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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낮은 여자와 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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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낮은 여자와 그의 아들

코리안드림 -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 <17>

봉천교회에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봉천역 지하철에서 나는 길을 물어오는 50대의 여자를 만났다. 목소리가 낮았고 얼굴에는 조심스러운 빛이 어려있었다. 억양에서 금방 조선족인 것을 알아보았다.

"중국에서 오셨지요?"
라고 물었더니 기색이 확 피어나며 연변 말을 했다.

"군포역을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오?"

나는 지하철선로도를 보이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내가 한국 체류 조선족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들이 지방의 모 회사에서 일하다가 상했는데 산재보험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들 때문에 속상하다고 한숨을 지었다. 봉천에서 나의 세집이 있었던 구의동까지는 지하철로 한 시간이 걸렸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는 무시로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한국사람들이 내가 조선족인 것을 알아 볼까봐 겁나오."

라고 해서야 나는 그녀의 두려움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줄은 모르고 나는 그녀와 줄곧 연변 말을 했었다. 한국 땅에 와서 이렇게 목소리를 낮추고 벌벌 떨며 다니는 불법체류자를 그 목소리에서 실감하고 가슴이 아파왔다. 불법체류를 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때로부터 반달이 지나서 그녀가 알려준 전화번호에 연락했더니 아들 서강춘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만나자는 제의에 시원스레 대답하고 날짜와 시간을 정했다. 7월 21일 오전, 나는 군포역 출입구의 높다란 공중다리에서 핸드폰으로 서강춘에게 연락을 했다.

"몇 호 입구에서 만날까요?"

"바로 내려오세요."

연락을 하다가 내려다보니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다.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불과 10미터 거리에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이런 장면이 우스워 우리는 웃으며 거리를 좁혀갔다. 하얀 츄리닝 차림을 한 30대 초반의 남자, 장발의 머리와 가냘픈 몸매가 함께 흐느적거렸다. 눈썹이 짙고 눈이 까맣고 얼굴색은 창백했다. 첫눈에 시달림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체중이 워낙은 60여 키로였는데요, 지금은 50 키로 쯤 밖에는 안돼요."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새 말씨는 서울말이 되어있었다.

서강춘은 브로커를 통해 화룡시에 서울 슈퍼 지점을 설립한다는 명의로 브로커에게 수속비 7만원(한화 960만 정도)을 꾸어서 주고 '공무'수속을 하여 1997년 12월 2일에 한국에 나왔다.

서씨는 세 형제중의 맏이였고,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은 금년 3월에 한국에 시집을 왔다. 어머니가 아들 서강춘이 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되어 한국에 나오다보니 집에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남아있다.

서씨는 안산전자부품회사에서 70만원을 받고 3개월 일하다가 IMF가 터져 실업을 당했다. 정부의 외국인노동자채용불가정책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불법체류자는 물론 일률로 취업을 못하도록 통제했다. 3개월 간 빈둥빈둥 놀기만 했는데 다행히 이미 나와 있었던 사촌누님의 도움이 있고 3개월의 노임이 남아있었기에 굶지는 않았다.

1998년 7월에는 파주화순양계단지에 취직했다. 월급은 60만원, 3개월에 한 번씩 10만원씩 추가해줬다. 1999년 2월 16일 음력설을 쇠고 이틀 후인 18일에 상했으니 운수는 꽤 사나운 편이었다. 석 달 놀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3개월에 한번씩 추가되는 10만원에 의해 조금씩 삭여지고 이 때는 월급도 90만원에 이르러 조금씩 어깨에 기운이 오를 때인데 그만 크게 다친 것이다.

설 분위기에서 채 깨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날도 다른 날과 똑 같이 기계로 닭 모이를 주었다. 기계단추의 '전진'을 눌러야 했는데, 무슨 궁리를 했는지 그만 '후진'을 눌렀다. 순식간에 한쪽 발이 앞으로 끌려들며 무서운 아픔과 함께 쓰러졌다. 발등의 살이 뭉청 떨어지며 선지피가 기계를 적셨다. 신 끈이 치륜에 감기며 발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그 자리로 병원에 실려갔다. 사진을 찍어보니 세 번째 발가락뼈가 부서졌는데 병원에서는 신경이식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겨드랑이 밑의 신경을 떼서 발목에 이식하면 지방이 두꺼워 신발을 신을 수 없고 머리신경을 발목에 붙이면 일단 신발을 신을 수 있으니 그더러 선택하라고 했다. 신발을 신지 못하면 걸어 다닐 수 없고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머리 쪽 신경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잘못 되는 일은 없겠냐, 물었더니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안전한쪽은 그래도 겨드랑이쪽이다, 라고 대답했다. 서씨가 아니라 누구든지 울며 겨자 먹기로 위험성이 더 있는 머리 쪽 신경을 희생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달 반 입원해 수술을 세 번 했는데, 치료비가 9백60만원이라고 했다. 서강춘은 외국인이기에 보험에 들지 못했다. 사장은 보험가입자였으므로 자신의 이름으로 치료비를 지불해, 치료비가 2백여만원이 들었다. 수술 후 파주에서 통근하며 고정된 발목을 굽히는 물리치료를 했는데, 그 비용 1백40만원은 전부 사촌누이의 돈과 서씨의 돈으로 지불했다. 그렇게 치료했지만 발목부분은 전체가 검붉은 색을 띠었다. 발등은 꼬집어도 감각이 없으며 완전히 자유롭게 굽히지 못했다. 오래 서있으면 발이 붓고 아팠고 겨울에는 말할 수 없는 느낌이 생긴다고 했다. 내가 어떤 느낌이냐고 캐어물었더니, 그는 저린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말할 수 없는 느낌인데, 몹시 괴롭다고 했다.

