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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제2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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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제2부 1>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여우가 챙긴다-리샤오화(上)

<사진1-1>

"이 세상 모든 돈을 한 사람이 다 벌 수는 없다. 벌 만큼 벌고 손을 떼라, 남이 벌도록 양보해라." - 리샤오화

***혁명아, 노동수용소에 갇히다**

리샤오화는 1951년 베이징의 충원(崇文)구 지샹(吉祥)의 어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 별 특별한 것이 없었던 그는 오히려, 성적이 형편없었다. 항상 꼴찌에서 몇 번째를 맡아두곤 했다.

그러던 1966년 여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역시 여느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홍위병이 되었다. "혁명무죄 조반유리"(革命無罪 造反有利: 혁명은 죄가 없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혁명구호를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다.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했고 대자보도 남에게 질세라 담벼락에 닥지닥지 붙였다.

그는 헤이룽장(黑龍江) 생산건설대에 참가하기 위해 대륙의 동북부 끝, 광활한 황야로 떠났다. 시베리아로 넘어가는 길목 뻬이따황(北大荒)에서 그는 황무지와 소택지를 개간하며 농사를 지었다. 여드름이 얼굴 가득한 철부지는 그때 자기가 정말로 혁명대업의 선봉에 선 줄로만 알았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젊은이들과 함께 천막과 흙벽돌로 아무렇게나 지은 움막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원시공산주의 사회 "다같이 먹고 다같이 자고 다같이 고생하는 생활"을 신물나도록 경험했다. 그러다 문득 고향생각을 할 때면 북풍한설 춥디추운 뻬이따황의 생활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75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잠잠해졌을 때, 리샤오화는 고향 베이징 근교 허베이 성 주어센(濁縣)으로 돌아왔다. 주어센은 유비와 장비의 고향이기도 했다. 거기서부터 행운과 시련의 여신은 그에게 때로는 미소를 짓기도 했고 때로는 눈물을 뿌리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 국영기업의 외판사원으로 들어갔다. 토끼띠답게 일처리가 기민하고 깔끔하여 그의 판매고는 다른 외판사원에 비해 열배 가까이 차이가 날 만큼 많았다. 외판사원 생활 3년째, 그는 베이징 어느 병원의 간호원으로 일하던 장지윈(張吉芸)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공안국(경찰청)의 고위간부였다. 양가의 출신성분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시절 출신성분은 제일 우선으로 고려하는 결혼조건이었지만 둘은 열렬한 사랑으로 난관을 헤쳐나갔고 마침내 둘만의 보금자리를 차렸다.

신혼시절 리샤오화는 장인 덕으로 경제무역부 부속 식당의 취사원으로 배치되어 밀가루 반죽을 하는 일을 맡았다. 헤이룽장에서 다년간 취사원을 맡은 경험이 있었기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그는 여가를 이용해 몰래 물건을 사서 되파는 장사를 벌렸다. 아직 개혁개방 이전이었던 당시, 그 짓은 매우 위험한 범죄행위였다. 결국 리샤오화는 전자 손목시계 16개를 몰래 사고 되판 혐의로 당국에 체포되어 노동수용소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만성위장병을 핑계삼아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역시 장인의 도움이었다.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 그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사진1-2>

***알라딘 램프를 버리다**

고난과 좌절은 경력이기 전에 재산이었다. 리샤오화는 오히려 시련 속에서 자신의 재산을 모았다. 전과자인데다가 장인 덕에 석방된 자라는 불명예의 꼬리표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에게 베이징은 더 이상 살 곳은 못 되었다. 생존의 본능은 그의 등을 아프게 꼬집고 떠밀었다. 개혁개방의 시발지, 광저우로 가서 새 인생을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거기서 티셔츠와 선글라스 따위의 물건을 팔아 쏠쏠히 돈을 모았다. 그러나 그는 비전이 크지 않았던 그 장사를 오래 할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광저우 상품교역회 전람관에서였다. 그의 발길은 미제 청량음료자동판매기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주스 자동판매기, 지금은 중국개 차우차우도 쳐다보지 않는 흔해빠진 물건이었지만 당시는 눈이 돌아갈 만큼 요상한 물건이었다.

"아가씨 이 기계 제게 팔지 않을래요?"
"이 물건은 파는 게 아니에요, 흥!"

