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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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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16>

신드롬 제조업체(上)-천진이 금의그룹 회장

***돈으로 눈덩이 굴리기**

"이 세상에 편안한 생활보다 더 지겨운 일은 없다. 우리들은 누구도 한가할 권리가 없다. 문명사회는 게으른 자에게는 발 디딜 공간조차도 주지 않는다."(천진이(진금의:陳金義) 금의(金義)그룹 회장)

천진이라는 중국의 한 기업인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그가 단순히 중국 개혁개방의 시대가 일궈낸 한 그루 거목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현대 중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천진이 신드롬(現象)'을 연거푸 두 번씩이나 창조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원래 사회문화적인 의미로서의 신드롬은 어떤 주장이나 사상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현상을 가리킨다. 서태지 신드롬, UFO 신드롬, 허준 신드롬, 왕건 신드롬 등등 별의별 이름의 신드롬이 자본주의 한국에 출몰하여 왔지만 여태 기업인의 이름이 붙은 신드롬은 있었던가? 과문한 탓인지 필자의 머리에는 그게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사회주의체제하의 중국에서, 그것도 민간 기업인의 이름을 딴 신드롬이 두 번씩이나 출현하였으니 이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 토양과 수분 햇볕 등 환경만 적합하면 생명의 씨앗은 발아하고 마침내 거대한 나무로 성장한다. 개혁개방은 중국의 수억 농민에게 경제 발전의 격랑에 투신케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986년 개혁개방의 폭풍우는 물 맑고 숲 푸른 저장성의 통루(桐盧) 산촌에도 불어 닥쳐왔다(필자도 중국 최장의 종류석 동굴을 구경하려고 통루를 지나가 보았다. 거기 풍경은 마치 우리나라의 강원도 어느 산골같이 느껴지는 참으로 맑고 깨끗하고 정겨운 곳이었다).

<16-1 사진>

고교 중퇴 더벅머리 총각 천진이는 몇 년 동안 무허가 소학교의 사환일을 하거나 형들을 따라서 페인트일을 하느라 허비했다. 그러던 그가 단돈 500 위안을 거머쥐고 통루 산촌을 떠난 해는 1986년,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였다. 한 2년간을 일정한 직업도 없이 중국의 거의 절반을, 방랑자처럼 때로는 부랑자처럼 떠돌아다녔다. 1988년 천진이는 친척으로부터 얻어낸 1만 위안으로 항저우 교외에 정착하여 양봉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시간과 여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야간에 차를 탔다. 낮 시간은 일하는데 쓰고 잠자는 시간은 이동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여관비도 아낄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억만장자가 된 지금도 그렇지만 천진이의 생활 철칙은 가장 적은 돈으로 많은 일을 하자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벌꿀과 로열젤리 시장의 금맥을 움켜잡게 된 그는 분투하는 과정에서 '마케팅이란 무엇인가?'를 체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숨어있는 천부적인 상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1989년 천진이는 3만 위안을 담보로 은행에서 6만 위안을 대부받고 이 돈을 다시 담보로 12만 위안을 대부받았다.'눈덩이 굴리기'수법으로 그는 6일 만에 30만 위안의 거금을 은행으로부터 대부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돈으로 눈덩이 굴리기'수법은 1980년대라서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1991년 천진이는 상하이 H기업의 주식을 대량 매입하여 3개월만에 투자금의 20배가 넘는 떼돈을 벌었다. 그렇게 굴려 모은 돈으로 1992년 초 고향 통루 현에 황가(皇家)실업 유한공사를 창사하고 항저우와 광저우에 드링크 가공공장 두 개도 새로 기공했다.

그러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황가실업 유한공사는 깡촌인 통루 현에 본사를 둔 신생 중소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기라성 같은 상하이의 유명 대기업들에 비하면 정말 새발에 피도 아니었다. 자, 어떻게 회사 PR을 하고 또 어떻게 경제 중심도시 상하이에 발을 붙일 것인가?

아무도 그와 그의 기업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았다. 외로웠다. 용케 그를 아는 몇몇 상하이 사람들은 기껏해야 천진이를 증권 투기를 한탕 잘하여 벼락부자가 된 건달 비슷한 자로 취급했다.

