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콰이**
“콰이, 콰이, 콰이콰이콰이(快, 快, 快快快)!"
1990년대 초 ‘만만디’(慢慢的 : 느릿느릿)의 나라 중국의 어느 밤이다. 도시 변두리의 허름한 한 건물 안에서 디스코 리듬의 흥겹고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콰이, 콰이, 콰이콰이콰이!”
젊은 남녀 수십 명의 격렬한 춤동작이 광란에 가깝다. 강렬한 디스코 리듬을 타고 후렴구는 질주한다.
“콰이, 콰이, 콰이콰이콰이!”빠른 속도로 켜졌다 꺼졌다 숨가쁘게 번쩍이는 조명도 없는 걸 보니 댄스홀이나 디스코텍은 아닌 것 같다. 대관절 거기는 어디고 그들은 누구더냐?
염색공장이고 그곳의 공원(工員)들이다. 춤추면서 공원들은 일을 하고 있었다. 맨발에다 물감을 바르고 커다란 천 위에 올라가 디스코 리듬에 스텝을 밟으며 염색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진페이(진김비:陳金飛)라는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사장과 젊은 공원들이었다.
그때‘콰이콰이콰이’ 디스코 맴버들 대부분은 2002년 현재 베이징 통산(通産)그룹의 임직원으로 건재하다.
천진페이 회장은 중국의 옛말 ‘환난을 같이 했다고 행복도 같이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라는 말에 굉장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고단했던 창업시절, 그들은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3교대제를 실시할 형편도 못되어 사장 이하 모든 공원들은 철야작업을 하였다. 졸음을 정 못 견디면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한 겨울 추위를 타는 여공들은 마대 안에 들어가 잠을 재촉하다 눈을 뜨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장이나 말단공원이나 월급은 똑같이 40위안. 인플레를 감안하더라도 최저생계비에도 미달하는 박봉의 박봉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자 사자 일했다.
당시 천진페이의 소박한 소원 한 가지는 “열심히 회사를 꾸려서 적어도 나와 같이 일하다가 굶어죽었다는 원망은 듣지 말아야지”였다. 시간은 흘러 소박한 소원이 강렬한 책임감으로 승화되었다.
“나에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여 모두다 내 곁을 떠나더라도 이들만은 결코 떠나게 해서는 안 되지요. 전문경영인은 고액의 보수를 주어 초빙할 수 있지만 창업 때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들은 천만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존재”라며 평소 근엄한 표정의 천진페이지만 이 말을 할 때만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더 잇지 못하곤 한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고 뒤를 따라준 사람에게 출세했을 때 돌봐주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이고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먹여 살려야 할 식솔들이 많다면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멀리 날려면 몸이 가벼워야 한다. 통산그룹은 제2의 비상을 해야 했다. 다른 기업처럼 전문경영인의 수혈이 절실했다.
그러던 2000년 9월 수도강철공사의 사장을 역임하였던 전문경영인 자오위지(조옥길:趙玉吉)를 부회장 겸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천진페이 자신은 마흔도 채 안 된 젊은 나이가 아쉽긴 했지만 사장직을 내놓고 회장으로 물러났다. 창사 원년 직원들도 대부분 경영 2선으로 퇴진하는 대신 부회장으로 승진(?)되었다. 지금 통산그룹의 부회장 수는 자오위지 사장을 포함하여 무려 1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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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놓은 매미의 허물**
천진페이는 앞서 말한 천진이(陳金義)와 함께 중국의 개혁개방시대가 낳은 민영기업가로서 이름도 맨 끝자 ‘義’와 ‘飛’만 다르고 같다. 나이도 한 살 차이고 기업경영방식도 흡사한 면이 많다.
다만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이라면 각자 사용한 비장의 계략이다. 천진이가 고육지계를 쓴 반면에 천진페이는 금선탈각(金蟬脫殼)을 사용했다. 금선탈각은 매미가 아무도 모르게 허물을 벗어버리고 날아가듯 원형을 그대로 두고 알짜를 빼내는 전략이다.
