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이 공창을 개설한 까닭은**
'삼국지'에서 주유는 이렇게 탄식하며 죽는다.
"하늘이 나를 내셨으면서 어찌 공명을 내셨나이까?"절세의 전략가 주유마저 혀를 내두르게 한 신묘한 계책으로 그를 제풀에 죽게 한 천하의 기재 제갈공명. 그의 원래 고향은 산둥성 동쪽 바닷가, 즉 제나라 땅이었다. 그런 제갈공명이 일생의 사표로 받든 위인 역시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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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은 젊은 시절에 포숙(鮑叔)이라는 친구와 각별하게 지냈다. 관중은 활을 잘 쏘았지만, 무엇보다 이재(理財)에 밝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재운이 잘 따라주지 않아 늘 우울하게 지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그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스무 살 무렵 제나라 도읍인 린쯔(臨淄)로 이사 왔다.
관중은 장사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 포숙을 알게 되었고, 포숙이 마련해 준 장사 밑천으로 관중은 바닷가에서 생선 장사를 시작하였다. 장사는 크게 성공하여 관중은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데 관중은 이익의 대부분을 자신이 차지했다. 이를 알게 된 주위사람들이 포숙에게 관중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관중은 배은망덕한 자가 분명하네. 어찌 도와준 자네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모든 이익을 자신이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포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게. 관중의 집은 가난하고 나의 집은 부유하네. 관중이 이익을 배분하지 않은 것은 그가 가난하기 때문이지, 나의 은혜를 몰라서가 아닐세. 그는 결코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네."
그 뒤로 관중은 사업을 더욱 크게 벌여 이웃 나라와 교역을 하는 무역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그런 관중을 포숙이 극구 말렸다. 두 사람은 자주 의견 대립을 하였다. 그러는 중에 사놓은 물건을 저장해둔 창고에 불이 나 관중의 사업이 완전히 망하였다. 그러자 친구들이 다시 관중을 비난하였다.
"보게나, 자네 말을 듣지 않더니 급기야 망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관중과 절교하는 것이 좋겠네."
그러자 포숙이 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네. 장사를 하다 보면 밑천을 다 날릴 수도 있는 법이야, 그가 능력이 없어 서이거나 어리석어서가 결코 아니네. 관중은 때만 잘 만나면 크게 능력을 발휘할 사람이네."
아래는 '관자'에 나오는 관중의 고백이다.
나는 젊어서 포숙과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일에는 성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관중은 원래 제 환공(桓公) 형의 참모였다. 그는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경쟁자인 환공을 활로 쏘아 죽이려 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제 환공은 포숙의 추천으로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관중은 환공을 위해 천하를 향해 활을 쏘아 환공의 패업을 성취시켰다. 이러한 관중과 포숙의 우정은 세인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이를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였다. 그러나 이 관포지교도 중상주의가 농후했던 제나라의 환경이라 가능했지, 예악(禮樂)문화의 노나라 사람 눈으로 볼 때는 관중은 염치를 모르는 뻔뻔스러운 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제나라 재상이 된 관중은 바다를 낀 국토의 이로움을 살려 중상정책을 펼쳤다. 관중의 정책특징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백성들을 가멸게 만든 후 정치를 한다는 경제사상에 있었다.
그는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이유를 생산부진, 권력층의 착취, 토족의 겸병, 사치, 낭비, 금융유통의 정체, 재물 유출 등으로 진단하였다. 그의 경제정책은 상공업의 진흥, 소금, 철 등 주요 물자의 생산관리, 국가재정의 절약, 유통물가의 조절, 분배의 균형, 그리고 세제확립을 꼽았다.
