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혔다**
1997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금의그룹은 갑자기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천진이 신드롬'에 힘입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금의그룹의 그 해 매출액은 전년에 비해 40퍼센트나 급감하였다. 한마디로 심각한 슬럼프였다.
왜 슬럼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는가? 유능한 기업가는 이런 어려운 난관 앞에 우선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천진이는 슬럼프의 원인을 '3대 모순'에서 찾아냈다. 첫째는 친인척과 친인척이 아닌 직원 간의 모순, 둘째는 회장 가족과 회장 부인 가족 간의 모순, 즉 친척과 인척간의 모순, 셋째는 같은 친인척 내부의 형제자매간의 모순이었다.
"곤란은 곤란이 아니라 기회"라고 기염을 토하던 천진이는 몇 달 간 극심한 의기소침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회사의 경비원 하나는 회장 처가 쪽으로 먼 친척이었다. 어떤 직원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자 목을 뒤로 젖히고 큰소리로 대들었다.
"나는 이 회사 회장 사모님의 친척이야, 굴러온 돌이 감히 박힌 돌을 빼려들다니, 이런 시건방진 것들 같으니라고."
천진이는 1년 사이에 매출액을 전년대비 1백50퍼센트를 올린 모 지사장 하나를 본사 부사장으로 영전시키려 했다. 그 지사장은 기뻐하기는커녕 제발 그 자리에 그냥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본사로 영전되면 거기 횡행하는 친인척들의 발호와 분규에 휘말릴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숨이 막혔다. 30여 명의 친인척들이 구렁이처럼 회사의 숨통을 칭칭 또아리를 틀어 감고 있었다. 친인척들은 창사 초기부터 회장과 한솥밥을 먹으며 공로를 세웠기는 하다. 그러나 한 단계 더 성숙한 기업으로 성장을 위해서는 그들은 '장애물'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자질이 부족한 친인척이 고위층에 군림하고 있는 상황은 기업 이미지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외부에서 영입한 우수한 인재들을 경계하고 조직적으로 외부 인재의 발탁과 중용에 저항하였다. 어렵사리 초빙해온 인재들도 하나둘 씩 회사를 등지게 만들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했다.
사정이 이러니 신기술 신제품 개발은 사치스러운 어휘가 되었다. 친인척을 중용하여 우수한 인재를 붙잡을 수 없는 가족식 경영은 현대 기업경영에 맞지 않는 것이다. 천진이는 1998년 3월 중국 최대 규모의 대학인 항저우의 저장(浙江) 대학에 금의그룹의 정밀경영진단을 의뢰하였다.
***제2차 천진이 신드롬**
1998년 5월 22일 저녁 금의그룹 회장 겸 사장 천진이는 비상 확대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30여 명의 친인척이 빠짐없이 모였다. 천진이는 인사말도 생략하고 곧장 폭탄선언을 했다.
"저는 지금 이순간 사장자리에서 물러납니다. 회장자리만 보류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지금 당장 사표를 제출하여 주십시오."
친인척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회장의 입에서 한번 '쾅'하고 터진 폭탄선언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명중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집중포화를 가했다.
큰형은 일선에서 물러나되 명예 회장직을 수락해줄 것을, 둘째형은 완전히 은퇴할 것을, 셋째형은 비교적 젊으니까 해외 연수와 부장직으로의 강등 중 양자택일할 것을 요구하였다. 엉겁결에 공부라면 질색인 셋째형은 부장직을 택한다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부장은 부사장보다 3계급이나 강등된 자리다.
그런 다음 천진이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부인 샹핑(相萍)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회사의 노른자 자리인 자재부장을 맡고 있었다. 천진이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이 순간부터 자재 부장이 아니오, 아내 직분에만 전념하시오."
"……."
샹핑은 그 자리에서 울부짖으며 강력히 저항했다.
"왜, 내가 자리를 내놓아야 하나요? 당신은 이제 자신의 부인까지도 믿지 못하다니, 미쳤군요!"
천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오, 현재 난 빈사의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리기 위해 수술을 하고 있는 중이오. 모든 걸 나에게 맡겨 주시오."
그 밖의 친인척들도 차례차례 거명되었다. 강등시킬 자는 강등시키고 사퇴시킬 자는 사퇴시키고 연수 보낼 자는 연수 보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조치였다. 친인척 대부분은 어안이 벙벙해 끽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당하였다. 아저씨뻘 되는 한 사람만이 천진이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악을 썼다.
"이 배은망덕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아, 네 눈에는 내가 친척으로 보이지도 않는구나!"
천진이는 차분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은 언제 자신을 회사의 직원이라고 여긴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언제 한번 저를 회사의 사장으로 여긴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우리 회사의 직원으로는 부적격자입니다. 아저씨로 돌아가게 해드린 겁니다."
이 전격적인 조치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집행이 완수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6월 22일 공석으로 남은 사장자리는 전문경영인 부챵(傅强)이 금의그룹의 사장으로 영입되었다. 공개 초빙공고를 통해서였다.
천진이는 또 일을 냈다. 기업주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친인척 대다수를 일거에 경영일선에서 몰아내었다. 완강한 가족주의에 뿌리 깊은 중국 민영기업 역사상 미증유의 사건을 그는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보다 큰 가족을 위하여**
1992년 '1차 천진이 신드롬'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훨씬 더 강력한 1998년 '2차 천진이 신드롬'의 폭풍우가 중국 대륙을 강타했다. 전국 각계각층에 리히터 7 이상의 초강력 지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기 집 앞 눈만 쓸면 됐지 다른 사람 집 기왓장의 서리는 상관하지 말라." 중국인의 가족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혁개방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중국의 민영기업 중 8할 이상은 이러한 가족주의를 기초로 한 가족기업형태였다.
