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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상하이방, 경제는 닝보방**
“전세계의 닝보방(寧波幇)을 동원하여 닝보를 건설하라.”
1984년 8월 1일, 덩샤오핑은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여름 휴양소인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아주 강한 어조로 지시했다.
명나라 이전에는 ‘상(商)’은 있었으나 ‘방(幇)’은 없었다. 명나라 중엽 이후 ‘상방(商幇)’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였다. 산시(山西)방과 후이저저우(徽州)방을 필두로 광둥의 차오저우(潮州)방, 싼시(陝西)방, 닝보방, 산둥방, 푸젠방, 장쑤의 둥팅(洞庭)방, 장시의 장유(江右)방, 저장 서부의 롱요우(龍遊)방 등 이른바 10대 상방이 중국의 돈줄을 움켜잡고 경제계를 주름잡아왔다.
그러나 격동과 고난의 세기였던 19세기 말엽과 20세기를 거치면서 어떤 것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또 어떤 것은 머나먼 이국 만리에서 이른바 화교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살아남았다. 모든 ‘상방’들은 21세기 오늘 이미 ‘역사’가 되었다. 단 하나, 닝보방만 빼놓고.
제국주의, 군벌, 중화민국의 자본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를 거치면서도 닝보방은 조금도 노쇠하지 않았다.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여전히 중국과 해외에서 불멸의 광채를 발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무역·금융의 제1도시인 상하이 상권의 10퍼센트는 광둥상인이, 20퍼센트는 기타 지역의 상인이, 나머지 70퍼센트 이상의 상권은 저장상인이 잡고 있다. 그 저장상인 중 과반수가 바로 닝보상인이다.
이렇게 닝보상인이 중국의 경제수도를 석권하고 있으니, 중국의 정치는 상하이방이 잡고 있듯 중국의 경제는 닝보방의 손아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불사조 닝보방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과제다. 중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절대적인 경제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닝보방을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닝보방의 발자욱은 상하이와 베이징의 상권뿐만 아니라 중국의 방방곡곡, 나아가 유럽과 미주와 남아프리카에까지 널리널리 찍히고 있다.
저장상인이 중국상인의 꽃이라면 닝보상인은 꽃중의 꽃이다. 닝보상인은 저장상인중에서도 특수하다. 중국의 웬만한 외항선의 선장은 대부분 닝보 출신이다. 뿌리가 깊고 튼튼하면 그만큼 가지와 잎이 무성한 법이다.
닝보는 일찍부터 국내외에 이름이 파다했다. 9세기 초 국제적 무역항이었던 닝보 항은 중국상인과 신라상인, 이슬람과 페르시아상인들의 흥정소리로 들끓었던 국제무역항이었다. 동북아 해상왕국을 이끌었던 장보고 선단의 무역활동의 심장부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닝보항은 고려시대 개성 부근의 벽란도와 함께 자웅을 다투던 세계적인 무역항이기도 했다. 우리의 개성상인도 이들 지독한 닝보상인과의 흥정에서 이기려고 애쓰다보니 한국 최고의 상인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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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도 극찬한 닝보상인**
닝보는 중국 해안선의 정중앙과 창장델타의 남부에 위치한 중국 제일의 양항(良港)이다. 상하이와 닝보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150킬로미터로 가까운 편이지만 국도로는 8시간 이상이나 걸리고, 98년도 개통된 상하이-항저우-닝보 간 고속도로를 달려도 5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이다. 두 항구도시를 ‘<’ 모양인 항저우 만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행기를 타고 갈 경우에는 실제 비행시간이 20여 분 뿐이 안 걸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다.
