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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은 갑부, 지금은 가난뱅이**
중국의 안후이성은 옛날에는 갑부, 지금은 가난뱅이라고 불리는 성이다. 명청시대 때 안후이 상인은 '후이상'(徽商)으로 일컬어지며 중국 10대 상방(商幇) 중 서열 1위를 차지하였다. 소금을 비롯한 목재, 차, 전당포 등 옛날 중국의 4대 상업은 후이상에 의해 농단되다시피하였다. 그들은 유학과 상인을 겸한다는 유상(儒商)으로서 품위와 풍요를 함께 누렸다.
그러나 오늘날 안후이의 몰골은 형편이 없다. 이웃한 중국 제1경제도시 상하이는 비할 바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최고의 주민소득을 자랑하는 저장성이나 장쑤성과도 너무나 대조적이다. 2001년 안후이성의 주민소득 수준은 중국 27개 성 가운데 꼴찌에서 몇 번째다. 안후이보다 더 내륙에 들어가 있는 후난이나 후베이, 쓰촨성보다도 뒤떨어진다. 이는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지 않은가?
여기서 나는 그곳의 영광과 몰락의 자초지종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경제와 지리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 안후이성은 우리 나라 면적보다 1.5배 가량 크고, 인구는 7천여 만이다. 화이허(淮河)를 경계로 북쪽을 화이베이(淮北), 화이허에서 양쯔강 이북 지역을 장화이(江淮), 양쯔강 이남 남쪽 산악지역을 후이저우(徽州) 또는 완난(完南) 등 서너 지역으로 나뉜다. 그들 지역 상인의 기질은 완전히 딴판이다.
화이베이는 조조의 고향이다. 산둥과 인접해 있어 그곳 상인들은 산둥상인들과 흡사해 솔직하고 호방한 편이다. 말은 느리나 또박또박 하고 표준말에 가까운 방언을 쓴다. 베이징 표준말에 능숙한 외국 상인들은 그들과의 의사소통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화이베이 상인은 거래에 신의를 중시하고 화끈하게 거래하지만 계약 관념이 약하고 상법상 분규를 쉽게 일으키는 약점이 있다. 화이베이상인과 거래할 때는 계약을 확실히 해야할 것이다.
양쯔강과 화이허 사이의 장화이 지역은 다시 동부와 서부로 나뉜다. 장화이 서부는 주로 다볘산(大別山) 산악지대로 국공내전 때 이름난 혁명 전쟁터였다. 그곳 상인의 언어와 거래방식은 허난성 동부지역 상인과 흡사하다. 그들은 선량하고 순박하고 너그럽고 의리를 중시하고 이해를 잘 따지지 않으나 큰돈을 벌지는 못하는 편이다. 1990대 후반부터 네덜란드 기업들이 그곳의 저렴하면서도 비교적 양질의 노동력에 착안해 집중 진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화이 동부는 상하이에 인접해 있다. 이곳 출신의 남자는 상하이에 건설 노무자로, 여자는 가정부로 많이 진출하고 있다. 상하이에서 일하는 그들의 소비성향은 수입에 비해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상하이 시민 못지않게 최신 브랜드를 찾고 있어 상하이 상인들을 즐겁게 한다.
남쪽으로 양쯔강을 건너면 후이저우다. 안후이상인이라면 바로 이 후이저우 상인을 가리킨다. 양쯔강 이남의 후이저우 상인은 푸젠이나 광둥상인과 많이 닮았다. 그들의 조상은 난리를 피해 중원에서 푸젠과 광둥 쪽으로 피란 가다가 그만 거기서 중도에 주저앉은 사람들이다. 후이저우상인은 약싹빠르고 영리하며 꼼꼼한 편이다. 차 마시길 매우 즐겨 밥은 굶더라도 차는 꼭 마신다. 시골장터에서 하루 장사를 끝내고 서로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하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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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주자의 봉토, 후이저우**
유생과 상인은 겸해서는 안 될까? 즉 유상(儒商)은 가능할까? 유생은 상인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상업에 종사할 능력도 마음도 없는 유생은 상인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상인들은 허구한 날 과거시험에 낙방하면서 마치 고관이라도 된 듯 목에 힘만 주는 유생을 비웃었다. 유생 앞에서 상인은 '돈 자랑'으로 유생은 상인에게 '기개'로 맞섰다. 얼핏 겉만 보면 유생과 상인 간은 긴장관계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대립은 그들의 실질적 공생관계를 감추어주었다. 유생과 상인은 서로 혈연이나 지연으로 만수산 드렁 칡처럼 긴밀히 얽혀있었다.