입원한 동안 누구 하나 와보는 사람이 없어 외롭고 눈물이 났다. 하지만 어머니가 속을 태울까봐 집에는 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걸을 수가 없다보니 두 달을 집에 전화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로 엄마가 전화 왔지만, 친구들 쪽에도 미리 부탁을 해놓았기에 집에서는 그가 상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엄마는 친구들에게서 아들이 잘 있다는 말만 듣고 아들의 육성은 듣지 못하게 되자 온갖 추측을 하며 속을 태웠다. 그전에는 월급을 타기만 하면 집에 돈을 부쳐 보냈었는데, 돈도 부쳐오지 않고 소식도 없게 되자 아내는 그를 나쁜 쪽으로 의심했다. 한국에서는 조선족여자들이 조선족남자들과 동거해 사는 일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남편도 남의 여자와 사는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아내는 매일 속을 태우다가 아예 이혼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사촌누나는 상황을 다는 설명하지 못하고, 서씨가 조금 상했다는 정도로 말했고, 그래도 믿지 않자 출가한 동생이 나서서 오빠의 청백함을 증명했다. 아내는 그래도 믿지 않았다. 아무리 상했다고 한들 입이야 상했겠냐, 어찌 전화 한 통 없을 수 있냐, 라고 했다. 나중에 한국에 나와서 직접 확인을 하고서야 울면서 남편을 의심했던 자신을 뉘우쳤다고 한다. 두 달이 지나자 서씨는 집에 상황을 알렸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속이 타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엄마는 한국에 출가한 딸의 초청을 받고 한국으로 나왔다.

"왜 산재보험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라고 물었다.

"상했을 때에는 사장님이 수술치료를 해준 것만도 고마웠어요. 식사비, 간호비, 수속비, 치료비를 그분이 다 지불했거든요. 그 때는 고마운 생각만 했고, 나중에는 산재보험이 문제가 아니라 월급이 문제였어요. 그 회사에서 99년 11월부터 20여명 종업원의 월급을 체불했어요. 조선족은 저 혼자이고, 나머지는 한국인들이거든요. 노동자들은 노동청에도 갔대요. 회사에서는 다음 달에는 꼭 준다하고 노동청에서는 기다리라고 하고, 그런 상황이 됐어요. 회사가 어렵게 됐나봐요."

그는 자기에게 잘해줬던 사장에 대해 말하며 부도의 변두리에 이른 사장의 처지를 걱정했다. 한편 산재보험문제를 제기하게 되면 사장이 곤란해질 것을 생각해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시간이 지난 거는 아니세요?"

"저와 비슷한 상황의 친구가 있는데요, 제가 산재보험을 받을 수 있다고 해요. 저와 같은 서씨인데요, 용정사람이에요. 서울 중앙동에 있는 통조림 회사에서 일했는데, 병마개 기계에 손등이 구멍나서 이식수술을 했어요. 사장이름으로 치료했는데, 나중에 산재보험 770만원을 받았답니다. 지금 손으로 물건을 쥐지 못하고, 손가락을 90°정도밖에는 굽히지 못하거든요. 허군이 2년 후에 산재보험을 제기해 받았으니 저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빨리 해보시죠?"

"서울에 중국동포산재보험협회가 있다고 해서 가본 적이 있어요. 저의 삼촌과 같이 일한 분이 있는데요, 성은 전씨인데 45세정도 됐거든요. 아파트 시공중 벽 바깥 면에 스츠로프(해면인데, 보온, 격음 장치)를 붙이는 일을 하다가 2층에서 떨어져 머리가 나무판에 맞히면서 심하게 다쳐 수술을 했는데, 그 통에 반신이 마비가 와서 중국 들어갔어요. 그 동포협회에서 산재보험을 해줘서 보험료 2천만원을 받았거든요. 그 말을 듣고 저도 가보았어요. 정말 그런 협회가 있었어요. 사무실이 두 칸, 사장실과 사무실인데, 사무실에 산재보험을 받은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있어 믿음이 갔어요. 그리고 한국 가수, 그......그....차차차 가수가 누구더라?"

"설운도요?"

"맞아요, 설운도, 그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있었어요. 전부 흑룡강사람들인데 아줌마 한 분, 남자 둘이 있었어요. 저더러 백만 원을 디야(低壓, 보증금임)하고, 달마다 5만원씩 더 내며, 찾은 금액의 몇%를 납부하라고 했어요. 돈이 없는 상황이여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어요."

