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볼링게임 - 남자를 업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볼링게임 - 남자를 업다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18> 인간 대 인간을 위한 노력가(1)

전 회로 한국에서 돈벌이하는 조선족들의 군상을 그린 1부 '바다에도 고기들이 모이는 곳이 따로 있다 - 돈을 벌러 간 사람들'이 끝나고 이번 회부터는 2부 '물은 내리 흐르고 사람은 올리 흐른다 - 한국 국제결혼의 삶의 현장에서'가 시작됩니다. 편집자

***취재수첩 2**

노래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가사가 있다. 지금은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이지 않을까 싶다. 물은 내리 흐르고 사람은 올리 흐른다. 배는 좋은 항구에 정박하기 마련이다. 좋은 항구는 어디냐? 여자들이 흘러가는 곳이리라.

제일 먼저 여자가 없어지는 곳이 시골이고, 제일 먼저 여자가 없어지는 나라가 못사는 나라이다. 어느 나라든지 도시에는 노처녀들이 버글거리고, 시골에는 노총각들이 버글거린다. 중국조선족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가고 있다. 한국여자들이 일본으로, 미국으로 시집가고, 일본여자들이 미국으로 시집간 역사가 있다. 조선족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감에 따라 한국의 노총각위기가 중국조선족사회의 노총각위기로 변했다. 천국으로 알려지고 있는 미국여자들은 어디로 시집갈까? 만일 화성에 미국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다면 아마 미국여자들이 그곳으로 제일 먼저 시집갈 것이다.

남자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여자는 꿈을 안고 찾아간다. 여자는 꿈의 천사이다.

인간이 이상적인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어찌 탓하며 또한 어찌 막으랴. 20세기 초반에 한국여자들이 사진 한 장을 보고 미국으로, 미국으로 떠났고, 20세기 말에는 중국조선족들이 사진 한 장을 보고 한국으로, 한국으로 떠났다. 지금은 탈북자 여자들이 두만강을 건너 비밀리에 중국으로 시집오고 있다. 그 속에는 진짜도 가짜도 있고, 진짜가 가짜로, 가짜가 진짜로 된 경우도 병존해 있다. 인간의 천성이 하는 일이다.

이 결혼대오는 기본 생존의 아픔 외에도 상호 이질문화갈등의 가장 자질구레하고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아픔을 앓고 있다. 위장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근원적으로 사랑을 찾아 떠난다.....

이 시대의 아픔, 여자들이여.....

***인간 대 인간을 위한 노력가**

앞에서 낯설은 여자의 전화가 나의 한국 행 명분을 세워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부터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김금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이다. 조선족들에게는 흔하기까지 한 이름이다. 그랬지만 이 평범한 여자가 한국에서는 홀로 자신과의 전쟁을 해왔다. 결혼의 실패도 실은 자신과의 전쟁이었다.

그녀와는 첫 번째는 연길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고, 두 번째는 연길동방관 불고기 집에서 만나 다방에까지 이야기가 이어졌었다. 세 번째는 서울에서 만났다. 글을 쓰는 나에게는 참으로 원만한 결말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어 기뻤다.

***볼링게임 - 남자를 업다**

금화는 북경민족대학을 졸업하고 여행사에 근무했다. 1989년부터 가이드를 했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쭉 다 여행업에 종사했다. 1992년도에는 서울여행사 직원으로도 있었다.

1990년 8월경에 한국인 총각 A와 만났다. 남자는 한국의 모 여행사 일원으로 북경에 왔었는데, 당시 금화는 북경청년여행사에 근무했다. 첫 만남에 인상이 좋았다고 남자가 한국으로부터 인편에 녹음테이프며 대중가요 집을 보내왔다. 가끔은 전화도 왔다.

"당시는 수교전이어서 중국의 조선족여자가 신비했을지도 모르죠. 처음 저를 보았을 때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1991년도의 어느 날, 총각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금화는 한글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졌다. 한족학교에 다녔기에 중국어밖에는 몰랐고 여행사에 취직하면서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여행코스에 필요한 자금성, 만리장성, 이화원, 병마용 등 간단한 단어들을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나마 엄마에게서 'ㅏ, ㅑ, ㅓ, ㅕ'부터 배운 것이었다.

금화는 떠듬거리며 총각의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사전을 찾아 단어의 뜻을 알아보았다. 편지에는 ".....어느 일요일날 공원으로 가면서 내내 금화생각만 했어요....."라는 구절이 적혀있었다.

