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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놀 산업, 중국 출판업**
흔히들 출판업은 사양산업(斜陽産業), 즉 해질녘 놀처럼 쇠퇴해가는 산업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놀에는 아침놀과 저녁놀이 있다. 사람들은 놀이라고 하면 으레 설움과 한, 마지막이라는 이미지부터 연상하지만, 밝음과 희망으로 언제나 가슴이 벅차오르는 아침놀도 분명히 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양산업이란 없다. 다만 사양기업만이 존재할 뿐이다. 쇠락의 저녁놀이라도 훌륭한 경영전략과 기법만 유효 적절히 구사한다면, 얼마든지 웅비하는 아침놀처럼 첨단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 중국에서 아침놀을 휘감고 태양처럼 떠오르는 유망산업은 무엇이 있을까?
2002년 중국의 경제 경영 부문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 ‘중국에서 제일 돈을 잘 벌수 있는 12대 업종(中國最貝兼錢的12大行業(謝文輝 2002 5. 中國商業出版社))’을 살펴보자.
그 책은 대박을 터뜨릴 만한 유망업종으로 1.출판업 2.멀티미디어 3.교육 4.환경보호 5.농업 6.도소매업 7.음식업 8.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 9.레저 스포츠 산업 10.의약 11.자동차관련산업 12.정보통신산업 순으로 꼽았다. 놀랍게도 사양산업으로 꼽히는 출판업을 첫손가락에 꼽았다는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한, 아침 바닷물을 벌겋게 달구는 햇살이 퍼져 오르고 바다를 가르며 날아오르는 갈매기 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지적활동이 계속되는 한 출판업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01년 중국 출판업의 시장규모는 한해 60억 달러(한화 약 7조 2천억원)에 이르고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2008년이면 연간 120억 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참고로 한국의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조사한 2001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 출판시장 규모는 약 2조 4천억 원으로 약 20억 달러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출판업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1978년 중국 전체의 출판사 수는 겨우 105개에 불과했다. 그들이 매년 출간하는 책은 1만 5천여 종, 37.7억 권이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1998년 전국의 출판사는 565개사로 도서종수는 13만 여종, 총 72.7억 권으로 급속히 늘었다. 매년 25퍼센트 이상의 놀라운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중국의 출판업의 기대이윤율 순위는 전체 33개 업종 중에 제4위에 랭크되어 있다.
2002년 말 리우빈지에(柳斌杰) 중국 신문출판서 부서장도 출판물 직배점에 대한 외자기업 진출을 연내에 허가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그가 밝힌 중국 출판산업에 대한 개방일정은 이렇다. WTO 가입 1년 후 일부 도시에 직배점을 개방한 후 3년 후 소매분야에 대한 전면개방 및 도매업 일부개방, 5년 후 출판물 직배점에 대한 전면적인 제한을 폐지하는 것이다.
중국 내 출판업체내의 경쟁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다국적 출판자본 등 국내외 새로운 경쟁자들에게 무궁무진한 사업 찬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출판업은 여름철 입시철마다 대목을 맞는다. 전국의 고입수험생과 대입수험생의 수는 약 4천만 명. 학부모들은 한 자녀 갖기 정책에 따라 태어난 단 한 명의 자녀가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까봐 자녀 대신 직접 서점에 가서 입시 참고서를 구입하는데, 내용을 잘 몰라 무조건 무더기로 사들인다. 참고서나 문제집의 이름이 붙으면 내용이야 어떻든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여타의 개발도상국과 비슷하게 중국 도서 출판시장의 특징은 각급 학교의 교과서와 참고서 등 교재출판이 전체 출판업을 지탱해주다시피 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소설과 수필 등 문학류로 판매량 2위를, 과학기술 서적류가 3위, 정치경제 등 사회과학분야의 서적이 4위를 달리고 있다. 지식정보경제발전에 따라 중국의 교양서적과 전문서적시장의 잠재력은 가히 무진장하다 말할 만하다. 중국의 출판업은 뉴미디어 시대에 있어서도 그 성장속도를 예측할 수 없는 유망업종임에 틀림없다.
