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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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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4>

중국상인의 꽃 : 저장상인

<사진4-1>

***'이익'이라는 이름의 배**

청나라 건륭황제가 저장(浙江)지방을 순유하고 있었다. 황제는 높은 데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에는 수백 척의 범선이 돛을 달고 남북으로 왕래하고 있었다.

황제가 저장의 순무(巡撫)에게 물었다.
"저 수백 척의 범선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고?"

순무가 대답했다.
"제 눈에는 한 척만 보입니다."

"어째서인가?"
"폐하, 실재는 한 척뿐입니다. '이익'이라는 이름이 배 한척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남한)와 가장 가까운 중국의 성은 산둥성이다. 하지만 가장 닮은 성은 저장성이다. 약 10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과 4천5백만의 인구, 산악7 평야 3으로 구성, 바다에는 약 2천여개의 섬도 가지고 있어 그렇다. 또 쟝쑤성 광둥성과 더불어 중국에서 제일 잘 사는 성이기도 하다. 그곳이 그토록 잘 살게 된 데에는 뭐니뭐니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상인 서열 1위인 저장상인이 있기 때문이다.

창조와 해방, 개혁과 개방, 실사구시 등의 상업정신을 가진 저장상인들은 두뇌가 명석하고 행동이 민첩하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도 겸비한, 그야말로 경영에 능수능란이다. 그들은 눈썰미가 좋아 돈 되는 장삿거리를 잘 찾아내기도 한다. 일단 기회를 잡으면 기막힌 상술을 구사하는 독특한 캐릭터들로서 중국 전역에 정평이 나 있다. 지금도 저장상인의 고급 인맥, 높은 저축율과 풍부한 자금 동원력은 저장성 경제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용감한 자는 바다로 간다. 무역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지혜는 용기와 결합해야 빛이 난다. 바다는 순박한 농부에겐 말할 것도 없고 노련한 어부에게도 변화무쌍하고 간교하며 이상야릇하다. 바다에서 상인은 술수와 눈치와 재치를 배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살다보면 자신의 역량도 무한한 것으로 여겨진다. 바다는 상인에게 열린 '물의 땅'이기도 하며 포위당해 닫힌 육지를 초탈하려는 용기를 촉발케 한다. 비옥한 논밭과 평원은 인간을 토지에 속박시키지만 드넓고 변화무쌍한 바다는 인류로 하여금 이윤을 추구하게 하고 상업에 종사하게 선동한다.

바다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 상업을 낳아 기르는 것 같다. 바다는 유동한다. 그 유동의 씨앗을 바다에 주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상업의 발전이다.

***저장사람치고 거지는 없다**

범려와 서시의 후예들인 저장성은 일찍이 독특한 학술문화를 창조했다. 황종희나 루쉰 등 매우 창조적인 학자와 사상가를 끊임없이 배출해냈다. 저장성은 인구유동과 각종문화의 교류로 발전해왔다. 지역문화·중원문화·서방문화가 저장에 혼거하며 병존해왔다. 저장사람은 그의 활달한 저장문화를 형성했다.

저장사람은 수구적이 아니다. 항상 넓은 가슴과 근면한 창조로 현실을 개변하고 미래를 영접하고 있다. 저장사람은 이론적으로는 실리와 실효를 추구하고 행동으로라도 결코 헛된 설교를 하려하지 않는다. 그들과 거래할 경우에는 그들의 상업인문전통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과의 거래에서 기초다.

저장성은 예로부터 "쌀밥에 생선국 먹는 곳"(魚米之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살기 좋은 땅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저장은 중국의 다른 성에 비해 토지는 좁고 인구는 많은 편이다. 주요산업은 농업이며, 자연자원은 부족한 편인데다가 공업기초가 부실했다.

개혁개방 이전인 1978년만 해도 1인당 평균주민소득은 410위안으로 전국평균 수준의 절반도 안 되었으나 2002년 현재는 27개 성(자치구 포함) 중 전국 1위다. 그러면 무엇이 이처럼 저장성을 급성장시켰을까? 광둥이나 푸젠처럼 경제특구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중앙의 개혁개방정책에 저장이 어떠한 특별대우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토록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활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한 장의 백지 위에는 가장 새롭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 말은 아마 개혁개방 초기 저장경제의 발전을 형용하는 것으로 아주 적합할 것 같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저장의 대형 국영기업의 비중은 크지 않았으며 계획경제의 통제력도 약한 편이었다.

이 점은 저장사람들로 하여금 경직된 고정관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계획경제체제 하의 '기다리고 기대고 요구하기'만 하는 의뢰심을 벗어던지고 시장경제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확립할 수 있게 했다.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려는 저장상인은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불어오자 시장의 큰 바다로 뛰어들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선봉대가 되었다.

자금도 없이, 시장도 없이, 각고의 노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그렇게 저장상인은 빈곤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들은 어떠한 고생도 더럽고 위험한 일도 마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원의 허난상인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과 식구를 먹여 살린다. 예로부터 천시되어오던 시계수리공, 구두닦이, 두부장사, 열쇠장사, 봉제공, 솜을 타는 직종 등 가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저장사람치고 거지가 없다.