평소 비행기는 점에서 점으로, 기차는 선에서 선으로, 자동차는 면에서 면으로, 도보는 입체에서 입체로의 여행이라고 주장하며, 될 수 있으면 자동차나 열차편을 애용하는 나 역시 상하이에서 닝보로 갈 때만은 비행기를 탈 수 밖에 없다. 상하이-닝보간 비행기는 떴다하면 곧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스튜어디스는 승객들에게 사탕을 바쁘게 던져주고 승객들은 사탕한개를 다 먹기 전에 벌써 착륙안내를 알리는 기내방송을 들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아마 이렇게도 짧은 거리의 운항시간을 가진 여객항공노선은 찾기 힘들 것 같다. 이런 닝보는 도시규모로 보면 항저우에 이어 저장성의 제2의 도시이지만 경제력 제1의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중국 전체로 볼 때 정치 중심지가 베이징이고 경제 중심지가 상하이 이듯이, 지방 성(省)을 놓고 볼 때도 성도(省都)는 단지 제1의 도시인 정치중심에 지나지 않으며 제2의 도시가 경제력에서는 제1도시보다 우세를 점하는 특징이 있다. 더구나 바다와 면하고 있어 경제발전이 앞선 성들은 하나같이 제2의 도시가 제1의 도시보다 경제력 면에서 앞서 있다.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거명해보자면 랴오닝 성의 성도 선양보다는 다롄이, 허베이 성의 스자좡보다는 탕산이, 장쑤 성의 난징보다는 쑤저우가 우세하다. 저장 성의 남쪽 푸젠 성도 푸저우보다는 경제특구도시인 샤먼이 앞서 있고, 광둥 성도 광저우보다는 역시 경제특구도시인 선전이 훨씬 발전하였다.)
중국의 국부 손중산(쑨원)은 닝보상인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높이 평가했다.
“상공업 경험이 풍부하고...., 닝보상인들은 비즈니스를 잘하기로 소문났으며 강한 기백을 가지고 있고..."
기실 손중산이 즐겨 입어 ‘중산복’(인민복)이라고 불리게 된 중국식 정장도 닝보인이 처음 개발한 것이다. 닝보는 현재 북방의 다롄과 함께 중국의 의류산업 도시이기도 하다. 닝보상인은 근대 최초의 기성복과 양복을 재단해냈다. 중국의 패션의류업은 길고긴 봉건사회에서 시종 자급자족·수공업 식으로 유지되어왔다. 청나라 때부터 싹을 틔운 닝보의 의류업이 최초로 베이징에서 기성복집을 연 것은 닝보의 예하 현의 하나인 쯔시(慈溪)사람이다. 청나라 초부터 약 200년 동안 닝보의 쯔시사람은 중국 전통 복식을 재단하며 베이징 성의 기성복을 농단하여왔다.
20세기 이후 서방 복식문화의 침투로 기예가 정교한 진시엔(勤縣)과 퐁화(奉化)사람이 서양 양복재단기술을 받아들였다. 붉은 머리에 파란 눈동자의 사람의 양복을 깁고 민족특색이 충만한 하이파이(海派: 바다파) 양복을 재단하였다. 또한 닝보방은 중국 최초의 전문의류복장 전문학교를 개설하고 중국 최초로 양복 이론저작을 편찬해냈으며 앞서 중국 최초의 중산복(인민복) 한 벌을 제조해냈다. 1950년대에서 1990년대 베이징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의 의복은 거의 모두가 닝보출신 재봉사 손에 만들어졌다.
현대 닝보 의류업의 부흥은 전통 수공업 식에서 완전히 탈피하게 만들었다. 특히 1990년대 산산(衫衫) 브랜드의 중국 의류시장 석권은 중국 현대 의류업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1997년 10월 6일, 닝보는 제1회 국제 복장제를 열었다. 상하이 체류시절에 나 역시 옵저버로 초대받은 적인 있는 이 이벤트는 닝보 의류업을 국제교류의 최선봉에 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닝보의 산산, 그알(戈爾), 루어몽(羅夢), 이티(一體) 등 중국의 4대 의류브랜드는 중국천하를 석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 전체 의류생산량의 10분의 1을 닝보 의류업이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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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옷과 음식을 주는 부모**
중국상인의 꽃중의 꽃, 닝보방의 특징과 장점은 다음과 같이 크게 아홉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닝보상인은 돈벌 기회를 잘 잡는다. 그들은 적시에 경영방침을 조정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이 장점 하나만 가지고도 능히 닝보상인은 치열한 상업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과감하고, 낡을 틀에 매달리지 않는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경영책략과 프로젝트를 조절한다. 닝보상인의 융통성과 변화에 능한 천성은 상대방의 무릎을 치게 할 정도다.