유생이 상인으로 전향한 예는 적지 않다. 특히 안후이상인(후이저우상인)에게 두드러진다. 안후이상인은 과거를 포기한 유생 출신이나 애당초 과거를 응시할 형편이 못 되어 일찍이 외지로 장사를 떠난 자들이 대부분이다.
안후이상인은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朱喜)를 최고의 사표로, 주희의 주자가훈(朱子家訓)을 평생의 교과서로 삼는다. 후이저우는 주자학을 낳은 정이(程이)와 정호(程顥)의 고향이자 주희가 그의 탄생지인 푸젠보다 더 오래 머물면서 학문을 펼쳤던 곳이었다. 후이저우는 예로부터 베이징상인을 관상(官商)으로, 안후이상인은 유학자적 상인, 즉 유상의 대명사로 칭하게 되었다.
안후이상인은 서양의 초기 자본가들처럼 중국 각처에 창업을 하고 돈을 벌러 다녔다. 한때 양쯔강 연안의 모든 도시들은 안후이상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이 유행했다. 장쩌민 국가주석의 고향 장쑤성 양저우(揚州)도 안후이상인들의 식민지였다. 당나라 말엽 이래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던 양저우는 후이저우의 염상들이 투자하는 바람에 중흥을 맞게 된 게 사실이다.
안후이상인은 처음에 문방사우와 칠, 나무, 차 등의 토산품 판매부터 손을 대었다. 그들은 '후이저우의 주판'이라는 독특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주판은 눈속임 사기주판이 아니라 장사가 잘 될수록 더욱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려는 안후이상인의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것이다. '후이저우의 주판'은 차츰 경영범위가 확대되어 전국의 염상, 전당포, 목재소, 정미소, 양조장, 녹차상, 해외무역상까지 장악했다. 특히 청나라 시절 중국 대형 염전들은 안후이상인이 독차지하여 중국 상인 서열 1위를 확고히 했다. 청나라의 극성기를 장식했던 건륭황제까지도 안후이상인의 초호화판 별장에 질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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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국영기업'은 없다**
이토록 잘나가던 그들이 왜 오늘날 가난하게 되었을까? 후이저우에서는 예로부터 '7산 1물 1밭 1길'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올 만큼 농사짓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들은 열서너 살만 되면 외지로 나가 바람 따라 돈 따라 수십 년을 떠돌아야했다. 농경에 열악한 자연환경과 부모에 대한 봉양을 극력 강조한 주자의 가르침은 거역할 수 없는 무언의 군령장(軍令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정도 돈을 벌면 반드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귀향은 후이저우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이 또한 주자가 내리는 거역하지 못할 무형의 소환장이었다. 돈을 벌었으면 친족에게 효도와 예법으로 보답하라는 지시였다.
지금 안후이성은 인접한 성에 비해 민영기업의 비중이 매우 미약한 게 특징이다. 대부분 국유기업 뿐이다. 국유기업, 이왕 이 단어가 나왔으니 한마디 말하고자 한다.
중국에는 '국영기업'이 없다. 다만 '국유기업'만이 있다. 중국은 1993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영기업'이라는 용어를 '국유기업'으로 바꾸었다. '국가가 소유와 동시에 경영을 하는 기업'이라는 의미에서 "국가가 소유는 하되 경영은 기업 자신이 자주적으로 하는 기업"이라는 의미로 전환하였다. 국유기업의 재산은 전인민의 소유에 속한다. 다만 국가는 인민을 대표하여 그 소유권을 대행하고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 원칙에 따라 국유기업으로 하여금 경영관리를 하게 한다.