자동판매기 옆에 서 있던 아가씨는 그것이 자기 것인 양 세치름하게 잘라 말했다.
리샤오화는 생각 끝에 그 자판기 주인을 직접 찾아가 술과 담배와 약간의 웃돈을 얹어주며 매수했다. 그 마술기계를 베이징까지 운반해왔을 때 두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여름철이 되자 그 '마술기계'를 중국의 유명한 피서지 베이다이허(北戴河) 해변으로 가지고 나간 그는 맨 먼저 그곳 관리들을 만났다.

"이 기계는 중국에서 단 한 대 뿐입니다(북방의 지방관리들이 2,500킬로미터 떨어진 머나먼 남방 광저우 지방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이곳에 설치할 장소와 영업허가증만 제공하면 수입금의 절반을 드리지요."

백사장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던 피서객들은 돈만 넣으면 자동으로 나오는 맑고 시원한 음료수 기계에 빨려들었다. 긴 줄을 섰다.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한나절을 기다렸다. 0.5위안짜리 음료수는 한 컵 또 한 컵, 목마른 피서객들의 갈증을 해소해주며 가슴속에 시원하고 달콤한 맛으로 스며들었다. 그런 만큼 그의 주머니도 돈으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중국에서 단 한 대밖에 없는(?) 주스 자동판매기 앞의 장사진, 1983 여름, 베이다이허 해수욕장을 불끈 달군 일대경관이었다.

잊을 수 없는 여름이었다. 그때 나이 서른둘이었던 리샤오화는 처음으로 짜릿한 성공의 쾌감을 만끽했다. 그는 스스로 천부적인 상업적 감각을 발견하며 자신감이 생겼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북쪽 땅은 금방 추워졌고 수십만 위안을 안겨준 고마운 '알라딘의 램프'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 기계도 내년이면 퇴물로 사라져 버릴 거야, 이걸 팔아치우자!'

마침 그때 그의 '알라딘의 램프'를 1만 위안에 사가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리샤오화는 원가만 받고 얼른 팔아치웠다.

<사진1-3>

그 어떤 육체적 쾌감보다 큰 것이었다. 성공의 쾌감은 스산한 가을바람마저 춘삼월 춘풍으로 느껴지게 했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개혁개방의 발랄한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물질적 생활의 향상은 필연코 정신적 생활에 대한 추구를 불러일으키는 법.'

오래도록 극좌파의 사슬에 묶여 혁명의 오페라를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보아온 중국인, 그들은 이제 다채로운 문화와 오락을 갈망하고 있었다. 돈 버는 데라면 동물적 감각의 소유자인 리샤오화는 또 한번 몸을 떨었다. 친황다오(秦皇島: 허베이 성 북부의 도시, 진시황이 순유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시 변두리 공장의 강당을 임대해 우리 나라의 비디오 방 비슷한 'MTV'를 개업했다. 중국 대륙사람들은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밀려들어오는 홍콩과 타이완의 무협, 갱, 연애물의 강렬한 유혹을 억누를 수 없었다. 1위안짜리 입장권이 10위안에 암거래될 만큼 일대 호황을 누렸다. 1984년 중국대륙에서 많은 사람들이 '1만 위안' 부자가 되었다고 뽐내고 있을 때, 그는 이미 '백만 위안' 부자가 되어 있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인이 챙긴다**

리샤오화는 학창 시절 홍위병 활동에 시간을 보내느라고 공부를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34세의 늦깎이로 그는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도쿄의 어느 언어학원의 휴게실이었다. 일본신문을 읽다가 짤막한 뉴스에 눈이 번쩍 띄었다.

"중국의 101 대머리 치료제, 일본에서 인기 폭발."

한마디로 리샤오화의 공부머리는 곰이라면 사업머리는 백여우였다. 사업감각과 수완이 비상했던 그는 그 뉴스가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하자 유학을 포기하고 당장 중국으로 돌아왔다.

베이징의 101 대머리 치료제 공장 문 앞에는 작업복 차림의 어느 사나이가 나타났다.

"저는 '101'을 대량 구매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수속을 밟습니까?"

수위는 얼핏 그의 초라한 행색을 보더니 한마디로 짧게 내뱉었다.
"한 일년 후에나 오게."

그러고는 아예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이튿날 '101' 공장 정문에는 신사복을 입은 사나이가 또 나타났다. 수위는 그를 사무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영업부의 의 한 간부 직원이 그에게 손사래를 치며 던진 말,

"워낙 물건이 딸리네요, 반년 후에나 다시 오시오. 그때쯤이면 될까 모르겠소."