일례로 해방 전의 닝보출신의 거상 위차칭(虞洽卿)은 상하이의 번화가가 북쪽으로 뻗어나갈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는 바오산루(寶山路)와 하이닝루(海寧路)의 광대한 벌판을 사들였다. 당시 그곳은 인기척도 별로 없는 외지고 황량한 갯벌이었다. 같이 따라간 부동산 전문업자들조차 위차칭을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자 상하이 정부는 그 외딴 지역을 크게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 일대의 지가는 급속한 속도로 치솟고 위차칭은 엄청난 액수의 돈을 쓸어 담았다.
닝보상인은 눈으로 육방을 보고 귀로 팔방의 소리를 듣는 듯하다. 시기와 형세를 정확히 판단하는 재주는 그들을 중국상인의 사철 푸르른 적송나무로 우뚝 서게 하여 유대상인을 비롯한 세계 어느 위대한 상인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겨루게 만든다.
이러한 닝보상인과의 거래 시에는 우선 그들을 잘 알고 그들 못지않게 민첩하고 교묘하게 대응해나가야 한다. 또한 닝보의 시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시장은 상인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곳이지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정국의 변동, 자연재해, 국제정치정세, 거시경제 상황 등의 객관적인 환경의 변화와 동종업자들의 경쟁, 라이벌의 경영수단의 변화, 소비자 수요의 변화 등 직·간접적으로 사업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잘 읽어 나가야만 한다. 적시에 변화로써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이 변하면 나도 변하고, 남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변함으로써 그 변화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닝보 시장의 맥을 정확히 짚어내며 거기에 맞게 경영책략을 조정하되 때로는 선수를 쳐서 상대방을 제압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중국상인의 꽃중의 꽃들이 화단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느냐 마느냐의 가장 중요한 관건적 요소라 할 수 있다.
둘째, 닝보상인은 고객관리의 명수다. 손님은 누구더냐? 그들에게 “손님은 왕이 아니다. 손님은 옷과 먹을 것을 주는 부모(衣食父母: 옷과 먹을 것을 주는 부모)”이다. 오직 손님만이 나의 상술과 돈버는 오페라에 감동하여 물건과 서비스를 사간다. 손님의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나의 의식주를 영위할 수 있으니 손님은 나를 길러주는 부모나 매 한가지이다. 친부모는 나를 낳고 길러주셨지만, 내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나를 도와 색시를 맞게 하고 가업을 일으켜 세우도록 한 사람들은 손님들이다. 그래서 손님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하며 친부모처럼 고객을 존경하고 모셔야 한다.
1949년 중화민국공화국이 성립 이후 중앙정부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나 서구의 "손님을 왕처럼 모시자”의 구호는 기실 중국 전통 문화와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물며 손님을 부모처럼 모셔온 닝보상인들에게는 허무맹랑한 구호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중국의 여타 지방은 실행은 잘 하지 않고 목청만 높였지만 닝보상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잘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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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과 성실, 외향적인 닝보상인**
셋째, 닝보상인은 신용을 잘 지키고 성실하다. 신용과 성실은 서방의 자본주의 상업정신의 중요한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동서문화를 겸해서 받아들이고 저축해온 그들은 상업거래에서 이러한 신용과 성실의 원칙을 잘 지킴으로써 고객의 호감과 칭송을 받아왔다. 역사상 닝보 출신으로 '철물점 대왕(五金大王)'으로 일컬어지는 예청중(葉澄衷)의 성공의 계기도 그렇다.