1980년대 중반, 타이저우(台州)지역 한 군데만 자그마치 10만여 명의 '두부군단'이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처에서 활약했다.

저장성 200여 만 명의 건설노무자가 전국 각처로 돈 벌러 나갔다. 또한 수많은 저장상인은 바다를 건너 세계 각지로 진출했다. 북두성이 방향을 틀면, 뭇별들이 자리를 옮기듯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멀리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구두수선공이나 두부장수들은 피땀 흘려 번 돈을 한푼 두푼 모았으며 시장경제의 기본 법칙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자본이 어느 정도 모이면 대부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서 창업을 했다. 아주 적은 수이지만 귀향한 자들도 물론 고향에서 창업을 했다. 타향에서 뿌리를 박고 새로운 출발선상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했다. 옛날 저장의 노무자들 중에서 유수한 기업체의 사장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용감히 돌진하고, 뒤에 있는 사람이 바짝 뒤쫓아가는 게 저장상인 특유의 기질이다. 어디에 돈벌이가 있다면 꼭 거기에는 저장상인들이 있다. 저장상인이 활약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활기 넘치는 전문상가가 있다. 현재 저장성에서 외지에서 상업을 하는 사람은 통틀어 300만 명이 넘는다.

저장상인은 이윤이 한 푼밖에 안 되더라도 장사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 방법이 안 될 경우 발상을 바꾸어 저 방법으로 새로운 돈벌이 길을 개척한다. 한 지방이나 어느 업종이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될 때는 새로운 희망의 땅을 찾아 나선다. 19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저장상인들의 중서부지방 투자는 900여 억 위안이고 기업은 7만여 개다. 영특한 저장상인은 중서부와 저장에서 '전승'을 거두고 있다.

<사진4-2>

***타고난 장사꾼, 저장상인**

관원이 저장 출신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들 유리병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미사용 성수인데요, 프랑스에서 어느 천주교회당 신부가 담아준 것이오."

세관원은 믿기가 어려워 유리병 하나를 골라 마개를 열었다.
코냑의 향기가 진동했다.

"할머니, 이걸 어떻게 변명하시렵니까?"

세관원이 따지자마자 저장할머니는 외쳤다.
"아, 만능의 천주시여! 이것은 정말로 기적이올시다."

저장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사람소리를 하고 귀신을 만나면 귀신소리를 한다."

저장사람의 임기응변은 천하무적이다. 사실 사람을 만나 귀신소리를 내고, 귀신을 만나 사람소리를 내면 좋을 리 없을 것 같다. 저장성은 북쪽 산둥성과 남쪽 광둥성의 정중앙에 위치한다. 그래서인가? 저장상인은 정직과 신용을 모토로 삼는 우직한 산둥상인과 돈을 신으로 섬기는 악착같고 약싹 빠른 광둥상인의 장점만 모아놓은 것 같은 상인들이다.

저장사람의 장사머리에 대해 중국무역촉진회(우리의 KOTRA에 해당) 부회장을 역임했던, 팔순의 노인 리우 핑린(劉平林)은 이렇게 회고한다.

"저장사람들 정말 장사 하나는 끝내주죠, 타고난 장사꾼이야. 유대인들마저 그 앞에서는 쪽을 못 펴, 나 세계 오대양 육대주를 수십 년 떠돌아다닌 사람이어. 중국사람 중 나만큼 본 것 많고 접촉한 것 많은 사람은 없어. 내 말 절대 틀리지 않아."

저장상인들은 몇 년 전 베이징 교외에다 '저장촌'을 건설했다. 지금 베이징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먹는 것, 쓰는 것, 입는 것, 상당 부분이 저장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베이징 시내의 부동산 임대업, 요식업소에 영세 서비스업, 옷 수선, 신발수리 등도 거의가 남방 발음의 저장상인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베이징에서 사업한 지 10년도 넘은 산둥 출신 중국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 저장상인들에게 두 손 바짝 들었던 게 10년 전이야, 그때만 해도 세상물정 몰랐지. 이제는 그들에게 두 무릎과 머리와 두 손을 땅바닥에 찧고 또 찧고 있어."

아마 중국의 상업하면 제1의 무역상업도시 상하이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중국에서 상인하면 상하이 출신이 제일 아니겠는가 하고 어림짐작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상하이의 소비자는 상하이사람, 판매자는 저장사람이다. 상하이의 경제권은 지금 저장상인들에 먹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어제(11일 15일) 제1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당 서열 6위)으로 선출된 전 상하이 시 1인자 당서기 황쥐(黃菊)도, 현 상하이 당서기 천량위(陳良宇)도 저장출신이다.

아무튼 베이징이나 상하이 상권뿐만 아니라 저장상인의 발자국은 중국의 방방곡곡, 나아가 유럽과 미주와 남아프리카에까지 널리널리 찍히고 있다.