"마음이 조금 설레이기는 했지만 실감은 없었어요."
라고 그 때의 심정을 말했다.

피차 결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았고 타산도 없었다. 금화는 자기가 서울로 가지만 않았어도 그들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1992년 5월, 서울에 있는 삼촌 집에 남동생과 함께 친지방문을 갔다. 당시 남자는 타이에 출장중이였다. 금화는 한 달 만에 돌아오려고 생각하고 비행기표까지 왕복으로 끊어놓았다. 남자가 소속해있는 회사직원들과 만나 식사를 했는데, 그 직원들이 금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남자에게 전화로 알려준 모양이었다. 남자는 전화를 해와 일단 가지 말고 자기를 기다려 달라고 했다.

서울에서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 후 일 년 동안 금화는 그 비행기표를 간직하고 있었다. 남자와의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비행기를 타고 바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 북경의 여행업은 쭉 호황기여서 금화는 돈을 왕창 벌고 있었다.

금화는 워낙 볼링을 잘 칠 줄 몰랐다. 그런데 이 남자와 같이 볼링을 치면 웬일인지 꼭 이기곤 했다. 이긴 사람이 진 사람 업기를 하다보니 금화가 늘 남자를 업는 꼴이 되었다. 어느 날 남자는 금화더러 중국으로 가지 말라고 하면서 결혼을 제의해왔다. 그리고는 곧 타이에 돌아가서 정리하고 돌아왔다.

***예단의 그림자**

금화의 집은 연길에 있는데 아버지는 연길 모 호텔의 오랜 간부였고, 어머니는 대외무역국 경리였다. 경제력이 있고 자부심이 강한 가정이었다. 당시 대외 무역국이라고 하면 가장 경제력이 좋은 직장으로 알려졌다. 집에는 저금액도 꽤 있었다. 금화부모는 딸을 국경선을 사이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어 한국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남자는 경상도 지방대학 영어학과를 나왔고, 결혼 당시 26세였다. 군에 갔다 오는 등 시간을 빼면 사업시간이 1-2년밖에 안 되었으므로, 경제적으로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남자는 워낙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군에 나가면서 헤어졌다고 했다. 남자는 시골에 부모가 있고 가정상황이 안 좋다보니 자기 조건대로 여자를 만나기 힘들었다. 결혼은 엄두도 못 냈는데 금화를 서울에서 만나자 비로소 결혼을 현실화해 생각했던 모양이라고 했다. 금화는 한국사회에서 이 남자와 같은 경제조건은 중국조선족여자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인간 대 인간의 결혼을 생각할 수 있었다고 했다.

"집안이 복잡했으므로 어서 집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을 거예요."
금화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금화는 순진했으므로 남자 하나만 보고 사랑에 빠졌다. 둘의 사랑은 순수했고 이미 같이 여행사를 차리고 있었으므로 사업의 꿈도 컸다. 1995년 12월에 그들은 결혼신고를 했다.

결혼할 때 남자의 가정에서는 금화에게 액세사리를 24K, 18K로 세트를 챙겨줬다. 시가 편에 친척들이 많고, 친정 쪽에는 적었으므로 시가 편과 친정 편에 다 예단을 놓지 않기로 합의했다. 친정부모에게는 금화가 자기 돈으로 양복 한 벌씩을 사서 예단 삼아 드렸다. 시가 편에서 결혼비용으로 2천만 원을 내놓았다. 결혼식 음식비용은 금화도 한몫을 맡아 반반으로 나누어 부담했다. 결혼 부조돈에서 신혼여행비용을 챙기기로 했는데 시가 편에서 주지 않아 금화가 미국여행비용을 부담했다. 금화가 근무한 적이 있는 여행사에서 싸게 해 한화 2백만원을 내고 다녀왔다.