관중은 특히 대외무역을 촉진하기 위하여 외지 상인과 여행객을 우대하는 각종 시책을 실천하였다. 심지어 관중은 무역상들의 '나이트 라이프'를 위하여 미녀 300여 명이 서비스하는 공창을 설립하였다. 공창은 중국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초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이른바 '섹스산업 경제특구'를 그는 벌써 기원전 7세기에 설치하였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는 매우 조숙(?)하였다는 일각의 평가에 관중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제 환공 35년(기원전 651년), 제후들을 규구(葵丘: 지금의 허난성 蘭考)에 집결시켜 놓고 회맹(會盟)하였다. 사상 최초의 회맹의식은 관중이 무대 뒤에서 기획과 집행의 일체를 총괄하여 이루어졌다. 제 환공은 천자에게 배례를 올림으로써 춘추시대 초대 패자가 되었다. 회맹 제3조에는 '각국은 상인과 여행객을 위해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여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관중은 '관자'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의식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 즉 의식이 만족스러운 생활의 안정이 있어야만 저절로 도덕과 예절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관중을 공자는 소인이라고 비난했다(然孔子小之:연공자소지―'사기''관안열전')
공자는 관중이 제 환공을 잘 보필하여 왕도(王道)를 실행하지는 않고 패자로서의 이름만을 떨치게 한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공자를 물먹인 안영**
<23-2 사진> 산둥성 제2의 도시 칭다오
제 환공-관중은 드림팀이었다. 그 드림팀이 가고 나자 제나라는 잠시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제 경공(景公)-안영(安嬰)팀의 출현과 더불어 제나라는 제2의 전성시대를 구가하였다.
안영은 지금 산둥성 칭다오(靑島) 해변 가까이의 가오미(高密)가 고향이다. 안영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고서도 밥상에 육류는 한 가지로 제한하였다. 또 그의 첩은 비단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안영은 조정에 나아가 있을 때는 왕의 물음이 있으면 성의를 다하여 대답하고 물음이 없을 때는 바르게 행동하려고 힘썼다. 국정이 바르게 되어갈 때에는 왕의 명령을 따르고 바르지 않을 때에는 명령의 옳고 그름을 가려서 옳다고 생각되면 실행하였다.
또한 안영은 제자백가들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수도 린쯔의 남문 직문(稷門) 옆에 저택을 지어 열국의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여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학문을 연구하고 논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직하학(稷下學)으로 제자백가의 연구를 모두 허용하여 자유로운 토론과 경쟁을 활발하게 전개시켰다.
제나라 재상 안영과 노나라 철인 공자는 같은 시대인물이었다. 공자는 그가 보기에 매우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제나라의 사회풍조를 교화시키려고 제 경공을 만났다. 그리고 "제나라가 한번 변하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변하면 도에 이른다"고 진언했다.
공자는 또한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정치는 재물을 아낌에 있다"라는 사상으로 경공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경공은 공자를 니계전(尼溪田)에 봉하려고 했으나 안영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안영은 제나라의 실용사상으로 노나라 공자의 이상주의를 신랄히 비판했다.
"무릇 유학자들이란 능글맞고 익살맞아 법을 옳게 집행할 수 없다. 자기만 잘난 맛에 사는 자들로서 오만하니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또 파산을 마다하며 장례만 후하게 지내고 곡하는 데에만 능하니 풍속을 다스릴 수 없다. 번드레한 변설로 재물을 빌려달라고만 하니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어진 현인들이 사라진 후 주 왕실은 이미 쇠퇴하고 있으며 예악도 사라져버렸다. 지금 보기에 공자는 용모와 복장을 잘 치장하고 번잡스런 예절만을 추구하고 있다. 왕께서는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시려거든 반드시 먼저 백성들의 생업을 살피시길."
안영은 공자를 현실과 동떨어진 형식주의자 망상가로 규정하고 직격탄을 퍼부었다. 결국 공자는 안영의 조롱과 배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실과 공자가 안영의 선배격인 관중을 소인이라 비판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지? 좀더 연구해야만 할 것 같다.
안영의 집은 시끌벅적한 시장 부근에 있었다. 경공이 안영에게 "재상의 신분에 어찌 어중이떠중이들이나 사는 시끄러운 시장에…"라며 이사를 권유하였다. 그러자 안영은 "소인은 시장이 가까워 조석으로 얻는 게 많습니다"라고 사양했다. 시장이 부근에 있어 물건 사기가 편하다는 의미다.