21세기 중국 출판계를 이끌 양대 출판사는 여전히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과 중화서국(中華書局)이다. 그 둘은 벌써 90여 년 전부터 줄곧 중국 출판계를 이끄는 양대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출판이 교육보다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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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상하이. 자본주의의 맹아가 맹렬히 싹트던 이 도시의 상가에서 제일 필요로 했던 인쇄물은 영수증과 손익계산서, 대차대조표, 현금출납부와 각종 부기책 등이었다. 근대 중국 최초의 출판사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은 이러한 시대적 환경과 요청으로 태어났다.
샤뤠이팡(夏瑞芳), 바오(鮑) 씨 두 형제와 가오펑츠(高鳳池) 등 네 명의 청년은 인쇄소를 하나 차리기로 뜻을 모았다. 원래 서문보관(西文報館)의 식자공이었던 그들은 3천7백5십위안을 공동출자하여 ‘상무인서관’을 창설하였다. 회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출판사'라기보다는 영수증과 부기책 등을 인쇄하는 인쇄소에 더 가까웠다.
상무인서관의 처음 기계설비는 발로 밟아서 돌리는 족동식(足動式)고물 인쇄기 3대가 전부였다. 상무인서관은 아주 영세한 수공업 인쇄소였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과 지향점만은 신선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기조로 한 것이었다. 봉건제국의 관방적 어둠이 짙게 깔린 시절이어서 상무인서관은 아침놀처럼 참신한 빛을 발했다. 샤뤠이팡은 과거제도가 조만간 폐지될 것이라고 앞서서 내다보았다. 1901년, 그는 신식학교의 새 교과서의 출판과 판매 독점권을 따내었다. 창업 8년째 되던 1905년, 상무인서관의 자산은 100만 위안으로 창사 때와 비교하면 무려 270배 가까이 불어난 거액이었다. 이런 급성장은 당시 중국 민족기업 중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으나 샤뤠이팡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인재를 얻는 자는 흥하고 인재를 잃는 자는 망한다.”
이 말은 정치 · 군사계와 마찬가지로 상경계에서도 똑같이 통용되는 말이다. 샤뤠이팡은 비록 낮은 학력의 인쇄공 출신이었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아주 뛰어났다. 그는 일가친척을 철저히 배제했고, 자신의 혈연 ․ 지연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장웬지(張元濟, 1867~1959)를 초빙하였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2인자로, 후계자로 키워냈다.
장웬지는 원래 학자가문 출신으로 젊어서 진사에 급제하고 관직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무술변법’에 가담한 죄로 파직된 후 어느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샤뤠이팡은 장웬지를 만나러 그의 집과 학교로 몇 번씩이나 찾아갔다. ‘삼고초려’ 못지않은 극진한 정성이었다.
“출판업은 무수한 백성을 문맹과 무지로부터 개명시킬 수 있습니다. 소수의 수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다수의 대중을 교육시키는 것이 더 뜻 깊은 일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출판이 교육보다 훨씬 넓습니다.”
샤뤠이팡의 이 말 한 마디는 황소고집의 장웬지의 마음을 흔들어 깨웠다. 장웬지는 1905년 상무인서관에 편집부장으로 입사하고, 이듬해 총경리(사장)로 취임했다. 상무인서관 초대 대표 샤뤠이팡은 살신성인의 자세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솔선수범했다. 그는 스스로 2선으로 물러앉아 1914년 괴한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발행부문만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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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계후, 계왕개래**
장웬지가 상무인서관의 신임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새롭게 내세운 경영철칙은 크게 보아 세 가지다.
첫째, 인재우선주의. 장웬지는 “출판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강조해왔다. 경영의 기본은 인재를 얻고 인재를 제대로 쓰는 것, 이 원칙을 출판사 발전의 최대 원동력으로 꼽았다. 육체노동자가 아닌 지식노동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출판사의 경영책임자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모으고 이끌어야 하고, 그 목적은 개개인의 강점과 지식을 생산적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머리는 점점 녹슬어가고 굳어간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시대의 조류를 이끌 새로운 인재를 초빙해 중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고의 책은 작가와 직원을 최고로 대우하면 나오게 마련이다”하며 출판업계 최고의 보수로 편집장을 초빙했으며 역량 있는 작가에게는 파격적인 고액의 인세로 우대했다.