"저는 후진국인 중국에서 왔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그분과는 평등한 관계에서 우리들의 결혼생활을 시작해보려고 애를 썼어요. 남자 쪽에서 하는 것은 나도 하고, 남자 쪽에서 못하는 것은 나에게도 하지 않는 걸로 하자고 주장했어요. 예를 들면 예단 같은 것이죠. 시가 편과 친정 편에 똑같이 예단을 드리지 않기로 합의한 것도 그 원인이었지요. 명색이 중국보다는 잘 산다는 한국 결혼이니만큼 부모에게 아무것도 안하면, 신랑체면이 말이 안될 것 같아서 저의 돈으로 제 부모에게 양복을 마련해드렸는데, 남편은 제가 자기 부모에게 해드리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고 했어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주변에서는 금화의 결혼을 정상적인 결혼이라고 보았다. 한국남자와 조선족여자 결혼은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우선은 한국 남자 측에서 모든 비용을 지불했는데, 금화네는 똑 같이 지불했다. 오히려 금화쪽에서 더 했다. 한국이 잘 산 다는 조건 때문에 한국인과의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령차이가 심했는데 금화네는 아니었다. 한국 노총각들은 아내를 얻기 위해, 조선족여자들은 신세를 고치기 위해 결혼하다보니 선보기 결혼이 상례인데 그들은 정상적인 자유연애를 해서 결혼했다.

금화는 그 때 여행사를 했다. 단체 팀을 이끌고 중국에 갈 때면, 복장 1백만원, 2백만원어치를 사서 집으로 가지고 가거나, 북경에 도착해 엄마에게 부쳐 보내곤 했다. 엄마가 그것을 팔아 웃돈을 부쳐 줘 새살림의 가구를 사고, 셋집 값을 지불했다. 금화의 엄마는 시장에 민감했다. 돈이 잘 벌려질 품목을 잘 짜서 보내주면, 금화가 그 물건을 사서 보내곤 했다. 중국에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살고 있는 엄마는 금화가 서울에서 셋집에 사는 것을 보고 많이 울었다. 후에는 전세비 천만 원을 선대해 전셋집에서 살도록 했다.

남편은 처가 편에서 그렇게 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치고, 결혼생활동안 쭉 자기 부모에게 예단을 놓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한국여자 같으면 시부모에게 예단을 올렸을 텐데."

"그것 그 때 안 하기로 합의했잖아요."

시부모도 그것을 안 좋게 생각했다. 막내 시누이는 결혼식전날에 금화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 때 금화의 부모도 와있었다.

"양말 한 짝 왜 안 해?"

"우리 부모에게는 해줬어요? 이상 시누이시기에 저 큰소리 안 할래요."

"건방지다, 누구에게 큰소리쳐?"

"전 내일 결혼식을 할 신부예요, 저의 부모가 계시는데서 뭘 하시는 거예요? 시어머니랑 같이 결정한 일인데 왜 이러세요?"

"그건 몰랐어."

이튿날이 결혼식 날인데 금화는 기분이 잡쳐 결혼을 안 하겠다고 했다. 신랑이 누님에게 전화해 예단문제를 꺼내지 말라고 했다.

그 때 금화 엄마는 결혼식 십여 일 전에 서울에 와 있었었다. 이렇게 말썽이 많을 줄을 알았더라면 쌍방 부모에게 예단을 놓을 것으로 의논해서 시부모에게도 올리고, 내 부모도 받았을 걸, 하고 금화는 많이 후회했다. 그러나 그 때 예단을 놓기로 했더라면 시집측 예단 값만도 500만원-1000만원은 나갔어야 한다. 그런데 금화는 자기 부모가 감당해야 할 이 엄청난 예단비용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 남자와의 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예단을 취소할 것을 주장했었다. 이것은 시댁 시부모, 시 형제들이 다 모인 장소에서 합의한 것이었다.

이튿날 신부화장을 다 끝냈는데 막내시누이가 와서

"어머, 이쁘네요!"
라고 했다.

금화는 화가 가셔지지 않은 상태라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결혼식이 끝나 신혼여행을 가려고 공항으로 떠날 때 막내시누이가 또 말했다.

"잘 갔다와라."

그 때에야 금화도 곱게 대답했다.

"예, 다녀올게요, 수고하셨어요."

그랬지만 그 후부터 막내시누이와는 잘 안 지내는 사이로 되었다.

신혼여행에는 여섯 쌍의 신혼부부가 한 팀이 되었다. 금화는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 같이 어울리기 싫어했다.

"식사할 때 말도 안 했으므로 신랑 섭섭했을 거예요. 지금은 한국말에 열등감을 크게 느끼지 않지만, 그 때는 입을 열기가 두려웠어요. 신랑은 내가 놀러 나가지 않아 기분이 안 좋았을 거예요. 외부사람들은 우리가 돈 쓰기 겁나 나가지 않는 줄로 오해하는 눈치였어요."

예단문제는 쭉 그들의 결혼생활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