진지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위세(僞勢)를 보임으로써 아군에게는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적에게는 침공할 용기를 갖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쪽에서는 은밀히 주력부대를 이동시킴으로써 적을 우롱하는 계략이다.
금선탈각은 원래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쟁투전에서 비롯된 말이다. 유방은 항우의 군사에게 성을 포위당해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유방은 동쪽 성문으로 부녀자들을 나가게 하였다. 그러자 적병들이 구경하려 우르르 몰려든 틈을 타서 서쪽 문으로 탈출했다. 항우가 성안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유방은 도망을 친 뒤였다.
금선탈각은 중국의 상경계에서 매우 광범하게 응용되어왔다. 채권자가 밀린 빚을 받으러 회사 사장실로 급습했을 때 오너 또는 실세의 권력자는 자리를 살짝 피하고 얼굴마담을 앉혀놓고 대처하는 수법이다. 그리고 같은 상품을 포장만 보기 좋게 바꾸거나, 브랜드만 바꿔 파는 식의‘몸값’을 인상하는 수법 등, 주로 악덕 상술에 이용되어왔던 금선탈각을 천진페이는 비교적 합법적, 합리적으로 유효 적절히 활용했다.
그는 ‘개국공신’들인 친인척을 한칼에 척결하여 신드롬을 일으켰던 천진이와는 달랐다. 우선 천진페이는 창업단계부터 친인척을 회사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럽게 하지만 과감하고 신속하게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이루어냈다.
전문경영인에게 사장직을 양도했지만 천진페이는 여전히 명실상부한 통산그룹의 실권자다. 천진페이가 영입사장을 17명의 부회장 중 한 명으로 겸직시킨 것은 얼른 보면 그에게 감투를 하나 더 안겨주어 더욱 높여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회장 자신의 17명의 부하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명시해주는 것이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큰 조류를 천진페이는 마치 매미가 알짜만 빼내고 허물을 벗어버리고 날아가듯 노련하게 타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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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바이어**
천진페이는 1962년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우체부 생활을 잠시 경험한 그는 1987년에 조그만 인테리어 회사를 하나 차렸다. 사무실 겸 공장의 위치를 베이징 교외의 시골 가오베이디엔(고비점:高碑店)의 한 돼지우리 뒷켠에 잡았다.
하필이면 돼지우리 뒤였을까? 누군가 그 곳 땅 밑에는 수만 개의 흙벽돌이 묻혀 있다고 해서 그랬다. 회사 건물을 짓는 데 설계도도 건축기사도 없었다. 사장과 직원들이 일치합심하여 자율적으로(?) 지었다. 건물 벽이야 흙벽돌을 파내어 쌓으면 그만이었지만 창문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결국 그렇게 쌓아올린 건물은 앞의 돼지우리와 별반 차이도 없는 모습을 드러냈다. 사무실용 책상은 쓰레기장에서 주어왔다. 사장의 책상은 40센티미터 높이의 원추형으로 서류를 놓으면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와 ‘요술 책상’이라고 불렀다. 또 널빤지 하나를 구해 그걸로 지면에서 20센티미터 가량 높은 걸상을 여섯 개나 만들어냈다.
회사에서 제일 사치스러운 집기는 역시 주어온 구식 대나무 의자 한 개였다. 그렇지만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자리였다. 공상국(상공부)이나 세무서 관리들과 혹시 언젠가 올 지도 모를 외국 바이어 전용이었다.
돈이 없어 기계를 살 수도 없었다. 쇠붙이를 구해 도해집을 보아가며 적당히 비슷한 기계를 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작업은 수공으로 이루어졌다. 사무실과 공장과 시설은 웬만큼 갖추어졌는데 일거리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사장과 직원들은 매일 자전거를 타고 일거리를 찾아다녔으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 수더분한 사람은 백수건달이나 다를 바 없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과격한 사람은 쌍소리를 해대면서 파리떼 내쫓듯 쫓아버렸다.