둘째, 품질제일주의. 그는 “출판업에서 돈을 벌고 못 벌고는 찍어낸 책의 품질로 결정된다”라며 우선 좋은 책 만들기에만 전력을 집중했다. 대신 책광고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할인판매는 절대금지를 고수했다. 책의 품질을 우선시하는 상무인서관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와 상무인서관의 책광고는 여간 보기 어려운 게 아니다. 할인서점에서는 상무인서관에서 나온 책은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렵다. 상무인서관은 지금도 영업과 광고부문이 비교적 취약한 편이라는 세간의 비판을 받고 있다.
셋째, ‘청시엔치호우 지왕카이라이(承先啓後, 繼往開來)’, 즉 지난날의 사업을 계승하여 앞길을 개척하는 정신이다. 이 글은 장쩌민 국가주석이 1997년 상무인서관 창사 100주년을 기념하여 친필 휘호를 내린 것이기도 하다.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신문화를 전파하기에 전력을 기울인 장웬지는 신문화운동과 5 · 4운동에서 받은 혁신의 기운을 사업에 적용했다. 또한 상무인서관을 편집과 번역, 인쇄, 발행의 3개 부문으로 분리하여 각각 바오 형제, 가오펑츠, 장웬지가 각각 관할하였다.
장웬지는 교과서와 서방사상과 문화를 소개하는 저작을 주로 펴냈다. 특히 사전류와 교과서나 전집류의 출판에 정력을 쏟았다. 고적정리에 심혈을 기울여 ‘사고전서(四庫全書)’와 ‘이십사사(二十四史)’ 등 중국 국보급 고전의 영인본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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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인서관은 규모와 실적 면에서 중국 최대의 출판사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을 포함한 세계 어느 출판사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하였다. 1932년 일본군의 만행으로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 상하이 상무인서관은 대지면적만해도 1만6천 평이 넘고 직원수만 하더라도 4천5백여 명이 되는, 한마디로 초대형 출판사였다. 전국출판물중 52퍼센트와 각급 학교 교과서의 60퍼센트 이상이 상무인서관에서 출판되었다. 1932년 1월 28일, 상하이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은 ‘동방문화의 중심’이라는 별명이 자랑스러운 상무인서관을 폭파해버렸다. 그들은 그 폭파 장면을 그림엽서로 발행하여 승전장면이라고도 기념하기까지 했는데 참으로 가증스러운 문화파괴범의 만행이라 할 수 있다.
1954년 본사를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겨온 이후 상무인서관은 사회과학, 자연과학, 응용기술, 문학예술, 아동전집, 동화책, 고서를 복사하고 각종 잡지를 발간해왔다. 1993년에는 홍콩, 타이완, 말레이시아의 상무인서관과 함께 중국 유일한 합자출판사 '상무인서관 국제유한공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897년 창사 이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베스트셀러와 롱셀러를 출판해 온 상무인서관의 책들 중 특히 중문어휘어원대사전인 ‘사원(辭源)’과 ‘신화자전(新話字典)’은 마치 영어의 옥스퍼드 대사전처럼 전세계 중국인들로부터 중어중문학 최고의 명품으로 애호 받아 오고 있다. 1997년 창립 100주년을 맞은 상무인서관은 중국 최대의 출판사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출판사로서 중국 최초이자 중국 최대라는 두 타이틀을 한꺼번에 거머쥐고 있는 상무인서관의 영광은 출판업종은 물론 중국의 다른 업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다.
1911년, 상무인서관의 편집부장이던 루페이퀘이(陸費逵, 1886~1941: 루페이는 복성, 퀘이는 이름)가 장웬지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정들었던 회사를 떠나는 젊은 그의 가슴에는 교육구국(敎育救國: 교육으로 나라를 구한다)과 표신입이(標新立異: 새로운 것을 내세우고 남다른 것을 창조한다)의 깃발이 들려 있었다.
그는 곧 중화서국(中華書局)을 창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그러자 곧장 자기의 친정이라 할 수 있는 상무인서관에 도전장을 던졌다. ‘먹느냐 먹히느냐’ 상무와의 처절한 혈투를 전개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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