예청중은 상하이 황푸 강의 나룻배를 저으면서 뱃삯과 손님에게 군것질과 잡화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든 소년 뱃사공이었다. 어느 날 한 영국상인이 그의 나룻배를 타고 황푸 강 동편 즉 푸동으로 건너갔는데 그 영국상인은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돈 가방을 그만 배에다 놓고 내렸다. 예청중은 배 안에서 가방을 발견하고는 방금 내린 손님에게 돌려주려 했으나 손님은 이미 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예청중이 그 가방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수천 달러와 다이아몬드 반지, 수표와 어음 등 그로서는 꿈에도 꾸지 못할 거액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가방 소유자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그 어떠한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예청중은 그날 장사를 포기하였다. 나룻터에서 그 코 크고 눈 푸른 서양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늦도록 자신의 모든 사업자금뿐만 아니라 영국으로 돌아갈 차비조차 잃어버린 그 영국상인은 황푸 강에 몸을 던질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다. 힘없이 털레털레 나루터로 돌아왔는데 글쎄 그 소년 뱃사공이 자신의 돈가방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가방을 열어보니 모든 돈과 물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였다. 영국상인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소년의 손을 굳게 잡고는 사례금으로 천 달러를 건네주려 했으나, 소년은 한사코 돈 받길 거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영국상인은 예청중을 상하이 최대의 철물점을 경영하는 파트너로 초빙하였다. 그 후에도 예청중은 변함없이 고상한 상덕과 상도를 발휘하여나가니 사람들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으며 나아가 철물점 대왕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닝보상인은 여타 지역의 중국상인이 손님을 끌 때 제일 잘 쓰는 말 “즉 물건도 진짜고 값도 싸다”라는 화진가실(貨眞價實)을 잘 실행하는 편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다. 그래서 외지상인이나 외국상인들이 닝보상인과 거래하거나 동업을 할 경우 그들이 여간해서는 사기나 협잡을 부리려 하지 않기에 비교적 편안함과 안전감을 느낀다고 한다.
넷째, 닝보상인은 외향적이다. 발 다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활동 지역을 부단히 넓히고 새로운 시장 개척에 능하다. 중국 제일의 경제도시 상하이는 닝보상인의 본부라고 할 수 있다. 상하이뿐만 아니다. 베이징과 톈진, 선양과 쑤저우와 항저우에서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아주 먼 산골과 농촌에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바다 건너 일본이나 동남아 유럽 북미 등 세계 거의 모든 곳에 그들의 발자취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닝보상인은 항저우상인과 정반대로 고향에 죽치고 있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닝보상인들은 고향을 떠나 외지로 나가 창업을 하고 사해를 집으로 삼아 모험을 감행하길 즐긴다. 19세기 말에서 1940년대에 걸쳐 20만 명의 닝보상인이 해외로 떠났다. 홍콩 거주민 중에 원적지가 광둥 다음으로 많은 게 저장이고 저장에서도 닝보다. 적지 않은 닝보상인은 홍콩에서 자리를 잡고 기업을 창업했고 세계 각지에 지사를 설립하여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49년 공산화 이후에도 수많은 닝보방들은 홍콩, 일본, 타이완, 동남아, 유럽, 북미, 호주 심지어 중동과 아프리카에까지 퍼져나갔다. 해외의 닝보방은 화상(華商)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서도 힘을 떨치고 있다. 닝보방은 세계 선박왕 바오위강(包玉剛)과 통하오윈(董浩雲), 상하이 대형 위락장 따스지에(大世界)의 창설자 황추지우(黃楚九), 홍콩 극장계의 대부 샤오이푸(邵逸夫), 20세기 전반 기업대왕 리우홍셩(劉鴻生), 중국최대의 비누공장을 차린 항송마오(項松茂)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2002년 현재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닝보출신 화상의 수는 무려 30여만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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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 전천후 닝보상인**
다섯째, 닝보상인이 취급하는 업종은 무척 다양하다. 돈이 벌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손을 댄다. 경영 방침과 프로젝트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환한다. 의류업 금은방 해산물 한약재 등 전통 업종에서 오래도록 명성을 떨쳤던 닝보방.