사업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맨 처음 맡은 일거리를 평생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천진페이에게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 농단(農壇)체육관에서 따내온 일이 바로 그렇다. 베이징의 한 고등학교 농구팀의 추리닝 상의 일곱 벌의 등번호를 찍는 거였다. 직공들과 함께 10분도 채 못 되어 다 찍어냈다. 35위안이 손안에 들어왔다.
회사건물을 완공한 지 1개월만의 쾌거였으나 그것도 잠시 잠깐. 기약 없는 실업상태에 다시 빠졌다. 연방 한숨을 내쉬었으나 용기는 잃지 않았다. 모두들 새파랗게 젊은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돼지우리 뒷켠 건물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외국 바이어가 제 발로 직접 찾아들어 온 것이다. 게다가 그 바이어는 금발에 푸른 눈의 미녀로 캐나다의 방직제품 수입상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백설공주와 다름없었다. 백설공주는 사내 유일의 VIP 석인 그 대나무 의자로 모셔졌다. 사무실에는 스팀은커녕 난로 하나도 없었고 창틀과 창문이 맞지 않아 틈새로 찬바람이 술술 들어왔다. 백설공주는 엉덩이가 시려 의자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추웠던지 급기야 숙녀로서의 스타일과 체면을 돌볼 겨를도 없이 백설공주는 대나무 의자 위로 날름 올라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다가 무릎이 아프면 의자 위에 선 채로 상담을 계속했다.
아마도 그녀 평생에 그처럼 악조건의 상담장소는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진페이는 지금까지도 그 미녀 바이어가 무엇 때문에 그와 계약을 체결했는지 잘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마도 운수였겠지.”
상담에 성공한 계약금으로 10만여 달러가 들어왔다. 당시 그들에게는 가히 천문학적 숫자라 할 만한 거금이었다.
1993년 천진페이는 베이징 최초의 민간그룹인 통산그룹을 창설하게 된다. 그가 그룹의 주력업종을 건축과 건자재로 정하고 특히 콘크리트 블록 제작에 정력을 쏟은 이유는 아래와 같은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독일, 일본 등 선진국의 콘크리트 블록은 건자재 벽돌의 약 30, 40퍼센트에 이르나 중국의 그것은 0.5퍼센트에 불과하다. 중국은 매년 약 7천억 개의 흙벽돌을 제조해내는데 약 10여 만 마지기의 농경지를 훼손하고 있다. 세계 7퍼센트의 농경지로 세계 인구의 22퍼센트를 먹여살려야 하는 중국의 토지자원은 갈수록 귀중해질 것이다. 경제발전이 가속화됨에 따라 농수산 분야와 건설교통 분야가 서로 땅을 가지고 싸우는 모순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반면에 콘크리트 블록을 비롯한 신형 건자재 시장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펼쳐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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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뉴욕 무역상담기**
1999년 1월 어느 날, 9.11 테러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뉴욕의 세계무역센타(WTC)의 한 사무실이다. 중국인 바이어들이 고효율의 생산라인을 구매하기 위하여 미국인들과 상담하고 있었다. 미국 측은 시종일관 중국 측에게 오만한 자세를 취했다.
‘그래, 선진국의 최신설비를 입수하려는 개발도상국민은 어떠한 굴욕도 감수해야지.’
상담은 매우 빠른 속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나절도 못 되어 구매계약서의 서명단계까지 왔다. 미국 측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중국 측 대표는 계약금조로 미국 측에게 중국은행 뉴욕 지점 발행 수표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미국측은 수표를 땅바닥에 내던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중국 수표는 필요 없어! 너희 중국인의 수표는 전부 가짜잖아, 너희들에게 이런 값싼 가격으로 최첨단 설비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흑인깡패에게 강도당하는 게 낫겠다.”
그러자 중국 측 바이어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맨 말석에 앉아 혼자 씩씩거리던 자였다.
“에잇, 버릇없는 양키녀석들, 수표를 어서 땅바닥에서 줍지 못해!”
깜짝 놀란 미국인은 바닥에서 수표를 주어들고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미안하다. 자, 우리 서명하자!”