국유기업에는 법인 자격이 주어지고 국가는 세금과 이윤 이외에는 국유기업의 경영에 직접 간섭할 수 없다. 또한 국유기업은 자산증식을 위한 권한을 가지며, 청부, 임대, 주식제 등 여러 가지 경영 형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있다.
중국 국유기업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각종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공기업과 비슷하되 그 운영 범위는 꼭 공공적 성격이 아닌 영리를 목적으로 할 수도 있는 형태의 기업으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현재 중국 전체의 생산력에서 민영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4퍼센트다. 국유기업의 그것을 대폭 초과했다. 2001년 말 현재 중국의 민영기업의 수는 2백3만여 개. 근로자수는 약 2천7백만 명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의 민영기업의 비중은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고용시장 불안을 상쇄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동부지역 12개 성의 민영기업의 생산력 비중은 전체의 61퍼센트를 점한다. 그러나 유독 안후이성의 민영기업 비중은 전국 평균치에도 훨씬 못 미치는 30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리고 2001년 중국 100대 민영기업인 가운데 안후이 출신은 단 한명도 없다. 바로 이웃한 저장출신의 17명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안후이성의 경제력은 대부분 국유기업에 의존한다. 물론 여러 원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안후이상인의 상업에 대한 자발성의 결핍이다. 아직도 안후이 상인은 주자학의 종법주의와 소농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돈을 조금 벌면 만족하고 더 이상 재투자를 하려 하지 않는다. 사업을 더 이상 확장하지 않는 것을 마치 상도(商道)와 상덕(商德)으로 여겼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거부가 되었다하더라도 그들의 가슴 어귀에는 상인을 천시하는 자기비하, 자기학대의 의식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중년이 되면 대부분 객지에서 벌려놓은 기반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간혹 귀향하지 않고 외지에서 그대로 눌러 사는 자도 있었지만 대개는 자포자기의 향락주의에 빠져 젊은 시절 뼈 빠지게 번 돈을 사치와 방탕으로 탕진하다 빈털터리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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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은 목적, 상업은 수단**
안후이상인은 상업을 벼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거나 진득이 대를 이어 장사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상업으로 시작했다가 죽을 때까지 상업을 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인생의 초중반에 부자가 되면 후반부터는 관리가 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상인, 아들은 관리를 하는 예가 유독 많았다.
안후이상인은 돈깨나 모았다고 생각되면 곧장 부나방처럼 관직의 길로 나섰다. 이웃 저장이나 광둥상인처럼 상업만을 인생의 유일한 생업으로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번 돈으로 관직을 사든지 의연금이나 기부금을 많이 바쳐 조정의 환심을 사는 데 몰두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장사로 큰돈을 번 조상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거나 신혼 장사에 나가 수십 년 동안 평생을 수절한 여인들을 위해 세운 '파이팡'(牌坊), 즉 중국식 열녀문을 세웠다. 시장경쟁시대에 들어서부터 안후이가 연전연패의 운명을 감수하는 현상은 필연적 귀결이다.
근대에 이르러 안후이는 청말의 실권자 리홍장(李鴻章)과 중국 공산당 창시자 천뚜슈(陳獨秀)등 중국의 명운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거물들을 낳았다. 특히 안후이상인의 요람, 후이저우의 지시(績溪)현은 중국 제일의 명산 황산과 중국 4대 불교 명산 지우화산(九華山), 중국 4대 도교 명산 치윈산(霽雲山)이 그리는 삼각형의 중심에 있어 중국의 알프스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중요한 사실 하나는 지시현이 '쓰리 후(胡)'를 배출한 곳이라는 점이다.
