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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갈등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19> 인간 대 인간을 위한 노력가(2)

***문화갈등**

"저는 한국풍속을 전혀 몰랐어요. 한국이 저에게는 여러 가지로 안 맞았어요. 저는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아니래요. 풍속을 모르고, 나이도 어렸기에 많이 싸웠던 것 같아요."

그 때를 회상하며 금화는 이렇게 말했다.

1992년 결혼 전부터 금화는 신랑과 같이 서울 마포에 사무실을 정하고, 중국청년여행사 서울사무소를 차렸다. 금화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금화 돈으로 투자해서 시작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로 자금이 딸리고 불편해 그만두었다. 혼인신고를 한 후 먼저는 금화가, 나중에는 신랑이 직장에 취직했다. 돈을 더 많이 벌려고, 빨리 잘 살려고 금화는 저녁이면 대중국선전방송에도 나갔다. 한 시간 프로면 한 시간에 진행이 되는 줄로 알았는데 시작하고 보니 한 시간 프로를 서너 시간씩 만들었다. 새벽 두, 세시에 돌아오면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그 때까지 남편은 TV를 보며 저녁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은 부부가 다 직장을 가지고 있어 가무(집안일)를 공동으로 부담하는데 한국남편은 가무를 전부 금화의 몫으로 했다. 설거지를 할 때 소리가 난다고 신랑이 화를 냈다. 네가 여자니 당연히 네가 해야지, 하는 식이어서 금화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결혼 후 금화는 상황에 의해 여행사를 그만 두고 직장을 다니고 신랑은 집에 있었다. 일단 생활은 유지되는데 신랑이 중국 북경에 가 공부를 하겠다고 나왔다. 중국과 수교되고 개방이 되니 중국어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화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에 의해 생활을 유지하면서 어찌 공부를 할 생각을 하냐,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남편은 남편대로 한국여자라면 친정에 가서 돈을 가져와서라도 남편은 공부시킬 거라고 하며 불만스러워했다.

1993년도에 금화는 임신했다. 태아가 3-4개월쯤 되었는데, 그 해 가을 추석쯤 KBS에서는 중국조선족여자가 금반지부터 전기솥까지 다 가지고 도망갔다고, '중국여자 위장결혼'이라고 신랑이 신고하는 생방송을 냈다. 이 때 시댁에서 전화가 왔다. 금화는 남편이 전화를 받고 하는 말을 듣고 시댁에서 어떤 말을 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우리는 잘 살고 있는데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잡쳐있는데 서울에 있는 조선족친구 대여섯 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 종로가에서 중국어강사를 했던 친구를 망라해 다 대학교육을 받은 여자들이다. 한국에 시집을 와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갈등을 이기며 살아가고 있는데 KBS에서 이런 생방송을 내자 집안에 불화가 생겼다. 친구들은 화가 나 한국에 시집온 여자들을 조직해 KBS에 항의하자고 했다. 그 후 KBS에서는 또 신랑이 신고했다는 그 '도망간' 중국조선족 여자로부터 '금품'이나 '전기 솥'따위를 가지고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고, 서로 갈등을 이기지 못해 집을 나갔다고 해석하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신랑신고'의 방송이 사회전반에는 이미 '중국여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계기로 되었기에 그 중국조선족 여자의 해석은 무력하기만 했다. 이것이 그들의 가정에 주는 영향이 컸고 일상적인 생활에 감정적인 색채를 많이 조성했다.

해산을 앞두고 시부모님 생일이 닥쳤다. 금화가 결혼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생일이었다. 경상도 상주라는 시골에 가야 했는데, 강남터미널에만 가자고 해도 40분 정도 걸리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중간 역에서 또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몸이 부풀대로 부풀은 상태에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못 가겠다고 하자 남편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생일은 한해에 한 번밖에 없는데, 자식으로서 부모효도를 이렇게 하는 거냐, 여러 가지로 불만했다. 너 안가면 나도 안 간다는 식으로 나왔는데 그 뜻인즉 꼭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물은 다 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뱃속아기가 걱정돼 갈 수 없었다. 남편뿐 아니라 시댁도 이 일을 눈감아주지 못했다. 금화는 금화대로 중국이라면 남편이든 시댁이든 태어날 아이와 임신부를 더 걱정해줄 거란 생각에 서러웠다.

"전 당신만 믿고 부모를 중국에 두고 여기 와 사는데, 왜 저를 생각해주지 않아요? 왜 그 때 중국 돌아가려는 저를 잡았어요? 일년 동안 비행기표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왜 저를 잡았어요?"
라고 금화는 눈물을 흘렸다.

그 풍파가 지나고 나서 금화는 두 번째로 여행사 사무실을 차렸다. 광화문과 시청 사이 고려병원 옆이었는데 그 때 금화는 이미 해산준비로 입원을 한 상태였다. 여행사업이란 계절성이 강한 만큼 병원에 입원해서라도 사무실의 일들을 남편과 같이 의논해 진척시키려고 생각했다. 환자복을 입은 채 사무실 정리를 말끔히 끝내고 병원에 다시 들어갔다. 금화는 남편이 열심히 사무실을 운영하기를 바랐는데 남편은 하지 않았다. 해산 후 하는 수 없이 사무실을 그만두어 두 번째도 실패했다. 그 후 남편은 취직했다.

병원에서 제왕절개수술을 해 아기를 낳았는데 시댁에서는 누구도 오지 않았다.

"시댁에서는 제가 못사는 나라 중국에서 왔다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한국여자를 며느리로 들여왔더라면, 아마 좀은 더 따뜻하게 대해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아무리 본가 편 친척이 있다 해도 저에게는 타향이잖아요. 그 때는 정말 많이 기대고 싶었어요."

금화는 아들을 낳았다. 병실내의 다른 집들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좋아서 난리지만 금화는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열등감이 쳐들자 한국여자면 이 정도로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한국사회가 이렇구나, 중국에서 왔다고 이런 대우를 받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서럽기만 했다. 같은 병실의 곁 사람들을 보기가 창피했다. 남편도 부모와 형제들에 대해 불만이었지만, 6남매에서 막내다 보니 형들과 감히 말하지 못한다. 남편은 위로 형님 둘, 누님 셋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무리 막내라 해도 형들과 따질 것은 따지고 할 말은 하는데 한국은 형을 아버지처럼 어렵게 대하고, 막내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더라고 금화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금화는 시댁의 누가 생일이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잘 챙기는 편이었지만 이 때부터는 마음이 많이 식어버렸다고 했다.

서울에 있는 친정 집 사촌오빠와 언니가 아기를 데리고 들어섰을 때에는 고맙기도 하고 막 눈물이 나와 마구 울어버렸다. 오빠가 그녀 남편을 복도에 불러내어 시집에서 누가 왔다갔냐, 라고 마구 따졌다. 신랑은 오빠의 훈계를 듣고 바로 집에 전화를 하여 최소한 와 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했다. 그 일이 있은 뒤 둘째 누나, 시아버지, 시어머니, 둘째 매형이 왔다갔다. 시누이가 5만원을 가져왔다. 금화가 퇴원한 다음에는 누구도 한 번 와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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