안영이 활동하던 시대의 제나라 수도 린쯔의 차도에는 마차 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가도에는 행인들이 어깨를 서로 부비지 않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사서'에는 전한 때만 해도 린쯔의 가구수는 10만호, 인구수는 50만의 대도시로 수도 장안보다 번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린쯔는 지금 중국의 경제수도 상하이와 비견되는 당시 중국 최대의 상업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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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2인자, 최초의 재벌 자공**
누가 사마천에게 공자의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된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자공(子貢)이 공자를 모시고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아래와 같이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자공은 공자에게 나아가 배운 다음 스승을 하직하고 위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고 조나라와 노나라 지방에서 물자를 축적하였다. 또 시기를 기다려 팔기도 하여 재산을 모았다. 공자 의 70여 명 제자들 중 자공은 가장 부유했다.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기마 수행원들을 거느리며 비단뭉치를 예물로 꾸려 가지고 다니며 제후들과 교제했다. 그러자 그가 찾아가는 나라의 왕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그에게 대등한 예를 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골고루 알려지게 된 것은 실은 자공이 공자를 모시고 따라다녔기 때문이다(子貢先後之也).무릇 천금을 가진 자는 군수와 상대하고, 만금을 가진 자는 왕과 상대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자공은 누구인가? 이제 '사기'를 덮고 '논어'를 펼쳐보자.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여기에 아름다운 옥(玉)이 있는데, 함에 넣어 감추어 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좋은 값에 팔아야 합니까?"
"팔아야지, 팔아. 나는 좋은 값으로 사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부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가난하여도 인생을 즐길 줄 알고, 부자로 살면서도 돈을 의식하지 않고 겸손한 삶에 마음 쓴다면 더욱 좋겠지."
점잖은 고전의 대명사, '논어'에서 공자와 자공의 대화는 주로 '팔고 사고''부자와 가난뱅이' '물류의 흐름' 등 상경계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로 이어지고 있다.
'공자가어'에서도 공자는 자공의 천부적 상재에 거듭 감탄하고 있다.
"자공은 천명의 속박을 받지 않고 장사를 할 줄 아는데 마음먹은 대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자공이 운명의 때를 얻지 못했음에도 재물이 불어나는 것은 물류의 흐름을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음이다."
제나라의 출신 순자도 자공을 높이 받들었다.
"옥이 귀한 것은 희소하기 때문이고 돌이 값어치가 없는 것은 흔하기 때문이다. 보옥을 잘 간직하였다가 귀중품 상인에게 높은 값을 팔라." 즉, '희귀한 물건이 값지다' '값이 오를 때를 기다려 판다'라는 상업의 2대 원칙을 자공은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자공은 축재 수단이 대단한 공자의 제자였다. 자공은 시세를 보아 물건을 매매하여 이익을 챙기는 것을 좋아하여 때를 보아 그때그때 재물을 굴렸고 집 안에 천금을 쌓아두었다.
중국의 재벌은 춘추시대부터 등장했으며 중국 최초의 재벌은 자공이었다. 자공은 재산을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공자가 주유천하할 때 경비의 대부분을 대었다. 요새 말로 산학협동인 셈이다. 만약 자공이 돈을 대지 않았으면 공자의 주유천하는 가능했을까? 역시 사마천이다. 그의 지적은 정곡을 깊이 찌른다.
공자가 병이 들자 자공이 뵙기를 청했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에 의지하여 문 앞에 거닐고 있다가 외쳤다. "자공아, 왜 이리 늦게 왔느냐?"라고 반기며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지는가/ 기둥이 무너지는가/ 성인이 죽어간단 말인가."
공자가 죽자 다른 제자들은 3년상을 치르고 떠났다. 그러나 자공은 6년 동안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후 자공은 제나라 땅으로 건너가 말년을 보냈다.
'논어'에서 협객출신 자로(子路) 다음으로 제일 많이 출현하는 제자는 자공이다. 자공은 이재뿐만 아니라 변설에도 능하고 외교능력도 탁월하여 공자에게 종묘에 쓰이는 귀한 그릇 '호련'(瑚蓮)이란 칭찬을 들었다. 아마 공자가 왕이었다면 제2인자 자리, 즉 총리직 또는 비서실장은 자공에게 맡기지 않았을까?