미국 측은 계약서에 서명한 후 테이블 중앙에 앉아있는 중국 측 대표에게 건넸다. 그러나 예의 강경파 중국인은 계약서를 낚아채고 다시 소리쳤다.
“당신은 자신의 행위에 대가를 치러야 해!”
그는 미국인 코앞에 계약서를 갖다대고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혼자 가방을 챙겨들고 협상장 문을 박차고 사라져버렸다. 미국 측은 생각 같아서는 ‘이런 야만적인 중국인들’과의 협상을 깨고 싶었다. 그러나 중국 측 바이어 대표의 정중한 사과의 표시와 함께 자신들도 좀 심하게 중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느낌도 들었기에 협상을 지속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약체결단계까지 이르렀던 그 협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버리고 방금 전과는 달리 무척 느리게 진행되었다.
“톱질하세 톱질하세…”
톱으로 박을 켜는 듯한 지루한 협상이 며칠 간 지속되고 있던 그 무렵, 베이징 대형 일간지 ‘베이징완바오’(북경만보:北京晩報)에는 ‘뉴욕에서의 한 무역상담 실패기’라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다.
“재산은 개인적 속성과 국가사회적 속성의 이중성을 지닌다. 전자는 개인이 재산을 소유만 할 경우에, 후자는 그 재산을 국가사회에 투자 할 경우에 뚜렷해진다. 장사치는 전자에 신경을 많이 쓰는 반면 기업가는 후자에 보다 많은 정력을 기울인다. 나는 이번 뉴욕에서의 상담과정에서 받은 수모를 통해 국가의 존엄과 개인의 영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진리를 체득하였다. 국가가 부유하여야 국민도 강해진다. 열심히 일하는 길만이 국력을 강화할 수 있다. 개인의 존엄도 나라의 위신도 실력에서 나온다.”
이 기고문의 말미에는 기고자의 신분과 성명이 적혀 있었는데 ‘통산그룹회장 천진페이’였다. 계약서를 찢고 협상장 문을 박차고 나온 자는 말단 실무자가 아니라 최고책임자 천진페이였던 것이다. 기고문이 신문에 등재된 그 다음날 뉴욕의 통산그룹 협상팀은 협상실패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전격 철수하였다.
통산그룹 회장 사무실 왼쪽 벽에는 마오쩌둥의 시대별 대형 사진이 9폭이나 걸려 있고 오른쪽 벽에는 마오쩌둥의 어록이 쓰인 족자가 9개나 걸려 있다. “모든 적들이 그를 압도하려고 하지만 그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사람과 땅과 하늘과도 맞서 싸우는 이 무궁한 즐거움이여!”
마오쩌둥의 사진과 어록을 좌우 배경으로 한 사무실에서 써서 그랬는지 마오쩌둥의 백절불굴의 의지와 신출귀몰한 전략이 배어있는 듯한 천진페이의 글은 중국 각계로부터 뜨거우면서도 잔잔한 동정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999년 6월 2일. 주 유고 중국대사관 폭격사건(1999.5.7)으로 불붙은 미국에 대한 적대감의 열기가 초여름의 햇살을 압도하고 있던 시기였다. 쟈칭린(가경림:賈慶林) 당 정치국원 겸 베이징 시 당서기가 통산그룹의 공장을 시찰하였다. 전체 공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한 연설에서 그는 통산그룹의 신형 건자재 개발에 대한 당과 정부차원의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다. 베이징 시의 넘버원이 일개 민영기업에 시찰을 나가고 격려연설까지 한 일은 전례를 찾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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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역상들은 협상시 강경파와 온건파 2개 팀으로 구성, 밀고 당기는 전략을 병행하여 계획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술수에 능하다. 그들은 우선 협상 전에 획득할 목표를 정해 놓고 강경파 역할과 온건파의 역할을 각각 담당한다. 뉴욕의 협상에서 미국 측은 중국 측의 이같은 계획적인 역할 분담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제일 말단인 듯한 그 강경파가 실제는 최고결정자였음을 몰랐다. 또한 그가 아직도 마오쩌둥을 숭배할 만큼 정치성과 자존심이 강력한 베이징 출신이라는 점은 더욱 몰랐다.