그렇다고 투입한 돈에 비해 효과가 의심스러운 신문이나 TV에 거금을 들여 융단폭격으로 광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보 상태에 이르렀다. 노력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생각처럼 향상되지 않기 때문에 흥미를 점점 잃어갔다.

그러나 천진이는 깨어있었다.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 괴롭고 외롭고 아예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싶을 만큼의 환멸을 느낄 때마다 그는 책을 펼쳤다. 천진이의 최고 애독서는 뭐니뭐니해도 '삼국지'. 그 책 속에는 인간관계를 잘하는 법, 싫다는 사람을 설득시키는 법, 큰 밑천 안 가지고도 성공하는 법, 수집한 정보를 선별하여 잘 활용하는 법, 용기를 잃었을 때 다시 두 주먹 쥐고 일어서는 법 등이 실제 이상으로 얼마든지 들어 있었다.

1992년 9월 어느 날 밤 천진이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전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하기만 했다. 천진이는 넘기던 책장을 멈추고 어둠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의 적벽대전에 대한 생각은 그 무렵 베이징과 상하이로부터 각기 입수한 갖가지 사업에 대한 정보의 편린들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도대체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번뜩 한줄기 섬광을 보았다. 순간 눈앞이 확 열리는 황홀감에 몸을 떨었다.

***고육지계와 리콜제**

오나라의 백전노장 황개가 비장한 어조로 주유에게 말했다.
"조조의 대군을 도저히 이길 수 없소. 항복하는 게 좋을 것 같소." 황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력같은 주유의 호통소리가 나왔고 곧이어 황개는 50대의 곤장형에 처해졌다. 살갗이 터져 유혈이 낭자한 처절한 체형이었다. 이 모습을 전해들은 제갈공명은,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하는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쓰지 않고는 조조를 속일 수 없었겠지"라고 했다.

'삼국지'의 클라이막스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계책, '고육지계'가 빛을 보는 순간이다. 어찌 이를 제갈공명이 놓치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몸을 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에 상처를 입게 된다면 그것을 대단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 점을 이용하여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고육지계의 핵심이다. 오나라 주유와 황개가 위나라의 조조를 감쪽같이 속여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 고육지계의 대표적 실례이겠지만 병법의 정수를 모은 책 '삼십육계'(三十六計)에도 고육지계는 미인계와 주위상계(走爲上計:도망가는 게 상책)와 더불어 최상의 기책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전쟁에서뿐만 아니라 고육지계는 중국 사회 각계각층에서 요긴하게 활용되어왔다. 상경계에서의 고육지계는, 한마디로 이익을 말로 받기 위해 손해를 되로 주는 전략이다. 현대 중국인의 비즈니스에서도 고육지계는 쏠쏠한 재미를 낳는 경영방식으로 쓰여지고 있다. 한 가지 예만 들자면 리콜제이다.

즉 자신이 판 상품이 약간의 결함이 있다고 스스로 공개한 다음 결함 상품 전체를 수거하여 교환하거나 환불하여 준다. 고육지계의 고수 중국 상인들은 이러한 '중국 특색적 리콜제'를 통하여 소비자의 관심과 감동을 이끌어내곤 한다.

1992년 10월 정치 중심도시 베이징에서 역사적인 중국 공산당 제14차 대표대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이 생애 마지막으로 출현한 그 대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사회주의 국영기업과 자본주의 민영기업이 공동 발전할 수 있는 시장경제체제를 공식화하였다.

바로 같은 해 10월 15일 오후 2시 경제 중심도시 상하이의 창성(商城)극장은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무대 위에 내걸린 '상하이 황푸(黃浦)구 국영기업 경매대회'의 대형 플래카드는 여기서 곧 발생할 사건을 예시하고 있었다. 오후 2시 45분 드디어 중국 사상 최초의 국영기업 경매의 막이 열렸다.