1997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한국이 IMF사태를 맞기 이전만 해도 중국의 경제발전의 모델은 뭐니뭐니 해도 한국과 한국의 대기업들이었다. 2세 경영을 통해 재산을 자신의 가족에게 상속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던 중국의 민영기업가들, 그들에게는 당시 가족주의 경영체제의 한국 대기업(사실 여부를 떠나 그들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들이 매우 좋은 본보기이자 핑계거리가 되어주었다. "전문적 경영체제로의 전환이라니, 그런 거 안 해도 한국은 저처럼 잘만 되고 있는데……."
그러나 1998년 초 당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연구기관들은 "중국이 제2의 한국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며 전망하고 있었다. 한국의 IMF 관리체제로 대표되는 아시아 금융 위기에 따른 중국의 수출부진, 인민폐 불안, 부동산 과잉 투자에 따른 텅 빈 사무실, 부실채권 투성이의 금융권, 실업자 증가, 부패의 만연 등, 중국이 장기 불황으로 들어섰다는 분석이 만연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 경제의 전체 모습은 아니었다.
주룽지(朱鏞基) 총리는 국유기업-행정부-금융 등 3대 부문에 대해 과감한 개혁의 수술을 단행하였다. 중앙 부처의 경우, 공무원의 절반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하였다. '내수 진작을 통한 경기부양' 정책이 채택된 이후 곳곳에서 건설의 굉음이 요란하였다.
인사 단행으로 중앙과 지방정부 중간관리 층은 문화대혁명 세대를 뛰어넘는 30대와 40대 초반의 젊은 엘리트로 채워지고 있었다. 구조조정 과정에 주룽지 총리는 9번의 암살 기도가 있었다는 출처 불명의 괴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구조조정 과정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고 그에 대한 희생양이 필요함을 잘 드러내주는 이야기다.
바로 그때 그 고비에서 민간인 천진이가 나타난 것이다. 천진이의 '기업 내 친인척 방출조치'는 주룽지 총리가 추진하는 구조조정에 극력 저항하는 세력에 맞설 방탄조끼가 되어주었다. 나아가 당과 정부의 개혁조치를 더욱 당차고 탄력 있게 밀고나갈 수 있는 용수철이 되어주었다.
"야, 너희 관료와 국유기업의 책임자들 잔소리 마라. 천진이를 보라! 자기 친형제와 마누라까지 잘라내는 민간기업가 천진이를 보란 말이다!"
제2차 천진이 신드롬이 몰아치는 폭풍우에 정부부문이든 국유기업이든 민영기업이든 좌우지간 그들은 뭔가를 해야 했다. 완전히 몸을 내맡기든지 상체를 웅크리고 피하든지 아니면 따라하는 시늉이라도 하든지 간에, 아무튼 어떠한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천진이 신드롬은 그들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두 차례 신드롬 모두 고육지계의 열매였다. 1차는 자사의 광고효과를 노린 것이었지만, 2차는 제 살을 베어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두 차례 고육지계와 신드롬 모두 시의 적절했다. 고육지계는 천진이의 개인과 기업에, 천진이 신드롬은 당과 정부에 매우 시의 적절했다. 당과 정부는 다시금 '2차 천진이 신드롬'을 무료로(?), 면세로(?), 원 없이(?) 무차별 무제한으로 띄워주었다.
어떤 시인이 말했던가. 사람을 가르치는 건 시간이라고. 시간이 얼마간 흐르자 금의그룹의 친인척들은 차츰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쫓겨났던 그들은 자신의 합리적 위치를 찾아갔다.
천진이의 본래 의도는 기업 내 모든 직원들에게 평등하고 공정한 출발선에서 자신의 총명과 재간을 마음껏 능력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업을 공평하고 투명한 게임 룰이 적용되는 하나의 경기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보호우산을 걷어치우고 철밥통을 깨뜨렸다. 유아독존을 극복하고 의뢰심을 버리는 대신 개혁과 경쟁의식을 촉발시켰다. 기존 고위 간부의 40퍼센트를 감원하였고 우수 인재를 신규로 공채하였다. 1백명의 전문직원의 선발 예정 인원에 전국 각지에서 2만여 명의 대학을 갓 졸업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별도로 수십 명의 석박사로 구성된 기업 발전 전략의 싱크탱크를 설치하였다. 중형그룹으로서는 중국 최초였다.
"금의그룹의 대권은 사실상 외부인사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렸다. 이제 당신은 통제 불능이 아닌가?"
이런 질문에 언제나 정열적인 천진이는 대답한다.
"아니다, 통제 불능이 아니다. 우리 회사는 인치가 아니라 법치로 움직인다. 제도가 제1이고, 인정은 제2다. 효율적 경영도 엄격한 제도 안에서만이 가능하다. 그래야만 오너는 안심하고 마음을 덜 쓴다. 나는 큰 가족, 즉 '기업'을 위하여 작은 가족 '친인척'을 내쳤다. 시장경제 사회는 나의 희생과 개혁에 마땅히 혜택을 돌려 줄 것이다."
지금 금의그룹 천진이 회장은 2001년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 50대 부자(35위)에 들어 있다. 또 2천3백여 명의 임직원들이 그룹 내 5개 계열사와 6개 연쇄점과 4개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사진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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