금선탈각은 단순히 도망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적과 싸움을 계속하면서 몰래 알짜를 다른 곳으로 은밀하게 빼돌려 적의 후방을 기습하는 계책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매미의 ‘알짜’는 진작에 베이징의 본거지로 되돌아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미국 측은 뉴욕의 협상테이블에서 며칠 동안이나 매미의 ‘허물’만 마주보고 앉아 있었으니, 그야말로 헛물만 마시고 만 꼴이 되었다.
금선탈각으로 천진페이는 날개를 얻었고 통산그룹은 제2의 비상을 거듭하였다. 2001년 말 현재 통산그룹은 중국 콘크리트 블록 시장의 3분의 1을 선점하고 있으며 텐진 난징 따리엔 삼협댐 등지에 10개의 생산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천진페이 회장의 재산은 8년 전 그룹 창설시의 2백배를 초과하는 미화 2.16억 불로, 베이징에서는 제1부자, 중국 전체 부자 서열로는 12위에 랭크되어 있다.
***만만디는 없다**
매미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하고자 한다. 중국을 두고 흔히 만만디(慢慢的)라고 부른다. 아직도 중국인하면 먼저 느리다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제 중국은 만만디가 아니다. 콰이콰이다. 그것도 여유만만한 콰이콰이다.
2001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95,800억 위안으로 1979년 개혁개방 이전의 GDP보다 30여배가 증가되었고 매년 평균 9퍼센트의 높은 성장률을 보여왔다. 2001년 총수출액은 미화로 2,662억 불로 1979년에 비해 1백20배나 증가하고 매년 평균 15퍼센트의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것 말고도 중국이 만만디가 아니고 콰이콰이인가를 예로 들자면 한이 없다. 필자가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면서 몸소 체험을 통해 얻은 것만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아마 한달 밤낮(?)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래서 사회간접자본(SOC) 중에 속도와 관련된 두 가지, 즉 고속도로와 철도만 살펴보겠다.
1994년 말 중국의 고속도로 총 길이는 약1천9백 킬로미터로 세계 21위였다. 2001년 말 그것의 총 길이는 약 1만 9천킬로미터, 미국을 이은 세계 제2위다. 불과 7년 만에 고속도로 총 길이는 10배나 길어졌고, 순위는 19계단이나 뛰어올랐다. 1994년 중국 특급열차의 평균속도는 시속 80킬로미터였고 베이징에서 상하이(약1천4백50 킬로미터로 우리나라 경부선의 3배가 넘는 거리)까지 20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평균시속 1백29 킬로미터이며 12시간이면 족하다.
2주 가량의 지상에서의 삶을 위하여 매미는 어두운 땅속에서 6, 7년간을 유충상태로 보낸다. 개혁개방 이전 중국의 매미는 만만디의 유충상태였다. 그러나 유충상태에서 날개 달린 매미가 되기까지는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고 다시 유충상태에서 막 벗어난 초록색 매미가 검은색 매미로 변해 우화(羽化)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이면 족하다. 유충시절은 만만디지만 유충에서 날개 달린 매미까지, 거기에서 다시 우화까지는 줄곧 콰이콰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하라”의 금선탈각은 병법서상의 군사전략이나 상경계에서 활용되는 경영전략만이 아니다. 한마디로 중국의 국가발전전략 또는 국가발전상황 그 자체다.
벗어놓은 허물만 보고 중국은 가짜니, 껍데기에 현혹되어 속았느니 어쩌니 저쩌니 탓하지 말일이다. 유충상태의 과거만 보고 중국인은 만만디라고 평하지 말 일이다. 아직도 중국이 만만디로 또는 가짜로 보이면 그것은 아직 유충상태의 잔상이거나 또는 매미가 날아가버리고 남겨둔 허물을 본 것일 뿐이다.
중국의 매미는 오래 전에 유충상태를 벗어났다. 아무리 낮게 보더라도 우화하기 위하여 습기에 찬 날개를 말리고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니, 그것은 이미 공중 저만치 날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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