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중국인의 상술 <15>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중국인의 상술 <15>

에누리는 없다

***상서로운 돈 벌레**

<15-1 사진>

중국인의 상술을 극명히 드러내는 중국의 속담 중에 '화비삼가 '(貨比三家)라는 말이 있다. 즉 중국인은 물건을 살 때나 사기 전에 반드시 세 군데 이상의 가격, 품질, 거래조건 등을 비교한 후 구매한다.

비단 소비자뿐만 아니다. 중국의 기업들도 이 '화비삼가'의 구매방식을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한다. 상품을 구입할 때 반드시 세 개 이상의 공급상으로부터 견적을 받아 비교해보고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 최대한 이익을 받아낸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옛날 베이징에 내로라하는 비단점포가 8군데가 있었다. 또 이들 간판에는 하나같이 '상'(祥)자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화비삼가'가 아니라 '화비팔가'라 할 그 '비단이 장사 왕서방'들의 치열한 경쟁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뤠이푸샹'(서부상:瑞蚨祥)이라는 점포였다.

1893년 산둥출신 멍루어촨(맹낙천:孟洛川)이 치엔먼(전문:前門) 따자란(대책란:大柵欄)에다 개업한 이 점포의 간판 가운데 글자는 전설로 전해오는 매미보다 조금 큰 몸집의 '돈 벌레(부:蚨)'를 가리킨다. 즉 '상서로운 돈 벌레'라는 독특한 이름의 이 비단점포는 몇 가지 남다른 특색을 갖고 있었다.

주인 멍루어촨은 과감하게도 자신을 소유권만 지닌 '동가(東家)경리'로 자처하고 전문경영인을 초빙하여 그를 '서가(西家)경리'라 칭하였다. 서가경리는 점포 내 모든 대소사를 총괄하는 전권을 가졌으며 경영 실적을 최종 책임졌다.

동가경리는 다만 서가경리에 대한 인사권만 쥐고 있었다. 서가경리 밑에는 '장꿰이더'라고 하는 중간 간부 약간 명을 두고 그 밑에는 일반 점원들을 경력과 실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또 일반 점원들은 다시 내부 점원과 외부 점원으로 분류되었다. 외부 점원은 외부의 추천이나 스카우트를 통해 채용된 자로서 업무 능력이 내부 점원보다 우수한 편이었다. 외부 점원의 보수는 철저한 능력급으로 신입이라 하더라도 실적만 좋으면 얼마든지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실적이 저조하면 해고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또 특출한 실적을 장기간 거둔 자는 장꿰이더로, 다시 최고경영자인 서가경리로까지 발탁될 수도 있었다.

내부 점원은 대부분 주인인 동가경리의 친척과 고향 친구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3년간 실습 점원으로 훈련을 받았는데 성적이 좋은 자만이 정식 내부 점원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내부 점원 중에서도 실적이 우수한 1할은 연말에 보너스를 받거나 순이익을 배당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영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졌다. 반대로 실적이 저조한 직원 1할 가량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오너의 후계자는 내부에서, 전문경영인의 후계자는 외부에서 선발한다. "이런 뤠이푸샹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 원칙과 이원적 후계자 선발제도는 봉건적 색채가 많이 남아 있던 당시는 물론 지금에도 매우 선진적이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뤠이푸샹의 상하 모든 직원은 반드시 5일에 한 번씩 이발하고, 15일에 한 번씩 목욕을 하였다. 여름에는 푸른 장삼을, 겨울에는 중국식 솜옷에다 마고자를 입었다.

손님이 점포에 들어오면 부리나케 뛰쳐나가서 매우 공손한 태도와 미소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차를 대접했고 비단을 얼마든지 꺼내보게 했으며 천천히 고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구입한 비단은 정성껏 포장을 한 다음 환한 미소와 함께 두 손으로 손님에게 바치고 허리를 45도 이상 굽힐 정도로 친절하게 배웅하게 하였다.