근대 중국의 상성(商聖)이라 불리는 후쉐엔(胡雪岩)과 20세기 신문학 운동을 주도하고 베이징 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던 후스(胡適), 그리고 21세기 중국을 이끌 제4세대영도자 후진타오(胡錦濤)의 본향은 모두 지시현이다.
이들 쓰리 후 가운데 필자가 집중 거론하고자 하는 인물은 후쉐엔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쉐엔은 상성이기는커녕 전형적인 안후이 유상의 하나일 뿐이다. 후세의 소설가들에 의해 조작된 신화일 따름이다.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지모와 사상의 이치를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지고한 상덕과 환상적인 상술을 발휘하였다는 후쉐엔에 관한 책들이 중국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부터였다. 특히 1990년대 초 그와 같은 후씨며 동향인 후진타오가 중앙 정치무대의 샛별로 뜨면서부터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그중 몇몇 책은 한국에도 번역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책들 가운데 후쉐엔 본인이 쓴 것은 하나도 없다. 후이저우 산골의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 출신인 후쉐엔이 저술을 남길 만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격식과 체통을 매우 중시하는 주자학의 문화적 토양에서 극히 적은 분량의 글 몇 줄을 남겼을 뿐이다. 상인으로서의 그의 행적도 실상은 본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권력과 결탁한 덕택으로 그는 한 20년 간 반짝했다가 말년에 폭삭 망해 일전 한 푼 없는 가난뱅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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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후(胡), 과다포장 된 상성**
후쉐엔은 왕요우링(王有齡)이라는 말단 관리의 손에 5백 냥을 쥐어주며 상경하면 매관할 뇌물로 쓰라고 한 게 적중하였다. 한때 이 때문에 후쉐엔은 점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후에 매관에 성공한 왕요우링의 도움을 받아 사업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재산은 정치권력에서 비롯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유망하다고 생각되는 관리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고 관리들에게 정보와 책략을 제공했다. 관리들의 지원을 받아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어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도록 이용했다(이것도 후세의 소설가들에 의해 그가 인물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있었다고 변조된다). 그는 청나라 시대 금융기관인 전장(錢裝)의 점원에서 항저우를 거점으로 하는 부캉(阜康) 전장을 개설하고, 나아가 26곳에 점포를 개설할 정도로 급성장시켰다. 다시 그는 그 이익을 토대로 후칭위탕(胡慶餘堂)이라는 약국 체인을 운영하는 거상으로 부상하고 환전상, 찻집, 견직물 가게 등 사업을 다각화했다.
왕요우링이 병사하자 잠시 언덕을 잃은 후쉐엔은 태평천국 진압군 사령관 주어종탕(左宗棠)에게 반란군 진압 성금 명목으로 내밀히 군량미 10만 석을 바친다. 그를 자신의 백그라운드로 삼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다가 1870년 리홍장(李鴻章)과의 권력 투쟁에서 주어종탕이 패배하여 실각당하자 후쉐엔의 기업도 급작스레 파산해버렸다. 서든대쓰! 무수하게 따르던 여인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그를 버리고 떠나갔다. 부캉 전장도 후칭위탕도 전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했다. 후쉐엔은 관상결탁으로 일어나 관상결탁으로 쓰러졌다. 끝이 나쁜 것은 다 나쁘다. 상인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20세기 말, 안후이는 또 하나의 후쉐엔을 탄생시켰다. 광둥 주하이에서 활약하는 거인 그룹 총재 스위주(史玉柱)였다. 1989년 4천 위안으로 컴퓨터 업계에 뛰어든 지 6년 만에 개인 재산만 해도 10억 위안을 모았다.
장쩌민 총서기를 비롯한 중국의 최고 정치지도자들이 그를 만나려고 공장을 직접 찾아갔다. 거인의 비약과 젊음, 속도, 효율은 90년대 초반 중국 천하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 불가사의한 거인 신드롬은 불가사의하게도 짧았다. 스위주의 멸망 제1원인은 동향 선배 상인인 후쉐엔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는 사업이 커 나가자 정치계에 지나치게 추파를 던지며 다른 분야로 정력을 분산했다. 20세기 후쉐엔의 신화는 또 요절해버렸다.