"그 협회를 취재했으면 좋겠는데요, 주소는 어디지요? 그리고 산재보험 액의 몇%를 납부한다고 하셨지요?"

"산재보험 액의 몇%든지 딱히 기억이 안 나구요, 주소는......."

서씨는 한동안 머리를 갸웃거렸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서울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20분을 찾아도 찾지 못한다. 나중에 계면쩍은 기색으로 말했다.

"수술을 하고 나서부터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졌어요. 자그마한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많아요."

"시집왔다는 동생은 잘 살고있어요?"

"여동생은 사촌누님이 소개해서 결혼했어요. 남자는 회사 택시기사인데 한달 수입이 120만원정도예요. 마음이 착하지만 술을 마시면 말이 많은 편이지요. 동생은 처음에는 몰랐는데 살다보니 좀 모자라는 편인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중국에서 한 번 선을 보고, 같이 며칠 관광하고는 곧 결혼수속을 했으니 서로 잘 알고 결혼한 거는 아니지요."

"동생은 갖출 건 다 갖추고 살아요. 동생은 연길 병마개 회사에 다녔었어요. 성격이 깐깐하고, 깔끔한데, 남자가 주말이면 술 마시고 여자들에게 돈을 쓰는 것 때문에 남자를 싫어해요. 우리는 처가집 식구들이 이렇게 많이 나왔는데,(서씨와 서씨 아내, 어머니, 사촌누이 등) 어지간하면 살라고 했어요. 노력해보겠다고는 하는데.....6개월이 됐는데, 아직 태기는 없더라구요. 남자의 다른 형제들은 다 자기 회사도 있고 잘 산답니다. 저의 동생이 나갈까봐 걱정하는 눈치더라구요. 그래서 동생이 큰소리를 치며 사는 것 같아요.

동생은 리모콘 등 전자부품을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는데 월 60만원을 받아요. 저의 아내도 그 회사에서 일하는데 68만원 또는 70만원을 받아요.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고 특근이 있을 경우에는 10시까지 일하고, 수당금을 주거든요. 이 회사는 내국인이나 외국인이나 다 똑 같은 대우를 해줘요. 중소기업인데 한국인들은 그런 회사가 비전이 없다고 싫어해서 내국인과 외국인이 반반이 돼요. 방글라데시 등 나라 사람들이 많지요. 월급은 적지만 월급이 많아도 퇴근시간이 늦은 여자들보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어 좋아요. 엄마는 신립에 있는 모텔에 취직해 월 85만원을 받고있어요."

목소리가 낮은 그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강춘씨는 지금 뭘 하고 있어요?"

나는 걸음걸이가 어색하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군포 갈비집에서 써빙을 합니다. 주차시키고 주문 받고, 손님을 접대하고, 상을 치워주지요. 월 100만원을 받아요. 신문 구직란에서 보고 찾은 집이거든요. 한 달에 두 번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선택해 휴식할 수 있어요. 오전 10시부터 밤 10시 반까지인데, 집에 오고 나면 11시정도 되죠."

"서울말을 잘 하시네요?"

"서울말을 잘 배워야 해요. 연변사람들은 일은 잘하는데, 말투가 함경북도 말이어서 차별을 당하곤 하거든요. 지금 저와 같이 홀을 하는 연변아줌마는 도문 사람인데, 33세예요. 일은 잘해요, 항상 남보다 더 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그런데 써비스 예의를 잘 갖추지 못해 무시당하는 때가 많아요. 사장도 많이 까주거든요. 연변사투리를 써서 손님들이 뭔 말 하는가 라고 멍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많이 시정해주죠. 아줌마는 주문을 받을 때 팔짱을 끼고 주문 받는 경우도 있어 보기 거북스러웠어요."

그는 한국에 나오기 전에 택시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돈이 벌어지지 않자 다시 신풍 쪽에 중국 요리 집을 차렸다. 1년 동안에 2천 원 정도 밑지고 나서 청산해버렸다. 이제 돈을 벌어 중국에 들어가면 한국 요리집을 차릴 생각이라고 했다. 지금 좀 요령이 있으나 더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 후 나는 대림동 서울조선족교회 인권담당 윤완선 목사님을 취재하던 중 서강춘과 같은 경우의 산재보험에 대해 문의했다. 윤목사님은 산재보험신청을 하면 가능하다고 했다. 파주화순양계단지의 사장의 이름으로 치료를 했지만 병원의 컴퓨터 당안을 찾아보면 해당 자료들을 찾을 수 있기에 법적 근거로 충분하다고 했다. 나는 전화로 서강춘씨에게 이 사정을 알렸다.

그의 산재보험이 언제나 해결될 것이며 보험액을 얼마나 받게 될지, 그것으로 서강춘씨가 받은 정신적인 상처와 신체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을지가 걱정스럽다. 인생의 좌절과 아픔은 언제나 그 개인의 몫으로 남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 아픈 다리를 끌며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무시무시했던 순간까지도 돈벌이하는 사람의 피할 수 없는 몫으로 간주했는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연길에서 서강춘씨가 꾸린 한국 요리 집을 찾을 수 있다면 그 감회가 사뭇 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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