점원은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고 항상 행동이 굼뜨지 않았다. 만약 손님이 어디에 연락할 일이 생길 경우에는 마음껏 전화를 쓰도록 하였으며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산 손님에게는 집까지 배달도 해주었다.

보통 권문세가의 처첩들은 자신이 직접 오는 대신 하인들을 점포로 보냈다. 그러면 제일 유능하고 용모 단정한 점원이 고급 실크와 융단과 모피 등을 들고 하인의 뒤를 따라나섰다. 결국 그 집까지 가서 그녀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물건을 고르게 하여 한몫에 큰돈을 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뤠이푸샹은 고급 실크점이라는 인상이 깊었지만 평민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값싼 무명이나 삼베를 팔기도 하였다. 특히 환절기에는 노무자들에 매우 저렴한 값만 받고 옷을 염색하여주어 뤠이푸샹을 칭송하는 소리가 베이징 저잣거리에 끊이지 않았다.

뤠이푸샹은 부유층에게는 가격이 높을수록 품질의 우수성을 상징하고 높은 지위를 상징하는 이른바 '긍지가격' 정책을 폈다. 수요량이 많은 서민층에게는 될 수 있으면 저렴한 가격을 정하되 가격을 0.89, 1.88위안 등으로 결정하여 싸다는 느낌을 주는 심리적 가격결정 방법을 택하였다.

뤠이푸샹의 사전에는 '에누리'가 없었다. 여기에 예외는 절대 없었다. 손님이 가진 돈이 단 한 푼이 모자라더라도 절대로 깎아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구입하려는 손님에게는 점원을 손님의 집까지 딸려 보내 수금해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뤠이푸샹의 전략은 최소한 '화비삼가'의 불꽃 튀는 상업 전쟁터에서 지나치게 무모하고 박절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깊은 뜻'이 있었다. 첫째 "나는 물건의 품질을 100퍼센트 보증하겠으니 당신은 가격에 일절 참견하지 말라." 즉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이익에 일체의 에누리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피차간의 신용에도 티끌만한 에누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둘째 점원에게는 빈틈없는 태도와 함께 뤠이푸샹 직원이라는 긍지를 심어주고 손님들에게는 물건과 명예를 에누리 없이 구입한 만큼 뤠이푸샹을 널리 선양해달라는 목적이었다.

***포목상 '삼국지'의 에누리**

<15-2사진>

20세기 전반 상하이에는 포목상들의 '삼국지'시대가 있었다. 시에따샹(협대상:協大祥), 바오따샹(보대상:寶大祥), 신따샹(신대상:信大祥)이 그'삼국지'의 주역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따샹은 사라졌고 바오따샹은 겨우 잔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에따샹은 중국 최고의 번화가 상하이 난징동루(남경동로:南京東路)에 7층짜리 현대식 종합직물백화점으로 변신했다. 시에따샹은 단일 직물 쇼핑몰로는 중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1912년 8월, 시에따샹은 순주어장(손탁장:孫琢章)등 저장 성 출신 청년들 세 명에 의해 소규모의 포목상으로 창립되었다. 시에따샹이 지금 우리의 동대문 시장처럼 중국의 포목, 양복감 등 섬유 상품들 거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상하이에서 시에따샹이 생존하고 승리하기 위하여 채택한 경영비법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15-3 사진>

첫째, 일(一)자형 진열대를 채용했다. 매장의 판매촉진을 위해 과거 중국 상점들의 전통식 진열 방식인 동(同)자형을 혁파하고 일자형으로 바꿨다. 이것은 상품과 손님의 거리를 없애 손님들이 마음 놓고 물건을 고를 수 있게 했다. 손으로 잡으면 잡힐 정도로 가까이 있는 물건은 손님들의 구매욕을 자극했다. 손님들은 물건을 많이 보면 볼수록, 많이 고르면 고를수록 물건은 많이 팔려나가게 되었다.

둘째, 판매상품의 다양화다. 시에따샹에는 포목과 직물뿐만 아니라 비단, 침구류, 커튼, 양장과 양복의 원단류 등 섬유제품이라면 없는 게 없도록 하였다. 고급 중급 저급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상품도 시에따샹에 가면 있더라하는 평판을 듣게 하였다.