아편전쟁후 서구열강의 풍속의 바람이 불어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로운 흐름에 적응해 나갔다. 닝보상인이 투자한 주요신흥 산업으로는 해운업, 대외 무역, 시계와 안경업, 일용품, 양약업, 보험업, 금융업 등 뿐만 아니라 호텔과 사진관 오락장 택시사업 등 서비스업 등 모든 업종에 손대지 않는 곳이 없었다.
21세기 지금도 닝보상인들은 거의 모든 생활필수품과 생산재료를 취급하고 있다. 소비재는 농부산물에서 화섬원단, 복장, 실크, 신발과 가죽 등 소상품과 가전제품, 자전거, 가구, 장식재, 통신, 컴퓨터 등 공업품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가히 전방위 전천후라 할 만하다.
여섯째, 닝보상인은 하찮은 이익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파리머리처럼 작은 이익(蠅頭小利)이라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자고이래로 상인은 이익을 추구한다. ‘관자’에서 말하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달려가는 상인이 돈을 잘 번다”고 했다. ‘사기’에도 누구나 이로운 일만 보면 좋아서 모여들고 이익이 없으면 저절로 떠나간다고 했다.
세상사람들 특히 상인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한다. 훌륭한 상인은 이익이 많든 적든 파리머리처럼 사소한 이익도 포기하지 않는다. 일반인의 일상용품의 가격은 싸지만 그 수요는 거대하고 이윤은 매우 박하지만 하나둘 쌓이면 수억의 거액이 된다. 닝보상인은 작고도 세세한 이윤까지 따지기로 유명하다. 지금 중국에서 몇 전 몇 푼까지 소수점 이하의 이익까지 따지는 상인은 닝보상인뿐이라고 한다.
일례로 닝보출신 장화(張華)라는 이름의 20대 후반의 한 청년은 간쑤 성의 빈곤지역의 학교 배지 보급사업을 벌렸다. 간쑤 성의 황량한 황무지를 몇 달 헤맸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 원인은 첫째 그곳은 2角(0.2위안)에 1개인 배지를 사서 달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지역이었고, 둘째 배지를 다는 습관이 없어서 그랬다. 장화 청년은 일시적으로 자포자기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외진 산중턱에 위치한 어느 소학교에서 작은 행운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학교는 교사를 포함 전 학생 수는 고작 13명인 아주 작은 학교였다. 배지는 1角 2分(0.12위안)의 가격에 팔기로 계약을 맺었다. 장화는 그 장사가 엄청 밑지는 장사라는 사실에 잠시 주저했지만 이를 악물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였다. 장화는 3일 내에 13매의 배지를 만들어 그 산골 학교로 보내달라는 급전을 쳤다. 전보치는 값 3.6원, 배지 모울드를 뜨는 비용, 제작비용, 운송료까지 들어간 비용은 모두 70여 위안이나 들었다. 그러나 번 돈은 고작 2.06위안이었다.
몇 달 후, 그 산촌 학교가 소속된 향(우리의 면) 단위 전체 초·중·고등학교 운동회가 거행되었다. 교사의 인솔 아래 12명의 산촌 소학교 학생들이 배지를 가슴에 번쩍이며 운동장에 들어서자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빛나는 배지를 착용한 소학교 어린이들을 몹시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운동회가 끝나자마자 장화는 향 내 모든 학교로부터 배지 주문에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배지 달기 붐은 현에서 다른 현으로, 현에서 다시 간쑤 성 전역으로 확대되어 장화는 수백만 위안의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훌륭한 기업인은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어버려서도 안 되지만, 작은 이익이 남는 작은 사업을 무시해도 안 될 것이다. 파리머리가 소머리를 부른다. 닝보상인에게는 사소한 것이나 큰 것이나 이득이라면 다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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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듬상인, 꽃중의 꽃 닝보상인**
일곱째, 닝보상인들은 잘 뭉친다. 또 네트워킹을 즐긴다. 닝보방은 닝보출신의 지연을 중심으로하여 혈연, 고향의 정서와 고향의 우의를 유대로 끈끈하게 연결된 매우 긴밀한 상업집단이다.