***실크상과 차상의 메커**

천당에서 자 본 일이 있는가. 나는 참으로 황송스럽게도 티엔탕(天堂)호텔에서 하룻밤을, 그것도 생시에 묵어보았다. 티엔탕은 말하자면 '파라다이스 호텔'인 것이다. 1995년 봄 어느 늦은 밤에 도착한 항저우 기차역에서 내가 아무렇게나 잡아 탄 어느 택시기사가 추천해 준 3성급 호텔 이름이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

상하이 체류시절 나는 무수히 이 땅의 천당이라는 쑤저우와 항저우를 가보았다. 처음에는 "중국인의 뻥은 과연 못말리는구나"라는 실망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풍경을 보는 눈이 약간 틔어 이곳은 천당은 아니더라도 천당에 버금은 가겠구나 하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예로부터 욕심 많은 중국사람들은 쑤저우에서 태어나 항저우에서 살며 광저우에서 먹고 류저우(柳州: 광시성, 최고급 관의 재료로 쓰이는 목재 생산지)에서 죽길 원했단 말인가.

저장상인을 이야기하려면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닝보(寧波)상인이나 원저우(溫州)상인을 먼저 해야겠지만 나는 항저우상인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물론 항저우가 저장성의 수부(首府)이기도 하며 '지상 천당의 주민'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항저우상인은 여타의 저장상인과 다르게 외출을 잘 하려 하지 않는다. 외지인은 토박이 항저우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있다. 항저우상인의 눈에는 항저우보다 더 좋은 곳이 없는 듯하다.

실제로 항저우상인은 차라리 항저우 시내의 청소부가 되었으면 되었지 고향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토박이 항저우상인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은 상하이사람의 그것에 필적할 만큼 강하다. 1998년 10월에 개통된 상하이와 항저우 간 고속도로를 달리면 불과 2시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두 도시이지만 각 지역주민들은 서로 중국에서 최고 좋은 곳에 살고 있다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

항저우상인의 자존심에는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 절세미인 서시(西施)를 닮았다는 시후(西湖)를 비롯해 땅의 천당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첫째일 테고, 옛날 남송의 수도였다는 긍지가 둘째일터인데 이는 상하이도 누리지 못했던 영광이다. 항저우상인이 항저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항저우상인은 선조의 영광과 역사의 유산에만 매달려 수구성과 폐쇄성으로만 일관하여 이렇다할 거부가 없다. 그들은 모험과 개척정신이 충만한 닝보상인이나 원저우상인들과는 달라 같은 저장상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항저우상인의 상술을 절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항저우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 최대의 실크의 집산지이며 중국 제일의 명차(名茶) 롱징(龍井)차를 거래하는 실크상과 차상(茶商)의 메카이기 때문이다.

***항저우 상인 다루기**

항저우상인은 북방의 베이징상인들처럼 고급관료를 제일로 친다. 관계로 진출하는 것이 자랑이다. 항저우상인은 관료가 되는 일과 연결짓기를 좋아한다. 19세기 항저우에 근거지를 두었던 거상 호설암(안후이 출신)도 따지고 보면 관상야합의 전형이다. 항저우상인은 닝보나 원저우상인처럼 자기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하지 않으며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큰 것을 노리지 않는다. 그래도 관료인지 상인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베이징상인보다는 천성이 사근사근한 항저우상인은 관료적인 냄새를 풍기더라도 우아하고 문화적(?)으로 풍기는 편이다.

또 항저우상인은 체면을 중시하기로 중국 제일이다. 체면을 잃는 것을 최악의 수치로 여긴다. 예로부터 항저우사람은 찢어지게 가난해 냉수로 배를 채우더라도 부채를 들고 시후 호반을 거니는 것을 멋으로 알았다.

어떤 면에서 수도 베이징상인보다도 더 체면을 중시하는 항저우상인은 큰돈을 벌 만한 장사를 하게 되었더라도 노골적으로 떼돈을 벌지 못한다. 그들 마음속으로는 비록 돈을 간절히 갈망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생업 위에다 체면이라는 외투를 걸치려고 든다. 그들은 마치 장사를 돈 때문이 아니라 여가생활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며 내놓고 할 만한 게 못되는 것으로 친다.

여타 중국인과 비즈니스에는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주는 게 중요하지만 더구나 그가 항저우상인일 경우에는 체면을 살려주는 데 더욱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거래 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고자 항저우의 특정 제품을 여타 중국지역에 비해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한다.

거꾸로 항저우의 유구한 남송의 역사와 문화적 유산, 중국 제일의 실크와 명차산지, 항저우상인의 사업방식과 기질 같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들의 자부심을 고양시킬 수 있다면 해당 사업이나 거래가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저우상인들의 체면을 잘 살려준다면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 양보나 편의를 답례로 듬뿍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그들에게는 가격과 품질은 협상의 제일 조건이 아니다.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협상 성패의 최고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도한 저자세로 일관하면 안 된다. 상대방의 체면을 중시하는 특색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요구가 지나치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한 이유와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단계적으로 밟아야 할 것이다.

<사진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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