19세기 후쉐안이나 20세기 스위주 모두 안후이 유상의 표상으로 불린다. 그들 유상의 경영철학의 씨앗은 공히 주자학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업 경영에 주자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는 유상들은 초장에 약발이 잘 먹히는 같으나 결과는 항상 좋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레닌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처음에는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이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급격히 붕괴하는 현상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주자와 레닌은 많이 닮았다.
***주자님의 방귀는 향긋한가**
필자의 제1애독서는 '백범일지'다. 그중에서도 가슴에 절실히 다가오는 부분은 아래 대목이다.
"5백년 조선은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기 좋은 것뿐이요, 주자학으로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 민족의 원기를 소진해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싸움과 의뢰심뿐이다.
오늘날 보아도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 민족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 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 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잊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주자님의 방귀라?' 오랜 세월 나는 중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지만 공자 아닌, 주자의 방귀조차 맡기도 힘들었다. 주자의 유학은 도덕적이고 현세적이며 형이하학적인 공자의 원시유학과는 대조적이다. 주자는 예의 본질은 명분에 있고, 예의 내용은 명분에 입각한 질서의 정립에 있다고 하며 가족과 문중의 예절규범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주자는 자신의 직분에 맞는 예의와 절도 있는 행동을 주장하며 그렇게 해야만 사회질서가 안정된다고 보았다. 유교경전에 대한 그의 교조주의적인 해설은 과거시험의 기준이 됨으로써 중국 상층 문화의 경직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는 달리 주자학이 중국 천하를 군림한 시절은 송나라 때뿐이었고, 송나라 이후 주자학의 직할 지역은 안후이 지역으로 국한되었다. 그러니까 중국의 주자학은 '한국의 유교=주자학'의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까지의 지위와 권력은 누리지는 못했다.
중국에 유교는 없다. 적어도 우리 나라와 같은 종교의 하나로까지 숭배되는 유교는 없다. 있다면 유학 또는 유가사상뿐이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 산둥성을 샅샅이 헤매고 다녔지만 취푸의 공자묘와 공자 사당, 조우청의 맹자 사당 외에는 아직도 우리 나라 군데군데 들어서 있는 서원이나 향교, 효자문 열녀문 등은 단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 레닌 사회주의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왕창 다 없애 버렸을까? 아니다. 반만년 중국의 오랜 전통을 마르크스와 마오가 뒤바꾸어 놓는다는 일은 어림없는 일이다.
"아, 여기 있었구나." 일단 반가웠다. 안후이 상인의 요람 후이저우를 여행하는 기회에 나는 산둥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열녀문과 향교와 서원을 신물이 나도록 마주쳤다. 거기서 나는 백범이 통탄한 주자의 방귀 냄새를 듬뿍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자의 방귀는 향기롭기는커녕 황산 소나무의 싱그러운 솔잎 향으로도 가시게 하지 못할 만큼 악취로 느껴졌다. 자신이 점잖은 유생보다는 현실의 생활인을 추구하고자 그렇게 느껴졌으리라.
만약 내가 이런 망발(?)을 조선시대에 공개적으로 토로했다면 아마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생매장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같은 유학의 일파인 양명학을 연구했다고 해서 참수형에 처하였던 조선시대가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처럼 받들어 온 '유교'는 공자보다는 주자에 훨씬 가까운 것이 아닐까?"하는 오래된 의문부호를 지웠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하지 않고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라"는 백범의 가르침 덕분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오래가지 못하는 안후이상인의 부유와 낙후한 안후이의 오늘의 몰골을 목도하면서 나는 아시아적 가치와 더불어 한때 유행했던 용어인 '신유교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것이 공자의 원형이 아닌 주자의 변형이라면, 감히 단언하겠다. 신유교주의의 미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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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는 10월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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