셋째, 친절과 신용의 고객 서비스다. 각 점원마다 단골손님 늘리기 제도를 시행하여 점원들에게 친절과 신용의 경쟁을 붙였다. 자연히 점원은 손님들을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로 대했고 일단 판 상품에 대해서는 각자 가격과 품질에 무한책임을 졌다. 점원마다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수십 명의 단골손님이 있었고 심지어 대를 잇는 단골손님도 있었다.

넷째, 인재선발과 양성을 중시했고 스카우트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경쟁 업소나 다른 각계 분야에서도 인재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빼내왔다. 이 결과 씨에따샹에는 주산과 암산에 능한 자, 직포를 맨손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아주 빠르게 재는 자 등 각종 괴재들이 모여들었다.

성이 '우'(吳)가인 어떤 사람은 은전을 통 속으로 던지는 소리만으로 은전의 진위를 감별해낼 수 있었다. 주인은 거액으로 그를 스카우트하여 매일 수만 개씩 쏟아져 들어오는 은전의 진짜 여부를 감별케하였다.

그리고 조그만 천조각만을 보고도 그 직물의 원료, 시세, 염색, 무게 등을 판별할 수 있는 구매 담당자를 스카우트하거나 내부교육으로 양성하였다. 실습생들은 매일 밤 직물학과 주산, 그리고 판매와 서비스 기법을 배웠으며 엄격한 시험을 통과하여 정식 점원으로 판매대에 설 수 있었다.

끝으로 가장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부알쟈'(부이가:不二價), 즉 에누리 없는 정찰제를 시행하였다. 이전의 포목상들은 상품에 가격표 대신 암호를 붙였다. 고객들은 포목을 이것 저것 최소한 세 번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흥정을 벌이는 게 예전의 포목상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시에따샹은 점포 간판 옆에다 '부알쟈'를 크게 써 붙여놓고 상품마다 가격표를 붙였다. 상하이의 시에따샹은 앞서 베이징 최고의 비단점포 뤠이푸샹처럼 에누리는 한 푼도 없었다. 손님들도 대개는 귀찮은 흥정 절차가 필요 없는 정찰제를 더 선호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경쟁 업체인 바오따샹, 신따샹이 연합으로 시에따샹을 표적 삼아 대규모 저가 공세를 펼쳤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굳이 앞에서 말한 '화비삼가'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계산이 빠르고 영악하기로 중국에서 으뜸인 상하이의 소비자들의 발길은 자연 그쪽으로 쏠렸다. 시에따샹의 매출은 형편없이 뚝 떨어졌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시에따샹은 1921년, '눈물'을 머금고 정찰제는 계속 유지하되 경쟁 업체와 같은 가격으로 인하하고"포 1척(尺)에 1촌(寸)을 덤으로 더 준다"라고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1척을 자로 잰 다음 거기에 1촌을 덤으로 더 주었다. 경쟁 업체와 똑같은 가격에다 +1촌의 매력이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시에따샹은 1927년에 2촌을, 1929년에는 3촌을 덤으로 더 준다고 거듭 공포해나갔다. 똑같은 물건이라면 조금이라도 많이 주는 쪽이 환영받게 마련이다. 판매자의 돈주머니도 두둑해지고 구매자의 발길도 멈추지 않았다. 매출은 매일매일 신장되었고 이윤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시에따샹이 흘렸던 '눈물'은 실은 두번째부터는 가짜 눈물이었다. 즉, +2촌, +3촌을 더 준다는 것은 눈속임이었다. 덤으로 주는 촌이 늘어난 만큼 가격도 기존의 가격표에서 '살짝'올라갔다. 한마디로 에누리는 없다는 얘기다. 1999년, 시에따샹은 자신의 70여 년 전 술수를 외부에 털어놓았다. 신따샹과 바오따샹 두 경쟁 업체가 망하거나 쇠락하여 소비자가 '화비삼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만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사진15-4>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