첫번째, 촨난요우장디엔(천남유장점:川南油醬店). 건축면적 151평방미터, 경매 시작가는 5만 위안, 경매 사회자의 말소리가 떨어지자 경매액을 쓴 팻말이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5만 5천, 6만, 7만, 8만…"
"20만 8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8만 위안에서 느닷없이 20만 8천으로 뛰었으니 장내의 모든 이목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팻말 89번을 치켜든 천진이였다. "20만 8천, 20만 8천, 20만 8천!"경매 사회자는 고함을 지르듯 이 금액을 반복했으나 장내는 조용했다."땅-땅-땅, 89번 20만 8천 위안으로 낙찰!"

두번째, 푸난요우장디엔(포남유장점:浦南油醬店). 경매 시작가는 8만 위안, 이번의 경매는 격렬했다. "12만 5천, 12만 5천…" 모두 37회의 겨룸을 막 끝내려는 순간.
"32만 8천!"
또 89번이었다.

"32만 8천, 32만 8천, 32만 8천 낙찰성공."
천진이는 그날 경매에 올라온 7개 국영상점 중 6개를 혼자서 독차지하였다.

***제1차 천진이 신드롬**

천진이가 경매에 투입한 돈은 모두 300만 위안이었다. 경매 물건의 실제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는 거액이었다. 며칠 간 상하이 거리에는 한 시골 기업인이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제 무덤을 판 것이라는 둥 그래서 경매 참여 업체 사이에는 과다한 출혈 경쟁은 피해야 한다는 둥 으레 헛기침하며 남의 일에 참견하기 잘하는 경매꾼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의 실제 상황은 예사 사람들의 일상적 판단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개되어나갔다.

"천진이가 누구냐?"
중국 천하가 발칵 뒤집혔다. 사상 최초로 민간기업가의 이름이 붙은 이른바 '천진이 신드롬'의 징조가 서서히 얼굴을 드러냈다. 그해 12월 21일 베이징에서 국무원산하 발전연구중심(장관급)과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중국 농촌외향형경제연구회와 '중국공상시보'및 '문회보'가 연합으로 주최하는 '천진이 신드롬' 세미나가 열렸다.

위광웬(우광원:于光遠), 우징리엔(오경련:吳敬璉)을 비롯한 30여 명의 재계와 학계의 저명인사들이 이 세미나에 참가하였다. AP통신은 '천진이 신드롬이 대륙에 불고 있다'라는 제하로 전세계에 타전했다. 영국의 BBC는 '천진이 신드롬'에 대한 60분짜리 특집 방송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중국의 각계각층은 '민영기업의 국영기업 흡수'로 요약되는 '천진이 신드롬'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어떤 사람은 '천진이 신드롬'을 농촌개혁에서 도시개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발생하는 새로운 현상으로, 또 어떤 학자는 그것을 사회 진보의 기초인 기층민에서 생겨난 희망의 씨앗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성공하고 있다는 하나의 좋은 증거물이라고 해석했다. 위광웬 국무원발전연구중심 수석연구원은 "천진이 신드롬은 그저 연구만 해서는 안 된다. 더욱 광범하게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천진이 신드롬'은 회사 PR과 상하이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시골출신의 한 젊은 기업인의 '고육지계'의 결과물이다. 그 계책이 당초 예상보다 수백 배 더 큰 파급효과를 거두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중국 공산당 제 14차 전당대회에서 내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수립의 깃발과 시의적절하게 잘 맞물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중국 사회는 민중의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다. 과거 대약진시대와 문화대혁명시대에는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혁명투사로 받들어져 10억 민중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개방에 탄력이 붙어감에 따라 중국 사회는 차츰 노동자들보다는 민간기업인 쪽에서 누가 하나 새로운 시대의 영웅으로 나와 주길 바랐다. 아무튼 국가 정책 실현에 대한 최선의 형태는 민간인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동이다. 한 손을 가지고는 손뼉을 칠 수 없듯이 일을 혼자서는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각본에도 없던 천진이라는 시골 청년 기업인이 불쑥 나타나 국영상점 6개를 한꺼번에 거액으로 인수하다니. 당 중앙과 정부는 14차 전당대회의 새로운 깃발 앞으로 제일 먼저 달려온 그가 기특하여(?) 깨물어라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천진이 신드롬' 속의 주인공 천진이는 광고비 한 푼 안들이고 농민기업가 겸 민영기업가 또는 청년기업가라는 3박자를 고루 갖춘 중국 기업가의 최고 모델로 뜨게 되었다.