중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제1인자와 제2인자의 결합으로 전개되어 왔다. 제2인자의 전형과 전통을 세운 강태공, 관중, 안영, 자공, 제갈공명 등은 모두 중상주의의 제나라 땅 출신이거나 그 땅에서 활약했던 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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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산둥을, 중국을 잠들게 하였나**
지금 산둥성의 약칭은 제(齊)가 아니라 노(魯)다. 산둥성의 성도 지난(濟南) 역시 노나라 땅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2,100여 년 전에는 제가 노를 철저히 압도했다. 적어도 '백가를 배척하고 오직 유학만을 존립시킨다'는 한무제의 유교 국교화 조치 이전만 해도 제의 실리가 노의 명분을, 중상주의가 중농주의를, 바다의 개방성이 내륙의 수구성을 제압해왔다.
기원전 134년, 동중서(童仲舒)는 한무제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육예(六藝)의 과목이나 공자의 학술에 들어있지 않은 것은 모두 그 도를 끊어버려 함께 나아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한무제는 동중서의 이 '어리석은' 건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천하의 명군이라 하는 한무제는 참으로 '어리석게' 제자백가를 제치고 유교사상만을 독존케 하는 문화적·사상적 유일 정책을 채택하였다. 노나라의 유학사상은 중국 통일 봉건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안정시켜 중국사회가 봉건사회의 발전 법칙에 따라 상대적으로 안정된 전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적극적 의미가 담겨있긴 하다. 그러나 유학사상의 교조주의화, 국교화로 중국은 사회 전체가 완고한 수구의식 밑에서 창조적인 원동력을 잃고 자기 자신을 검토해서 반성하거나 자신을 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한무제-동중서팀은 활발한 생명력과 합리주의적인 학술 정신에 빛나던 제자백가사상에 초강력 수면제를 먹였다. 오로지 노나라의 유학사상, 그것도 가부장적 가족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에 적합한 부문만 살리고 그 외 모든 위대한 학술과 사상, 즉 묵가 ,도가, 법가, 음양오행가, 명가(名家), 병가(兵家), 잡가 등을 잠들게 하였다.
제나라 직문에서 이른바 직하학으로 동화적 통합을 이루었던 제자백가사상은 공리공담이 아니었다. 대부분 정치, 경제, 도덕, 처세, 과학, 군사, 외교 등 현실생활 등을 다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심지어 현대의 민주정치이론, 중상주의 경제이론,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컴퓨터의 이진법 원리, 실존철학 등의 불씨를 엿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후세의 한나라의 훈고학, 송나라의 성리학, 명나라의 양명학, 청나라의 고증학 등을 따지고 보면 실은 노나라 관방유학의 테두리 안에서의 해석을 일보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과거의 답안지 작성에 '팔고문'(八股文)이라 일컫는 일정한 서식을 정하여 과거지원자로 하여금 그대로 암송에만 열중케 하여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을 고갈시키고 유학의 고정화를 가져왔다. 중국의 지성은 그 탁월했던 창조력은 버리고 퇴행적인 노인성의 기억력에만 의존하였다.
진시황은 유생들을 생매장했지만, 한무제는 그들의 입을 꿀로 막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였으나 엉성한 데가 있어 그 폐해는 20, 30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의 국교화 조치는 분서갱유보다 세련되고 온건한 점은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교활하고 완벽하여 언론과 사상과 학문계에 서서히 목을 조르며 는 지능적인 살해범처럼 잔인하여서 그 폐해는 무려 2천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예수의 탄생을 전후로 기원전, 기원후로 나누듯, 중국의 발전사도 한무제가 유학의 국교화 조치를 내리던 기원전 134년을 전후로 중국이 깨어나 있던 시기, 잠들었던 시기로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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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의 영광을 다시 한번**
비단 산둥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2000여 년간 중국 대륙은 명분의 노(魯)가 실리의 제(齊)를 압도해왔다. 노 일변도였다. 강태공은 낚시질하며 때를 기다렸다는 고사만 남아 있지 그가 30여 년간 백성과 고락을 같이하며 정육점 주인과 식당 주인을 겸했다는 땀과 눈물의 내력은 감추어져 왔다.