그들은 상조회를 설립하여 동향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노인과 가난한 자를 돕고 동향 상인들의 어려운 문제를 서로 도와 해결한다. 유통상들의 주문, 상품의 종류와 매매현황을 통해 시장정보를 단시간 내에 습득한 고급정보를 혼자만 갖고 있지 않고 동향상인들과 함께 나눈다. 그들은 지역별로 구분된 중국의 소비시장은 물론 세계시장도 지역을 넘나들며 서로 시장 상황을 토론하고 공동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즐긴다. 닝보상인들은 크고 작은 전문 도매시장과 전국 각지의 시장들과 두껍게 연결된 ‘닝보마켓 네트워크’를 통해 거의 모든 것을 팔고 있다.
여덟번째, 닝보상인들은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비교적 원활하게 유지해왔다. 닝보방이 세월이 흐를수록 늙거나 죽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젊어지고 강해지는 비결 중의 하나다. 그들은 시종일관 국가에 충성하고 (집권)정부의 방침에 적절히 순응해왔다. 그 때문에 혁명의 선행자 중국의 국부 손중산을 위시하여 국민당 정부의 수반 장제스를 뒤이어 중국공산당 3대 최고지도자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쟝쩌민의 지지와 애호를 변함없이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운명을 국가의 운명에 결부시키고 민족의 흥망과 운명을 같이 하는 태세로 기업을 경영하였다. 그들은 광둥상인처럼 정치를 지나치게 배척하지도, 베이징상인처럼 정치에 심하게 열중하지도 않으면서도 정계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원만한 관계를 지속하여왔다.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마을 하나가 있다. 장제스의 고향은 닝보 시의 예하 현인 퐁화(奉化)의 시코우(溪口)가 그곳이다. 중국정부는 시코우에 있는 장제스와 그의 모친과 선조의 묘 등등, 장제스 가문과 관련한 모든 유적들을 거의 성지에 준하는 관광지로 꾸며놓고 있다. 장제스의 고택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놀라운 구절이 하나 적혀 있다. “항일 영웅 장제스 중국 국민당 위원장은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주석의 위대한 맞수였다”라고.
그러니 타이완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참고로 시코우의 장제스 유적지에서 벌어들이는 관광 수입은 닝보 시 전체 관광수입액의 절반을 넘는 거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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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닝보상인들은 중국상인의 장점들만 한데 모아놓은 이른바 ‘모듬상인’같다. 그들은 신용과 명예를 중시하되 뛰어난 상술을 구사한다. 그들이 파는 상품은 대개 박리다매로 품질에 비해 가격도 적당하다. 돈을 중시하나 광둥상인들처럼 지나치지 않고 정직하고 성실한 편이나 산둥상인처럼 지나치지 않으며, 품격에 신경을 쓰나 베이징상인들처럼 관료적이지 않다. 중국상인의 지존이라 불리지만 외지인을 깔보고 지나치게 영악스럽다는 혹평을 듣는 상하이상인들보다 오히려 친절하면서도 영민하게, 소리소문 없이 짭짤한 재미를 보는 게 닝보상인들이다.
착실한 안정 속에 쾌속의 성장을 추구하는 닝보상인. 돈을 잘 버는 가운데서도 중용과 조화의 상술을 적절히 구사하는 데 능한 그들과의 거래에는 과도한 투기성 사업으로 유혹하는 일은 금물이다. 온당하고 듬직한 인상을 주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만일 리스크가 비교적 큰 사업을 그들과 같이 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그들의 이러한 온건한 상술과 듬직한 태도가 리스크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품질경쟁력 저하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산둥상인과 달리 신기술 개발에 재빠른 닝보상인들과는 될 수 있으면 장기계약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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