'삼국지'의 주유와 황개는 고육지계를 써서 적벽의 대승을 거두었지만 민간기업인 천진이의 고육지계는'천진이 신드롬'으로 이어지는 현대 중국 민간기업사상 초유의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

<사진16-2>

***CIA, 날벼락(?) 맞다**

아무도 그를 몰랐다. 고향 통루 현의 현관리들은 단 한번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통루 현 태생이라는 '인민일보'의 보도를 접한 현의 선전부장 리가이진(이개진:李改進)은 현내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과 잡지를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선전부 전직원을 총동원한 조사작업을 벌인 끝에야 발행부수 5백부도 안 되는 한 격일간지 귀퉁이에 실려 있는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모월 모일 저녁 천진이라는 청년이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다가 옆자리에 누가 잊고 나두고 간 가죽잠바를 습득하였다. 그는 당장 그 가죽잠바의 주인을 수소문하여 그 집까지 찾아가 옷을 돌려주었다."

이 미담 기사는 혜성같이 나타난 대기업가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은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날벼락은 미CIA 중국지부가 맞았다. '천진이'라는 불씨 하나가 '천진이 신드롬'의 불길이 되어 온 중국대륙을 번지도록 CIA는 깜깜무소식이었다. 당시 CIA의 내부 업무지침은 중국의 모든 언론매체에 두 번 이상 출현하는 인물은 반드시 컴퓨터에 입력시키기로 되어있었다. 오늘의 '작은 인물'이 내일의 '풍운아'가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미리 대비를 하고 대중국 정책에 필요한 인물 참고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CIA는 관행대로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만을 부지런히 검색해보았다. 그러나 중국의 현단위 한 이름 없는 격일간지에 딱 한번, 그것도 가십거리로 난 천진이의 명단이 그들의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을 리는 만무하였다. 결국 CIA 중국 담당부서는 상부로부터 정보수집 시스템 미비, 정보수집 능력 미흡이라는 질책을 받는 등 큰 홍역을 치러야 했다고 한다.

이러한 후문은 여태까지도 중국 지식층의 입가에 번지는 고소(苦笑)로 중국 창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어떻게 수천만 위안을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벌어들일 수 있었나요?" 천진이의 대꾸는 거침이 없다."작은 눈덩어리를 자꾸 굴리다 보니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었지요."

1993년 9월 23일 천진이는 항저우에다가 '금의(金義)그룹'을 설립하였다. '금의'라는 그룹명은 자신의 이름을 딴 거였지만 돈(金)과 함께 정의도 추구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그렇지만 창사 초창기, 금의그룹은 음료와 광천수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여타 업체들의 일치단결된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항저우 시내의 음료 도매시장은 금의그룹의 제품을 취급하길 거부하였다.

위기에 당면하자 천진이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대학생을 영업 게릴라로 활용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대학생들을 기업의 아르바이트 세일즈맨으로 활용한 것은 금의그룹이 처음이었다. 결국 폐쇄적인 음료시장의 대문은 아르바이트 대학생 게릴라들의 공세에 무너져내렸다.

"진짜 진짜 달라요, 금의제품"의 광고 문안이 전국을 풍미하기 시작하였다. 공장을 풀가동하여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만큼 금의제품만을 찾는 수요물량이 폭발적으로 급증하였다.

한창 기세등등하던 시절, 천진이는 이렇게 큰 소리를 쳤다."당신이 기업가라면 식욕이나 성욕보다 성취욕이 1백 배는 강해야 한다. 필승의 신념만이 승리를 거둔다. 내 인생에서의 곤란은 곤란이 아니라 기회다. 기회를 즉각 잡고 즉각 실천하라. 창업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헛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이다. 인(仁), 지(智), 용(勇), 신(信), 엄(嚴)의 다섯 자로 그 생명을 끊임없이 단련시켜는 자만이 승리의 쾌락을 맛볼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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