그러한 사실이야말로 중국 제2인자의 모델을 형성한 강태공의 가장 자랑스러운 경력이자 밑천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관중은 포숙과의 우정만 부각되어 관포지교로 알려져 있지 관중이 얼마나 선진적이고 현실적인 중상주의와 부국강병책을 펼쳤는지, 공자의 수제자는 애오라지 찢어질듯 가난해 영양실조로 죽은 남산골 샌님풍 안회로만 기억되었지 풍부한 재정력을 바탕으로 펼친 외교수완의 기재, 자공은 공자의 제자서열에서도 한참 아래 순위로 잊혀져 왔다.
아아, 부질없도다. 모든 회상은…… 오늘의 현실로 돌아와 가까운 주변을 살펴보리라.
지금 베이징 시내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외지차량 번호판은 무엇일까?
중국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기'(冀)라 씌어진 허베이(河北)성 차량이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울이 경기도에 둘러싸여 있듯 베이징은 허베이로 둘러싸여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필자가 알고 지내는 신화사(新華社) 기자 장자이중(姜在忠)이 오랫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베이징 시내를 돌아다니는 외지차량 중 제일 많은 차는 산둥 번호판 '노'(魯)자를 단 차량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산둥성의 성도 지난 시 번호판 '魯A'를 단 것보다는 칭다오의 '魯B', 옌타이(煙台)의 '魯C', 쯔보(淄博)의 '魯D', 웨이팡(坊)의 '魯F', 웨이하이(威海)의 '魯G'가 압도적으로 많단다. 이들은 모두 경제가 발달한 옛 제나라 지방, 즉 산둥 동부 해안지역에 위치해 있는 도시들이다.
이런 내용을 접하게 된 필자는 '정말 그럴까'하고 일부러 눈여겨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껏 확인해 본 바, 장기자의 말은 조금도 과장됨이 없었다.
이들 동부 해안지역 도시들은 2001년 산둥성 전체 주민 총소득의 80퍼센트 이상을, 산둥성 수출 총액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산둥성 공상국(工商局)에 따르면 2001년 말 현재, 산둥의 실제 등록 외자기업 중 한국기업이 3천6백62개로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85퍼센트 가량인 3천1백23개 기업이 옛 제나라 지역, 즉 동부 해안지역에 집중 진출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산둥을 여행하는 우리 나라 관광객의 약 70퍼센트 가량이 지난-타이산(泰山)-공자의 고향 취푸(曲阜)- 맹자의 고향 조우청(鄒城)을 하나로 잇는 이른바 옛 노나라 유교유적지 여행코스에 집중되어 있는 실상과 비교하면 매우 재미있다. 공자의 우등생(?)이라서 일까? 한국 사람들은 주로 사업은 제나라 땅에서 하지만 관광은 노나라 땅에서 하고 있다.
1970년대 말, 중국은 개혁개방의 대장정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명분과 수구에서 실리와 개혁개방으로 방향을 튼 대전환점이었다. 또한 그것은 중농주의로 상징되는 노나라의 관방유학 이념에 의해 오랜 세월 찌들고 옭매였던 중상주의 제나라의 실사구시 정신이 눈뜨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괘명이었다. 관념의 짙은 안개를 헤치고 경험의 풋풋한 해양으로 나아가는 닻을 올렸던 것이다.
산둥성은 1980년대부터 중농의 '노' 체질에서 중상의 '제' 체질로 차츰 몸을 만들어가더니만, 1992년 한중수교를 전후하여 "한국을 추월하자"를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새 천년에 들어서더니 산둥성은 여기에다 구호 하나를 후렴으로 더 추가했다.
"2,000년의 영광을 다시 한번(再來一次兩千年的光榮)!"
<23-6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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