저는 한국말을 잘 못하니까, 국민을 인민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랬더니 아마 이데올로기적인 감정을 건드렸나봐요. 왜 북한처럼 인민이라고 말하냐, 하더라구요. 살다보면 언짢은 일 생겨서 당신 없어도 나 잘 산다, 이렇게 말할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못사는 사회주의나라서 와서 왜 까부냐, 위장결혼이라 신고하면 중국 보내질 거니까, 넌 중국 가서 살아야지, 여기서는 못살아.... 등 이런 식으로 말이 나오면 저는 굉장히 화가 났어요. 친구들과 물어봤는데, 친구들도 부부싸움에 꼭 못사는 나라 중국 보내야겠다, 이런 말들이 나오곤 한대요. 하나같이 똑 같아요. 그러니까 어찌 잘 살아지겠어요!”

“여러 가지 갈등이 그 사람을 외박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서로 이기며 나갔더라면 좋았죠. 가끔은 임신중과 해산 후에 잠자리를 같이 안 해주고 한 달간 중국에 와있어서 잠깐 실수할만한 조건도 있었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때도 있어요.”

“그 사람 지금 혼자라면서? 다시 만나면 서로 이해를 하면서 살수도 있지 않을까?”

“둘째 누나가 가장 이해하는 편이었어요. 이혼할 때에도 둘째 누나가 저더러 참으라고 말했었어요. 동생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니 일단 참아 주라, 라고 권해왔어요. 둘째 누나는 보험회사 직원이었고, 그 남편은 경찰이었어요. 한동안 저도 아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집 식구들 누구도 만나지 않았었는데, 작년(99년도)에 저의 일이 잘 풀리고 자신이 생기니까, 아기도 알고 싶어서 둘째 누나 만났어요. 둘째 누나는 동생 도와주라는 식으로 권고했어요. 저는 말했어요. “그 사람 저 때문에 이렇게 기나긴 5년을 방황했다면, 그 사람 문제 있는 거에요. 여자인 저도 일어났는데, 그 사람 남자로서 그러면 어떡해요? 아들도 있는데 어서 일어나야 되죠!”라고 했어요. 저는 남자가 그렇게 긴 시간에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업에서 자립하고 성공한 여자 금화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 표정이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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