사흘째, 최신형 모델 '벤츠280' 한 대가 곧바로 '101' 공장 정문에 들어섰다. 벤츠 앞 유리창에는 이런 글자가 붉게 씌어져 있었다.

"재일 화교 리샤오화 선생이 101의 명성을 우러러보고 멀리서 찾아오다."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귀빈용 접견실로 들어섰고, 잠시 후 101 대머리 치료제 발명가이자 사장인 자오장광(趙章光)이 나타났다. 그는 원래 저장성 원저우(溫州) 출신의 시골 민간의료인이었는데 신비의 대머리 치료제를 100번의 실패 끝에 101번째로 발명해낸 자로서, 당시 중국에서 한참 뜨고 있던 명사였다.

리샤오화는 자오장광의 가려운 데를 적절히 긁어주었다.

"101 임직원들이 출퇴근이나 행사에 필요한 교통수단이 시급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오 사장님께서 1주일 안에 저에게 101을 다량 공급만 해주신다면 저는 1주일 안에 버스 한 대와 승용차 한 대를 기증해드리겠습니다."

리샤오화는 101의 일본 독점판매권을 따내게 되었다. 그것은 101의 중국 내수시장 전체 실적을 모두 합친 액수보다 몇십 배나 더 큰 거대한 이권이었다. 그런데 그의 상술은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광채를 발휘했다.

일본은 민족의 특성인지는 몰라도 대머리 남성들의 수가 한국이나 중국보다 훨씬 많다. '도쿄 광두(光頭) 친목회'등 각종 명칭의 많은 대머리협회가 활동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 대머리를 치료하기 위한 열정(?)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

리샤오화는 이 점을 십분 이용했다. '희귀해야 값지다.' 그는 101의 일본 공급 물량을 최대한 억제했다. 그것은 일본 소비자들의 수요를 한껏 증가시키고, 그로인해 품귀현상을 최대한 오래 지탱시키겠다는 상술이었다. 80년대 말엽 일본 대머리 남성들의 돈 대부분이 어느 중국상인에게 들어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대박을 오랫동안 터뜨렸다.

더구나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여우가 챙긴다"는 속담 그대로 기념비적인 신약 '101'을 개발한 자오장광보다 정작 몇백 배로 많은 돈을 번 쪽은 리샤오화였다. 뒤늦게 자오장광은 벤츠를 타고 온 그 여우 같은 재일화교가 내민 한 장의 종이에 서명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게임은 끝! 그는 순간적인 판단 실수로 성공의 가장 큰 결실(101의 대일본 독점판매권)을 고스란히 엉뚱한 사람에게 넘겨버리게 된 것이었다.

"우리 옛말에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여우가 챙긴다' 라는 말이 있죠. 흔히 곰은 미련하다고 하는데 그건 고집스러운 자기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할 줄 모르고 상대방을 속일 줄도 모르죠. 나는 말 그대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곰이었어요"

이것은 "그 동안 돈은 많이 벌었냐" 하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대한 자오장광의 '서글픈' 탄식이었다.

<사진1-4>

‘중국인의 상술’ 저자 강효백(姜孝伯)은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타이완 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국립 타이완 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와 중국화동정법대에서 수년간 강의를 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길사에서 펴낸 ‘협객의 나라 중국’(2002)’차이니즈 나이트1·2’(2000) ‘협객의 칼끝에 천하가 춤춘다’(1995)를 비롯하여 ‘중국? 중국, 중국!’동양스승, 서양제자’와 동인시집 ‘야간열차, 바닷가에서’등이 있다.

‘중국의 경제특구 발전전략’’중국 중심항구 선정 논쟁’영수증 복권제’열린공단 닫힌공단’ 등 여러 편의 중국경제 관련 논문과 칼럼을 썼으며 ‘중국 내 한민족 항일독립운동 100대 사적’(2001)을 시디롬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또 ‘런민르바오’(人民日報)로 하여금 상하이 임시정부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1999)케 했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기고문이 실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주 대만 대표부와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대사관 외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주로 중국의 경제와 문화 관련 업무를 맡아왔다.

지난 8월 17일까지 33회에 걸쳐 프레시안에 연재된 '중국인의 상술' 1부를 엮은 책 '중국인의 상술-중국 대륙을 움직이는 상인들 이야기'(한길사)는 10월28일 출간됐다.

<사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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